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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징용

일제의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인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다

1939년 ~ 1945년

강제 징용 대표 이미지

1940년대 홋카이도(北海道) 샤쿠베쓰(尺別) 탄광에 강제동원된 노동자들

e뮤지엄(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1 개요

일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제정한 ‘국가총동원법’(1938) 시행 이후의 인적 자원의 동원 중 병역에 복무시키는 징병을 제외한 나머지를 ‘징용’으로 총칭한다. 징용의 제도로는 모집, 관알선, 징용 등이 있고, 좁은 의미로는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 1939)’에 의한 징용만을 징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어떠한 형태의 징용이든 노동자 확보와 배치에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깊숙이 개입했으며, 납치나 인신매매 같은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징용된 사람들은 국내뿐 아니라 홋카이도(北海道), 사할린(Sakhalin) 등 일본 각지와 남양군도(南洋群島) 등에 배치되어, 주로 작업 환경이 열악한 탄광 및 건설 현장과 공장 등에서 혹사되었기 때문에 산업재해 및 사망 사고에 노출되었고 임금의 대부분은 강제 저축되었다. 일본 정부는 미지급 임금 등을 공탁(供託 : 돈이나 물건을 제공하고 그 보관을 위탁함)하고 현재까지 지급하지 않고 있지만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개인 청구권 행사가 제한되어 있다.

2 징용의 여러 제도: 모집, 관알선, 징용

일제는 중일 전쟁이 장기화되자 1938년에 ‘전시(전쟁에 준하는 사변의 경우를 포함)에 있어서 국방 목적 달성을 위해 나라의 전력(全力)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 및 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그 제4조로 필요할 경우 ‘제국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시킬 수 있게 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1939년 7월에 ‘국민징용령’을 제정하여 그해 10월부터는 조선과 대만 등 식민지에서도 시행했다. 다만, 이때는 징용의 대상을 ‘국민직업능력신고령(國民職業能力申告令)’에 기초하여 신고해야 할 기능자로 한정(제3조)하고, 직업소개소의 소개 및 기타 모집의 방법으로 필요한 인원을 얻지 못한 경우에만 이들을 징용(제2조)하여 국가에서 행하는 총동원 업무에 종사(제4조)시키도록 했기 때문에 적용 범위가 넓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1940년 10월에는 군사상 특히 필요한 경우 기능자 이외의 자도 징용할 수 있고, 정부가 관리하는 공장, 사업장과 기타 시설에도 종사시킬 수 있도록 했고, 1941년 12월에는 이를 다시 군사상 목적 외에, 민간공장에도 적용할 수 있게 하는 등 법령이 개정될 때마다 징용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그래도 이때까지의 징용은 소개와 모집을 보충하기 위한 제도였으나, 일제는 1943년 7월 ‘국가의 요청에 기초하여 제국신민으로 하여금 긴요한 총동원 업무에 종사’(제2조)하게 하는 것으로 변경하여, 징용을 국민의 의무로 일반화시켰다. 이에 따라 노동자뿐 아니라 사업주도 징용의 대상이 되고, 피징용자는 ‘충성을 주[旨]로 하여 그 종사하는 총동원 업무에 힘써야’(제16조의 3) 할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렇게 징용이 모든 국민, 모든 사업장의 의무가 되자, 1944년 2월에는 다시 국민징용령을 개정해 특정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모두 징용할 수 있는 현원징용(現員徵用)을 시행함으로써, 군수 물자와 무기를 생산할 노동력을 보다 쉽게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징용이 일반화되면서, 국민징용령은 1945년 3월 ‘국민근로동원령(国民勤労動員令)’이 공포되면서 폐지되었다.

