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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사건

거문도에서 조선 정부의 외교력이 시험대에 오르다

1885년(고종 22) ~ 1887년(고종 24)

거문도 사건 대표 이미지

영국이 조사한 거문도(Port Hamilton) 해도

미 해군 수로국 간행(보스톤 공공도서관 소장)

1 개요

거문도 사건이란 영국 해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1885년(고종 22) 4월부터 1887년(고종 24) 2월까지 약 2년간 전라도 흥양현(興陽縣) 소속의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한 사건을 일컫는다. 19세기 내내 영국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은 세계 질서를 자국에 유리하게 재편하고 있었다. 거문도 사건은 이러한 양강 구도 속에서 일방적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 조선 정부의 입장을 비유하자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격이었다. 약소국 조선의 정부가 서양제국을 상대로 외교를 통해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방식을 잘 포착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2 영국과 러시아의 식민지화 경쟁, 그 속의 거문도

19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화 작업이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당시 주요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러시아는 19~20세기 초까지 근 1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 내륙의 식민지 확장에서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패권 다툼을 벌였다.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라고 불리는 전략적 식민지화 경쟁이었다. 거문도 사건은 그 자장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군사적 갈등이 극에 치달은 장소는 바로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이었다. 러시아는 1884년 투르키스탄(Turkestan)을 합병한 이후 아프가니스탄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영국은 아시아 경영의 보루인 인도의 안전을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러던 와중 1885년 3월 30일, 러시아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의 펜제(Panjdeh, 현재의 투르크메니스탄 남쪽에 위치한 도시)에서 영국군의 훈련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궤멸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이른바 ‘펜제 사건’이다. 이후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금방이라도 전쟁이 터질 듯한 기운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이렇듯 러시아는 19세기 이후 중앙아시아 내륙에서의 식민지 확장을 꾀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혹독한 자연조건으로부터 기인한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고위도의 시베리아 대륙에 자리 잡은 러시아는 겨울만 되면 모든 항구가 얼어붙었던 것이다. 5개월가량 이어지는 긴 겨울에는 바다를 통한 식민지 확장 사업도 자연히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즉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남하 작전을 수행하였다. 1860년 북경조약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지역의 영토를 할양받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 역시 겨울에 쇄빙선(碎氷船)을 이용해 바다의 얼음을 부숴야 할 정도로 완전한 부동항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부동항을 얻기 위한 남하 정책을 추진했고, 그중에는 조선과 교섭을 통해 함경도의 영흥만(永興灣)을 조차(租借, 국가 간의 합의에 따라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빌려 일정 기간 통치하는 일)하려는 계획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러시아와의 돈독한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한편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해군 요충지로서 거문도를 일찍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영국은 이미 1845년부터 조사단을 파견하여 거문도와 주변 지형을 조사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 거문도의 영문 지명인 해밀턴 항(Port Hamilton)은 1845년 당시 영국 해군성 부상(副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1854년 러시아 황제의 특사였던 푸차친(Yevfimiy Vasilyevich Putyatin) 제독 또한 거문도에서 11일간 머무르면서 섬의 정세와 지형을 조사하고, 중국인 통역을 대동하여 한문 필담을 통해 주민의 성향을 파악하였다.

각 열강이 거문도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거문도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러시아 함대가 중앙아시아로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길목에 거문도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펜제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는 러시아 함대의 항로를 끊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러시아의 항로를 중간에서 차단하는 동시에 영국 해군의 군수품 보급기지로 거문도를 활용하기 위해 조선 정부와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1885년 4월 16일 무단으로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3 조선 정부의 외교적 대응과 좌절

전라도 흥양현에 소속되어 있던 거문도의 다른 명칭은 거마도(巨磨島)로, 동, 서, 남쪽으로 각기 다른 모양의 섬이 우뚝 솟아 있어 삼도(三島)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중 거주민이 있는 섬인 동도(東島)와 서도(西島)에는 총 네 개의 마을에 430여 호(戶), 2,0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남쪽 섬인 고도(古島)는 푸른 보리밭이 무성하게 펼쳐진 무인도였다. 영국군은 남도를 주둔지로 선택하여 항구를 만들고, 도로를 닦고, 우물을 파고, 집을 짓는 등의 제반 공사를 진행하였다.

