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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

강요된 개항(開港), 불평등한 조약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 대표 이미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통해 체결된 강화도 조약

1875년(고종 12) 9월 20일 두 척의 이양선(異樣船)이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이양선은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수십 명의 해병이 식수보급을 명목으로 보트에 분승하여 해로를 탐측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에 접근하였다. 이곳을 경비하던 조선 수비병이 수차례 경고하였지만 이들은 듣지 않았고 이에 수비병은 포격을 가하였다. 포격을 받은 보트가 모함(母艦)으로 철수한 뒤 모함은 초지진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함대는 방향을 돌려 영종도에 병력을 상륙시켜 살륙, 약탈, 방화를 자행한 뒤 철수하였다. 이 이양선은 일본으로부터 온 군함인 운요호(雲揚號)였다. 일본은 이 무력시위를 핑계로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였다. 운요호사건은 이듬해인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2 이양선의 시대

조선 연안에 이양선이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양선은 18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 이양선들은 대부분 중국과 일본 사이의 항로를 오가는 서양 상선들이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양선들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1866년(고종 3)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면서 약탈을 저지르다가 평양 군민과 충돌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에 이어 1868년(고종 5)에는 독일인 오페르트(Oppert,E.J.)가 아산만에 상륙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파헤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서양 민간인의 도발이 빌미가 되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처럼 서양의 군함이 직접 쳐들어오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렇게 거듭된 이양선의 도발에 맞서 조선은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미국 페리제독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1854년(철종 4)에 미국에게 개항하였다. 서양에 대한 굴욕적인 개항으로 말미암아 일본 내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왕정복고를 통해 신정부가 구성되었다. 이른바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적극적인 부국강병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기존의 신분적 특권을 박탈당한 무사계급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첫 번째 목표가 된 곳은 류큐였다. 일본은 1874년(고종 11) 5월 대만출병을 통해 류큐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차단하고 오키나와현으로 병합하였다. 일본의 다음 목표는 조선이었다. 대만 출병 당시 청은 조선에 “일본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만 정벌을 수행한 뒤 나가사키에 주둔중이며 장차 조선을 정벌하려 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강화해협에 일본 군함인 운요호가 나타난 것이다.

3 일본과 외교 분쟁

운요호사건의 불씨는 이미 메이지유신 직후부터 싹트고 있었다. 일본은 1867년(고종 4) 메이지유신을 통해 신정부가 구성되면서 이를 알리는 외교문서를 조선과 외교를 전담하던 쓰시마번을 통해서 조선에 보내왔다. 조선정부는 이 외교문서가 전통적인 형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하였고 이것이 둘 사이에 외교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당시 이 외교문서를 가지고 와 동래부에 접수시킨 인물은 쓰시마번의 가로인 히구치 데츠시로(樋口鐵四郞)였다. 동래부사는 이 외교문서가 전통적인 외교형식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접수에 난색을 표시했다. 메이지유신 이전 조선의 외교 파트너는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이끄는 쇼군(將軍)이었다. 조선의 국왕과 일본의 쇼군이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외교 교섭을 벌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왕정복고를 통해 들어선 일본의 신정부가 이른바 텐노(天皇) 즉 천황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외교형식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조선은 청을 사대하고 하고 있었으므로 ‘텐노(天皇)’를 표방하는 일본의 외교문서를 받아들 수 없었다. 더구나 당시 서양세력의 도전을 두 차례나 물리친 흥선대원군이 대외강경책을 천명하던 무렵이므로 더더욱 이러한 외교문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조선 정부는 신중한 검토 끝에 일본이 보내온 외교문서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일본에게는 새로 수립된 정권의 권위와 정당성을 손상시킬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1870년(고종 7)에는 쓰시마번의 외교관할권을 회수하여 중앙 관청인 외무성에서 담당하였다. 외무성은 관리인 사다 하쿠보(佐田白茅)와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를 직접 조선에 파견하여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렇게 외교문서 접수문제를 둘러싸고 양국이 평행선을 그으면서 양국 내부에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져만 갔다. 일본 내부에서는 조선에 대한 무력침공도 불사한다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 내부에서 정쟁이 벌어져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이라는 내전으로 비화되기까지 하였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이미 서양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점을 들어 일본이 서양과 다를 바 없다는 이른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이 대두하였다.

4 외교 교섭 도중에 일어난 운요호 사건

고종(高宗)은 1873년(고종 10) 흥선대원군을 제치고 친정에 나서면서 정책적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대외정책이었다. 일본과의 외교문제도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려 하였다. 우선 박정양(朴定陽)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동래부에 내려 보냈다. 그로 하여금 정현덕(鄭顯德), 안동준(安東晙) 등 그간 일본과 외교실무를 담당하던 인물들의 비위사실을 조사하는 한편 당시 왜관(倭館)에 주재하고 있던 모리야마 등 일본 외교관과 외교적 접촉을 시작하였다. 정현덕과 안동준은 흥선대원군 계열의 인사들이었는데 이때 제거되었다.