조선인의 경우, 1944년 이전까지는 좁은 의미의 징용보다는 주로 모집과 관알선의 방식이 활용되었고, 일제가 본토의 노동력 부족을 조선인으로 보충하려 했기 때문에 상당수가 일본으로 동원되었다. 당초 일본 정부는 1939년 9월부터 조선인 노동자의 집단 이입을 시행하여 일본의 사업주들이 조선에서 노동자를 ‘모집’할 수 있도록 허가했고,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으로 노동자의 모집과 수송의 전 과정에 개입했다. 그렇지만 이 단계까지는 형식상 모집의 주체는 고용주로, 고용주가 모든 비용과 책임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용주들이 절차가 번잡하고 시일이 많이 걸리는 모집 제도에 불만을 품자, 일본 정부는 1942년 2월에 ‘관알선’ 방식을 도입해 조선인 노동자의 공출 및 수송사무를 중앙에서 대행하는 것으로 일원화했다. 이후 조선에서도 조선인에게 일반 징용 방식이 적용된 것은 1944년 8월부터였지만, 이미 2월부터 일본뿐 아니라 조선도 현원징용이 개시 되어 조선인 피징용자 수가 급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집, 관알선을 포함하여 징병이 아닌 노동력 동원은 모두 ‘징용’으로 통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느 형식이든 국가총동원법에 의거한 노동력 동원의 전체 틀 속에서 이루어졌고, 모집과 관알선의 형식으로 동원된 사람들도 징용의 범위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징용으로 전환되어 다른 지역, 다른 사업체, 심지어는 군무원(군속)으로 전환 배치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모집의 방식으로만 노동자를 모집한 사할린은 다른 곳에 비해 착취가 덜한 편이었지만, 1944년 이후 사할린에서 채굴한 자원을 본토로 옮기기 어려워지자 일제는 노동자들을 본토의 다른 광산과 공장으로 이동시켰다. 이로 인해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과 이별하게 된 경우도 많다. 또한 이 세 제도는 병치되어 법규상 노동자 동원의 방식이 다르더라도 실제 지역에서 사람을 모을 때는 크게 구분되지 않고 모두 철저히 관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동원된 당사자가 이를 엄밀히 구별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집, 관알선, 징용의 세 제도들은 조선인을 일본 본토, 사할린, 남양군도 등 해외로 송출할 때뿐 아니라 한반도 내에서 노동력을 동원할 때도 활용되었다.

여성의 경우도 노동력 동원의 예외는 아니어서, 1944년 8월에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이 공포되었지만, 이 역시 법령의 공포는 기존의 동원 관행에 법적 근거를 부여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그 이전부터 ‘정신대’라는 포괄적인 명칭 아래 모집, 관알선, 학교를 통한 동원 및 강제연행 등의 방식으로 여성들을 공출하였고, 원칙적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미혼 여성을 대상으로 했으나 일제 말기로 갈수록 무차별 연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동원의 방식, 송출 지역, 성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동력 동원들은 서로 본질이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조선인 징용의 방식

1939년부터 시행된 ‘모집’ 방식에서는 개별 고용주가 주체가 되어 조선인 노동자를 동원하였다. 모집 허가를 받은 사업체나 그 청부업자가 조선총독부에게서 할당받은 지역에 가서 사람을 모집하는 방식이었는데, 치안문제를 이유로 경찰이 모집사무를 관할하고 현지에서도 함께 했다. 또한 자유계약의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총독부-도-군-면 단위로 모집 인원이 할당되었다. 다만, 조선총독부도 1937년부터 서북부의 토목공사에 필요한 인원을 남부에서 차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삼남 지방의 과잉 인구를 송출하되, 조선 내 수요를 우선시하여 일본 정부의 요구보다는 총 할당인원 수를 축소하였다. 하지만 1939년은 대가뭄으로 농사 피해가 극심했기 때문에, 총독부가 일본으로의 노동력 동원을 가뭄 피해 구제를 위한 대책인 것처럼 선전하자 상당수의 농민들이 모집에 응해 노동자가 되기도 했다. 이어 1940년 3월 조선총독부는 ‘모집에 의한 조선인 노동자의 내지 이주에 관한 건’을 각 도에 통첩하여, 모집을 신청자의 자유에 맡기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관이 협력하여 조선 내 동원과 조선 외 동원이 서로 충돌 없이 시행될 수 있도록 관리 통제하도록 명했다. 이를 위해 경성, 부산, 대구, 평양, 신의주, 함흥의 직업소개소를 국영으로 전환하고, 부군도(府郡島)의 지방 관청이나 직업소개소에서 조선 내외의 노동력 송출을 담당하게 하는 등, 모집 방식에서도 조선총독부가 그 허가와 시행에 깊게 관여했다. 즉, ‘직업소개업무 규정안’ 에 따르면, 특히 노동자의 취업지가 일본 본토, 대만, 사할린, 남양군도 또는 외국인 경우에는 조선총독부에 구인 신청을 하게 하고, 고용주가 모집 종사자를 고용할 경우에는 부군도 관청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는 직업소개소에서 송출 업무를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는 직업소개소가 과장된 고용 조건을 제시하여 사람을 모집하는 한편, 해당 지역 경찰에게 협조를 요청하면 경찰이 당사자의 의사도 묻지 않고 할당 수를 강제 공출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동원된 조선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직업소개소 직원과 경찰이 수송 과정에 동행하여 사람들을 감시하거나 감금하였다.

