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관동대지진과 조선인학살

관동대지진과 조선인학살

대지진의 혼란과 공포를 조선인의 학살로 덮다

1923년

1 개요

관동(關東) 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 사건은 1923년 9월 2일~6일까지 일본 관동지방 일대에서 일본 군경과 무장한 민중들이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2 현재 진행형인 관동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사건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진도 7.9의 강진이 일본의 중심지 도쿄와 관동 일대를 강타하였다. 일본 열도는 환태평양지진대에 속해 있는 지진 다발 지역으로 크고 작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였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후 근대사회로 진입하여 맞이한 최대의 재난이었다. 지진으로 도쿄,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에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도쿄 일대가 잿더미로 변하는 등 상당한 재산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무고한 조선인들이 일본의 군경과 민간인에게 학살당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이 때 학살당한 조선인 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자료마다 학살자수는 다른데 일본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 수는 발표된 사망자 수 중 가장 적은 233명이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간지인 『독립신문』에 발표된 학살자 수는 6,661명에 이른다. 사건 후 조선인들이 1923년 10월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 위문반’을 조직하여 11월까지 사망자 수를 조사하였으나 일본 정부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재난을 당한 조선인들은 구조를 기다리다가 또는 안전한 곳을 찾아다가 만난 경찰과 일본 민중에 의하여 무참한 죽임을 당하였다. 조선인 학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였다. 유언비어의 발생처를 정확히 가릴 수 없으나 경찰에 의하여 유포되었고 그것을 의심 없이 믿은 일본 민중이 조선인을 무차별로 학살하였다. 일본 정부는 사실 확인 없이 유언비어를 유포하였고 일본 민중의 조선인 학살을 방조하다시피 하였으며 이후 조선인 학살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회피하면서 사건을 덮어왔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발생한 조선인 학살은 진상규명과 일본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 동시 진행형의 사건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본 민중으로 하여금 별다른 의심과 죄의식 없이 수많은 조선인들을 학살하도록 하였는가?

3 조선인 학살의 배경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경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었다. 대중의 정치적 진출로 1921년 일본노동자총연맹이 1922년에는 일본 최초 농민조직인 일본농민총조합이 결성되었고 1922년 7월에는 일본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식민지 조선 내외의 민족운동이 성장하고 있었다. 3·1 운동의 성과로 1919년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설되었고 조선과 만주 국경지역에서 독립군 부대들이 국경을 위협하였다. 1920년에는 김원봉을 중심으로 의열단이 결성되어 일제에 대한 폭력투쟁에 나섰다.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즈음에 재일(在日)조선인의 수는 증가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바탕으로 조선 민족이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오는 조선인 수가 늘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일제의 식민지 농정에 있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행된 토지 조사 사업으로 많은 농민들이 경작지를 잃고 생존을 위해 일본과 만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배출된 농민에 대한 일본 자본주의의 수요도 동시에 작동하였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유럽 국가들이 생산을 중단하자 일본의 공산품에 대한 해외 수요가 증가하였고 일본 자본주의는 급격히 발전하였으며 일본 자본가들은 값싼 임금으로 고용이 가능하고 다루기 쉬운 조선인들을 모집해갔다. 전후 불황 중에도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다. 일본의 자본가들은 저임금으로 불황을 타개하고자 하였고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은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조선인의 조선 외 이동을 어렵하게 하던 ‘여행증명서제도’가 폐지되어 조선인의 도일(渡日 : 일본으로 건너감)이 용이해졌던 이유도 재일조선인 증가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인 노동자를 대체함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고 이는 일본 민중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원인이 되었다.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였을 즈음 일본 치안당국은 조선인 민족운동에 대한 경계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일본 내 조선의 민족운동은 성장하고 있었으며 일본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일제는 조선인들이 개최하는 집회를 물리적으로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일례로 1923년 5월 1일 노동절 집회에 참가한 조선인들에 대하여 일제는 폭력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관동 대지진 발생 후 일본 경찰이 보인 폭력적인 모습은 ‘조선인 참가 메이데이 집회’에 대한 대응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또한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국 민족이 보여준 3·1 운동의 위력과 조선 민족운동의 고양, 일본 내 조선 민족운동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였다.