고종은 이렇게 일본과 외교 갈등을 전향적으로 해결하려 하였지만 대신들 사이에는 신중론이 지배적이었다. 또 아직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흥선대원군은 서계 접수를 맹렬히 반대하였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고종의 편에 선 인물은 박규수(朴珪壽) 등 몇몇에 지나지 않았다. 박규수는 우의정으로 있을 때는 조정 내에서 외교문서 접수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으며 1874년(고종 11) 9월 우의정 자리에서 물러나면서부터는 흥선대원군에게 서신을 보내 설득하는 방식으로 고종의 정책 전환을 뒷받침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내에 왜양일체론은 여전히 강세였다. 왜관에서 진행되고 있던 외교 교섭은 늘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왜관에 머무르고 있던 모리야마는 강경한 포함외교를 벌일 것을 자국 정부에 건의하였다. 그의 주장은 “조선은 지금 내홍(內訌)이 심하고 만약 대원군이 다시 득세하면 또 다시 쇄국정책이 강화될 것이므로 쇄국양이당(鎖國攘夷黨)이 세력을 만회하기 전에 무력을 사용하면 조선 개항은 성취될 수 있으며 군함 1~2척을 파견하여 해로를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면 대한교섭에 유리한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1875년(고종 12) 5월초 운요호 등 군함 2척을 부산에 파견하였다. 운요호가 부산에 입항하자 조선 정부가 이에 항의하였지만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는 이를 무시하고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영흥만까지 순항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 뒤 운요호는 다시 남해와 황해를 거쳐 강화도로 접근하여 마침내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군사적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5 강화도 조약의 체결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1876년(고종 13) 2월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파견하여 경기연안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방법으로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신헌(申櫶)을 강화도로 파견하여 일본의 전권대사인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와 협상하도록 하였다. 신헌은 무관으로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군사작전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당시 조선정부가 일본의 교섭요구를 또 다른 양요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이 협상에 응한 데에는 청의 권유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면서 일본과 충돌은 가급적 피하려는 외교적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청은 당시 조선에게 일본과 협상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신헌과 구로다는 강화도의 연무당에서 만나 교섭을 시작해 20여 일간의 교섭 끝에 2월 27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정식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이며 ‘병자수호조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화도 조약은 모두 12개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요 조항으로는 ①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제1조), ②양국은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사무를 협의한다(제2조), ③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가한다(제5조), ④조선은 연안항해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측량을 허용한다(제7조), ⑤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屬人主義)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제10조), ⑥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장정을 체결한다(제11조) 등을 들 수 있다.

6 관세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이렇게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제1조부터 문제였다. 일본은 청의 종주권 주장을 차단하기 위해서 ‘조선이 자주국’이란 문구를 포함시켰다. 이는 대륙침략이라고 하는 장기적인 목표를 염두에 둔 외교적 포석이었다. 또 이 조약은 치외법권 부여 등 조선에 불리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조약을 불평등조약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강화도 조약이 가지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관세에 관한 규정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조약이라고 하는 근대적 외교형식에 생소했기 때문에 이를 조약문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전통적인 교린관계의 회복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교섭에 나섰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외국과 거래하는 국내 상인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전통적 방법을 그대로 시행하면 된다고 안이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일본은 조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1878년(고종 15) 11월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일본 공사는 동래부사에게 이 문제에 대해 항의하였으며 심지어 무력시위까지 감행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제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일본과 관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외교적 과제가 되었다.

당시 이 과제를 떠맡은 인물은 김홍집(金弘集)이었다. 그는 1880년(고종 17)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갈 때 가장 핵심적인 임무가 바로 관세 문제 해결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교섭에 나섰지만 일본은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일본은 오히려 강화도 조약에서 약속한 인천 개항을 서둘러 이행하라고 요구하였다. 당시 일본 주재 청 공사는 일본 자신이 서양과 불평등조약 개선을 위해 교섭하고 있으니 이를 거론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홍집은 일본에 머무는 기간 안에 이 문제를 타결 짓지 못하였다. 인천개항 문제는 그해 연말 조선에 부임한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변리공사와 사이에 타결되었지만 관세 문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관세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1882년(고종 19)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이 조약에 사치품 30% 일용품 1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측은 이 조약을 근거로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조미조약이 체결되고 보름 뒤인 4월 19일 김보현(金輔鉉)과 김홍집에게 일본과 관세 문제를 교섭하기 위한 전권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때도 이 문제는 바로 타결되지 못했고 결국 조미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883년(고종 20) 일본과 조일통상장정을 맺으면서 여기에 관세 조항을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로써 강화도 조약으로부터 시작된 일본과 근대적 외교관계의 수립과정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조선은 근대외교에 어두웠던 탓에 값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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