1942년에 도입된 ‘관알선’ 방식은 노동자의 공출 및 수송사무를 일원화하여 관에서 담당하는 것이었다. 1941년 6월에 조선총독부 노무과에 설립된 조선노무협회가 모집사무의 주체가 되어, 기업주가 할당 인원에 대해 1인당 정액을 미리 지불하면 조선노무협회가 그 수에 맞춰 공출해주는 형식이었다. 신청부터 할당에 이르는 과정도 일본의 통제회가 각 업자들을 대행하여 조선총독부와 교섭했고, 또한 공출된 노동자의 수송사무도 동아여행사에 일임하여 단체수송을 실시했다. 고용주는 비용만 지불하고 실제 모든 사무는 일원화하여 대행시킴으로써 동원의 효율성을 높인 것인데, 이로 인해 각 고용주는 공출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게 된 반면, 비용이 미리 지불된 조선인들은 경찰의 강압적인 공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임에도 일부 회사에서는 할당 인원의 100% 공출을 확보하기 위하여 직접 직원을 조선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파견된 직원은 관계 관청에 로비를 하여 공출을 쉽게 할 수 있는 지역을 배정받거나 해당 군에서 인원을 채우지 못하면 도청에 항의해 문책을 종용하기도 했다. 또 동아여행사는 수송만 담당했기 때문에 고용주는 따로 감시자를 두고 도망자가 없는 경우 인센티브까지 지급했지만, 강제 동원된 노동자의 탈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점차 노동력이 고갈되는 가운데 동원이 더욱 어려워지자, 결국 1944년 ‘징용’에 의한 동원 방식이 전면 도입된 것이다. 이후 1945년 일제의 패망까지는 제도상으로도 국민징용령에 의한 강제 징용이 이루어졌고, 징용 기피자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수형자로서 다시 작업장에 동원되기도 했다.

4 피징용자의 노동 환경

일본으로 징용된 조선인들은 대개 16~22세의 젊은 청년들이었고, 시기는 1943~45년에 집중되었다. 이들은 일본에 도착한 후 다시 열차나 트럭으로 각지의 탄광, 건설 현장, 군 시설 공사장 등에 배치되었는데, 특히 홋카이도와 사할린의 탄광으로 보내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의 일과 시간은 보통 오전 6시부터 오후 6~8시 정도로, 하루 10~14시간의 중노동이었고, 탄광은 원칙적으로는 12시간 노동제였지만 작업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15~16시간, 많은 양의 석탄을 채굴해야 하는 경우에는 연속 30여 시간을 일하기도 했다. 또한 대개 농민이었던 이들은 짧은 훈련을 받은 후 일본인 광부들이 꺼리는 가장 깊은 곳, 또는 가스 발생이나 낙반 사고가 빈발하는 등 산업재해의 위험이 높은 곳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부상과 사망 사고도 잦았다. 게다가 군대 경험자가 업무를 관리 감독하면서, 노동자들이 도주를 꾀하거나 조금이라도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를 핑계로 구타를 자행했다. 임금도 일본인 평균 일당인 약 4엔의 절반 이하였는데, 그나마 현금으로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임금 내역이 기재된 봉투와 용돈 정도만 주고 나머지는 강제 저축한 것인데, 현금을 주면 도망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대개 근무지 부근에 임시로 설치된 기숙사에 수용되었다. 방 하나에 7~10명이 함께 생활하여 다리를 뻗고 자기도 힘들 정도였고, 사감이 항상 감시하며 외출도 금지시켰다. 고된 노동임에도 식사는 잡곡이나 저질의 쌀로 지어진 밥이 제공되었고, 그마저도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대변을 1주일에 한 번밖에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쌀이 배급되고는 있었지만, 관리자들이 경찰에 뇌물을 주고 중간에서 가로채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도 식사량이 절대적으로 적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심지어 회사는 다치거나 병들어 일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식사량을 줄이거나 아예 주지 않았고, 일할 가망이 없어지면 소액의 위로금을 주고 유기했다. 혹은 갱내 사고로 사망한 경우 구덩이를 파고 그냥 묻기도 했고, 사찰에서 장례를 치러주는 경우에도 그 비용을 사망자의 강제 저축에서 가져다 쓰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열악한 노동·생활 조건이었기 때문에, 고용주는 남성 노동자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기업위안소를 설치하여 조선인 여성을 두고 성적 서비스를 강요하기도 했다. 군위안소를 설치한 것과 같은 논리로 ‘산업전사’들을 위해 여성의 성을 관리하고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모집 조건과 다른 임금 및 작업 시간에 대한 불만, 작업의 어려움, 식량 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한 노동자들의 도망이 속출했다. 1939년부터 1945년 3월까지 징용된 조선인 중에 약 22만 명이 도주하였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종의 신분증 기능을 하는 협화회 수첩과 노무 수첩을 소지할 의무가 있었는데, 회사는 도주를 막기 위해 저축 통장과 협화회 수첩을 압류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지리나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돈도 협화회 수첩도 없이 도망쳐야 했던 조선인들은 경찰의 검문에 걸려 다시 붙들려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회사는 다시 죽지 않을 만큼 구타와 고문을 가하거나 자체 형무소에 가둬 굶겨 죽이기도 했다.