4 일본정부의 유언비어 전파

점심을 준비할 시간에 지진이 일어났기 때문에 지진은 바로 화재로 이어졌다. 화재는 풍속 10~15미터의 바람을 타고 번져 삽시간에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지진과 연이은 화재로 도쿄는 집을 잃고 울부짖는 이재민들로 가득 채워졌다. 당국은 지진 발생 지역을 정비하고 복구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였다. 지진이 발생한 당일 밤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 임시 수상이 주관하는 긴급각료회의가 소집되었고 여기에서 「임시진재구호사무국관제」와 「계엄령」(긴급 칙령 398호)이 결정되었다. 지진 발생 다음날인 9월 2일에 계엄령이 공포되었고 군이 치안에 동원되었다. 계엄령 하 최고 6만 4천명의 육군병력과 전국에서 소집된 경찰력이 결집하였으며 150척 이상의 연합함대가 치안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처럼 지진 복구와 민심 수습 조치가 취해지던 중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에 의한 방화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조선인이 도쿄시 전멸을 기도하여 폭탄을 투척할 뿐 아니라 독약을 사용하여 살해를 기도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 유언비어의 출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민간 발생설, 정부 발생설, 민간·정부 발생설이 있다.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는 9월 1일부터 나돌기 시작하였고 9월 2일에는 ‘조선인 폭동설’이 더욱 확대되었으며 전날보다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유언비어를 직접 유포하였을 뿐 아니라 유언비어를 믿고 조선인을 학살하는 일본인들의 행위를 묵인하였다. 9월 1일 저녁 무렵부터 경찰들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정부나 경찰 차원의 지진에 대한 대응은 아니었다. 이는 대지진 전부터 조선인들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던 경찰의 일상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9월 2일에는 치안의 핵심인 내무성의 경보국장이 조선인 폭동을 인정하여 정부 차원에서 유언비어를 인정하고 대응에 나섰다. 유언비어 유포에 언론의 역할도 컸다. 일본의 언론사는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채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사실인양 보도하였다. ‘불령선인(不逞鮮人 :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 각처에서 방화, 제도(帝都 : 황제의 수도로서 도쿄를 의미)에 계엄령, 선인 도처에서 난도질을 일삼다, 선인 때문에 도쿄는 저주받은 세계’와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일본 민중을 자극하였다.

5 학살의 광기에 휩싸인 관동 일대

조선인 학살은 9월 2일에서 6일까지 집중적으로 자행됐다. 군대와 경찰이 조선인을 연행하고 죽이자 일본 민중은 유언비어를 사실로 확신하면서 자경단(自警團 : 지역 주민들이 도난이나 화재 따위의 재난에 대비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조직한 민간단체)을 구성하였다. 자경단은 자연발생적으로 구성된 경우와 경찰로부터의 지령에 의해 결성된 경우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각 마을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자들이 자경단을 이끌고 재향군인회와 청년회를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자경단은 일본도와 죽창, 도끼 등으로 무장하고 중요한 장소나 지점에 검문소를 설치하였으며, 조선인 특유의 인상, 풍채, 특유의 발음, 풍속 등을 이용하여 조선인을 색출하였다. 예를 들어 외꺼풀, 장신, 장발, 평평한 머리, 머리에 수건 두르기 등이 조선인 식별 기준이 되었고, 조선인들이 발음하기 힘들다는 ‘15엔 55센(주고엔 고주고센)’ 같은 일본어를 해보도록 하였다. 학살당한 조선인에는 청장년층만이 아니라 여성, 임산부, 아이까지 섞여 있었다. 한 일본인은 ‘그중에서 가장 슬펐던 것은 아직 젊은 나이의 여자가 배를 찢기고 6~7개월 정도로 보이는 태아가 배 내당 속에서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이다. 그때만큼 내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게 생각된 적이 없었다고’고 하였다. 그야말로 조선인이라면 무차별로 학살한 것이었다. 학살 중 조선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된 일본인, 오키나와인, 중국인도 생겨났다. 자경단의 학살 행위는 ‘자경’ 즉 자기 마을 지키기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9월 3일 나리사노 기병 연대가 가메이도(亀戸) 역에서 열차를 타던 조선인을 끌어내려 총검으로 찔러 죽이자 일본인 피난민은 “나라의 적! 조선인은 전부 죽여 버려!”라며 외쳤다. 학살 후 재판에서 자경단원들은 조선인을 독립을 위해 음모를 꾀하는 두려운 자들이라 생각하였으며 자신들의 행위가 국가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면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6 학살 사건 후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대응