당시 조선과 외국의 대외관계 업무를 처리하던 중앙 부서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약칭 외아문(外衙門)이라고도 한다. 외아문에서 영국군의 거문도 점거를 처음 인지한 시점은 점거 약 3주 후인 1884년 5월 7일이었다. 청과 일본의 영사관이 설치되어 있던 동래부(東萊府)로부터 거문도에 영국 병선(兵船)이 왕래한 흔적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던 것이다. 외아문에서는 이를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였다. 자료에 따르면, 초기에 외아문을 비롯한 조선 정부는 현지로 직접 사람을 파견하는 방식을 통해 이 사건을 처리하고자 했다. 우선 외아문은 동래부에 독일의 선박을 타고 거문도로 가서 섬의 정황을 살핀 후 신속히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독일의 배를 이용하는 대응 방식에는 당시 외교 고문직을 맡고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의 생각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조선 정부는 청의 도움을 받아 영국군의 주둔 의도를 파악하는 동시에 철군을 요구하기 위해 거문도에 특파원을 보내기도 하였다. 일찌감치 영국군의 거문도 점거 계획을 파악하고 있었던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조선의 문제에 개입하기 위해 해군 제독 정여창(丁汝昌)을 파견하였기 때문이다. 이홍장의 조언을 담은 편지를 전달받은 고종은 5월 10일에 의정부의 담당 관리 엄세영(嚴世永)과 외아문 협판(協辦) 묄렌도르프를 거문도로 특파하였다. 그들은 거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해군 사령관을 만나 영국군의 무단 점거에 반대하는 조선 정부의 뜻을 명확히 밝히고 철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해당 사령관이 철군 결정은 영국 정부의 권한이라고 못 박으면서, 현지에 직접 관원을 파견하는 방식의 초기 대응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거문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선 정부의 외교적 대응 방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첫째는 영국 정부에 국제법상 거문도 점거가 불법이라는 점을 명백히 들어 항의하고, 조선에 주재하는 영국총영사와 직접 교섭하는 방식이었다. 둘째, 조선과 우호조약을 맺은 여러 강대국(구체적으로는 청, 일본, 독일, 미국)의 협조를 얻어 영국의 빠른 결단을 압박하는 우회 방식이었다. 이러한 조선의 실무 외교를 이끄는 사람이 바로 외아문의 수장인 독판(督辦) 김윤식(金允植)이었다.

영국 정부는 조선 정부가 청의 영향력에 종속되어 있다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애초에 거문도를 점거할 때도 거문도를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조선 측의 의사를 묻지 않았고, 혹여 문제가 되더라도 조선 정부가 여기에 소극적으로 대처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조선 정부가 여러 나라에 자문을 구하고 주(駐)조선 영국총영사에게 항의하는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사건 처리에 임하자 영국 정부는 꽤 당황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정부의 항의를 막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영국 정부는 정식으로 거문도 임대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당시 영국 정부가 제시한 금액은 1년 임대료 5,000파운드였다. 1885년 당시 1파운드는 노동 가치를 고려했을 때 2018년 현재 기준 487파운드 정도로, 5,000파운드는 현재 약 35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영국 정부는 조선 정부의 재정난이 심각했으므로 그리 어렵지 않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지만, 조선 정부는 끝내 거문도 임대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조선 정부가 거문도 문제에 이렇듯 엄중하게 대처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외아문 독판 김윤식의 의견에 따르면, 거문도 문제는 단순히 현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국권을 떨어뜨려서 미래에 다른 열강이 조선의 영토를 침해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신문에는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면 러시아는 반드시 제주도를 점령할 것이라는 기사가 보도되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더 확실하게 거문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호조약을 맺은 ‘동맹국’인 청, 일본, 미국, 독일에 거중조정(居中調整)을 요청하였다. 거중조정이란, 국제법상 제3자가 분쟁 당사국 사이에 개입하여 분쟁 해결을 도모하는 외교적 방식이다. 그러나 거문도 문제에 다른 나라가 개입하여 국제적으로 공론화되는 것을 꺼렸던 영국 정부는 조선 정부와 비밀리에 단독 회담을 추진하였다. 1885년 7월 초의 회담에서 영국 정부의 대표인 주조선 영국총영사 애스턴(William George Aston)은 거중조정 제안을 철회하라고 압박하였고, 조선 정부의 대표인 독판 김윤식은 압박에 못 이겨 거중조정을 보류하는 대신, 곧바로 영국 측에 거문도에서 신속하게 철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후 영국 측에서는 조선과 더이상 거문도 문제를 진지하게 협의하지 않았다. 대신 영국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재해줄 수 있는 대상으로 선택한 나라는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사대관계 속에서 조선의 보호국을 자임해 온 청이었다.

4 청의 거중조정과 영국군의 거문도 철수

중앙아시아에서 식민지 건설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던 영국과 러시아는 1885년 9월 극적으로 아프가니스탄 문제 해결에 합의하였다. 러시아를 방어한다는 명분 아래 거문도를 점거했던 영국 해군은 더이상 거문도 주둔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 게다가 1885년 5월 이후부터는 영국의 중국해 사령관 및 주일본 영국 공사와 같은 일선의 해군 지휘관 및 외교관들이 본국에 거문도 장기 점거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지속적으로 제출하고 있었다. 영국 해군성은 현장의 보고를 바탕으로 1896년 1월 외무성에 거문도 철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외무성은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한 이후 러시아가 바로 조선의 또 다른 영토를 점거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외무성은 거문도 철군을 결정하기 이전에 우선 조선의 종주국으로 상정하고 있던 청에 중재를 요청하여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사항을 보장받고자 했다. 즉 1885년 9월 이후 거문도 점거의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영국군이 즉각 철수하지 않았던 상황의 배경에는 영국 정부 내부의 의견 대립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외교적 성과를 중시한 외무성의 의견이 핵심적이었다.

영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북양대신 이홍장은 1886년 8월부터 10월까지 두 달간 북경에 주재하는 러시아 대리공사 라디젠스키(Nikolai Fedorovich Ladyzhenskii)와 거문도 문제에 관해 여러 차례 논의하였다. 그 결과 ‘영국은 거문도에서 철수해야 하며 러시아는 앞으로 조선의 영토를 취하지 않는다’는 사항에 관한 양자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영국 외무성은 이를 토대로 두 달 뒤인 1886년 12월 거문도에서 철군할 것을 결정하였다. 남도에 주둔하였던 영국군이 고향을 향해 떠나간 것은 1887년 2월, 사건이 발생한 지 약 2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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