국내 징용도 상황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관알선, 도내(道內) 동원(보국대, 할당 모집 등), 국민징용 등으로 1938~45년 사이 약 648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 중 약 578만 명이 도내에서 동원되고 나머지는 대개 삼남 지방 출신자들이 한반도 북부의 군수 건설 현장이나 탄광, 공장 등으로 동원되는 상황이었다. 주로 국외로 보내기 어려운 미성년자와 노인들이 국내의 탄광과 공장 등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사망자의 연령도 10대에서 70대까지 폭이 넓은 한편, 국외 동원 사망자에 비해 10대 미성년자의 비율이 높고, 일제 말기로 갈수록 국내 동원 수가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희생자 수는 점점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1944년 한반도 내 118개 공장과 광산에서 시행된 현원징용으로 징용된 사람들도 이 속에 포함되어 있어, 이들 역시 도외나 국외로 송출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강제 노동에 혹사당했다.

조선에서 국외로 송출된 조선인 노동자 수에 대해서는 통계마다 편차가 심하지만, 일본 측 공식통계는 최소 60~70만 명을 제시하고 현재 한국 정부와 학계에서는 약 15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렇게 차이가 큰 이유는 관련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징용이나 노무동원의 개념과 방식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여 집계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징용에 대한 엄밀한 개념 정의와 실제 현실을 고려한 역사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5 해방과 귀국, 그 이후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들이 귀국을 희망했다. 주로 회사에서 마련해준 배나 군용선, 미군 수송선 등을 이용했지만, 귀국 인원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서둘러 귀국하려 한 사람들은 민간의 소형 선박을 이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도호쿠(東北) 지역에서 출발한 첫 귀국선 우키시마(浮島丸)호가 의문의 폭발로 침몰하여 승선자들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고, 그 외에도 태풍 및 각종 사고로 인한 소형선의 난파와 침몰도 비일비재하여 큐슈(九州)나 대마도(大馬島) 인근에는 당시 사체로 표착한 조선인들의 유골이 여전히 신원미상인 채로 남겨져 있기도 했다.

또한 피징용자들의 강제 저축된 임금도 여전히 미지급된 상태인데, 2013년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우체국에서 조선인 명의의 통장 수만 개가 새로 발견되는 등 그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은 실정이다. 하지만 그 전후 처리에 대해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기 때문에, 개인 또는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으로부터 미지급 임금을 돌려받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징용에 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한국 정부 역시 그간 민간인의 대일 보상 문제는 국내에서 일괄 처리한다는 방침에 입각하여 1974년 ‘대일민간청구권 보상법안’ 등을 제정했지만, 당시 지원 범위가 협소하고 피해를 입증하기도 어려워 실제로 보상 받은 사람은 극히 적었다. 이에 2007년에 ‘태평양 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을 다시 제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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