조선인 학살이 일어난 지역에서의 시신 은닉과 인멸은 매우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조선인 사체를 태움으로써 사망자 수를 알 수 없도록 하였고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해를 인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 위문반’이 사망자 수를 조사하기에 매우 곤란하였다. 조선인 학살 사건 후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 관리 대책을 수립하였다. 일본은 조선인의 귀국이 일으킬 통치 상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조선인의 귀국을 저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치안 중심 기관인 경시청은 9월 4일 조선총독부에 상경을 저지해달라고 하고 8일에는 서장에게 ‘선인귀국설에 관한 건’과 9일에는 ‘선인 보호에 관한 건’을 보내 조선인의 귀환을 극력 저지하였다. 학살 사건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자 일제는 6개의 조선인 수용소를 설치하여 재일조선인들을 관리하였다. 조선총독부 또한 장차 조선에 돌아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귀환 조선인에 대한 관리에 골몰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지진 발생지에서 귀환하는 조선인들에게 애국부인회를 동원하여 식사를 제공하고 철도를 무료로 이용하게 하고 관할 경찰서에서 문안의 형식으로 위로하게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독자적으로 학살 피해자를 조사하여 유족들에게 1인당 2백 엔의 조의금을 전달하도록 하고 지방관에게 유족을 위문하도록 하였다. 한편으로는 귀환자에 의해 조선인 대학살이 전파되지 않도록 감시를 철저히 할 것을 당부하는 공문을 도지사에게 발송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으로 오는 일본인들도 관리해야 했다. 조선인의 복수를 우려한 일본인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자경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엄격하게 언론을 통제하여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건 보도를 봉쇄하였다. 학살 사건을 접하고 조선총독부는 도쿄 출장소를 통하여 6개 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어 있는 조선인들을 인수 받아 신원 확인과 보호조치를 취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관원을 파견하여 3개의 수용소를 운영하였다. 일본 정부는 노동사역과 조선인수용소 운영 그리고 수용소에 남은 조선인의 처리를 조선총독부에게 맡겼다. 조선총독부는 내지(內地 : 일본 본토)의 일본인에 대하여 ‘내선융화’(內鮮融和)를 선전하여 단체를 설립하였는데 이와 같은 단체로는 상애회(相愛會), 오사카부 내선협의회 등이 있었다. 행정기관에 의해 설립된 단체들과 더불어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한 민간단체들도 관동 대지진 이후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이들 단체에 재정적 지원을 하였고 조선총독부 관리가 임원으로 참여하면서 관여하였다.

7 조선인 학살에서 드러난 일본 정부와 일본 민중의 책임

일본 정부는 학살 후 조선인 폭동을 오히려 기정사실화 하였고 불령선인들이 있어서 조선인학살은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하였다. 그리고 학살에 대한 국제적 시선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을 학살한 일부 자경단원에 대한 형식적인 재판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경단에 대한 면죄를 주장하기 위해 결성된 ‘관동자경동맹’ 등의 단체와 극우단체인 흑룡회(黑龍會)가 활동하였다. 관동자경동맹은 국가가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조선인 학살에 민중을 동원한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자경단원들이 국가를 위해 학살을 저질렀다며 ‘자경단의 과실에 대한 상해죄는 전면 면죄할 것, 자경단의 과실에 의한 살인죄는 전부 예외적인 은전(恩典 : 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혜택)을 적용해 판결할 것, 자경단 중 공로자들을 표창하고 특히 경비를 위해 목숨일 잃은 자들의 유족에 대한 적절한 위로의 방법을 강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무고한 조선인의 죽음에 일본 민중이 일말의 윤리적 도덕적 가책이나 책임도 느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일본 민중으로 하여금 조선인을 학살하게 한 것이다. 정부가 유언비어를 만들지 않았다 해도 퍼져나가는 유언비어를 부정하지 않고 정부 스스로 유포자가 되어 유언비어에 신빙성을 부여한 것은 명백하게 일본 정부의 책임이다. 또한 학살사건 사후 수습에 대한 책임도 존재한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조선인 폭동을 날조하고 자경단에게 학살 책임을 전가하였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살 진상조사단의 조사를 방해하고 조선인 사체를 은폐한 책임도 포함되어야 한다. 조선인 학살에는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명백하게 일본 민중의 책임도 존재한다. 일본 정부의 권위까지 더해진 유언비어에 자극을 받았다는 이유로 학살 책임이 면해질 수는 없다.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 민중들은 자신의 행위를 국가를 위한 행위로 정당화하였으며 학살당한 자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조선인 학살은 여전히 규명되고 책임을 물어야 할 부분이 많은 사건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