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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총동원법 실시

식민지 조선의 전시체제 전환

1938년

국가 총동원법 실시 대표 이미지

조선총독부 관보(국가총동원법을 조선, 대만 및 화태에 시행하는 건)

국립중앙도서관

1 개요

일제는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 National Mobilization Law)」을 공포하였다. 총동원법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정부가 물자, 자금, 인력을 동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 파업 금지, 신문 발행 및 제재와 같은 사회 통제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법률이었다. 즉 전쟁 수행을 위해서 모든 자원의 통제와 그 운용을 의회의 동의 없이 정부가 명령 하나로 실행할 수 있는 비상위임입법이다.

「국가총동원법」은1938년 5월 5일부터 일본과 식민지에 적용되면서 본격적인 국가총동원체제(國家總動員體制)로 전환되었다. 이때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은 총 50조로 이루어졌는데, 제1조는 국가총동원의 정의, 제2조는 총동원 물자의 정의, 제3조는 총동원 업무의 범위를 명시하였다.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면서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는 ‘총동원체제’로 운용되었다.

2 일제의 국가 총동원법 제정과 실시 배경

국가총동원법과 총동원체제는 제1차 세계대전(1914.07.28.~1919.11.11.)에서 비롯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장기화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전쟁들과는 다른 방식인 총력전(total war)으로 진행된 전쟁이었다. 총력전이란 국가의 통제경제정책 아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하여 전쟁에 투입하는 대량의 소모전(消耗戰)이다. 총동원체제는 이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 주도하에 전략적으로 구축된 체제이며, 총동원법은 총동원체제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법이다.

일본은 1868년 왕정복고를 기반으로 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일으켜 근대국민국가로 나아갔다. 이 시기는 서구의 제국주의 침탈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던 때로 일본 또한 식민지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는 근대국민국가로 나아가면서 전통 사회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했던 일본 국내의 불만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듬해인 1869년 홋카이도[北海道]를, 1879년 오키나와[沖縄]를 일본 영토로 완전히 복속시켰다.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1895)과 러일전쟁(露日戰爭, 1904~1905)의 승리로 대만, 남사할린을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을 보호국화 하였으며 1910년에는 결국 강제 병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주요 연합국이자 승전국이었던 일제는 남양군도(南陽郡島)에 대한 위임통치권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총력전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전쟁의 양상이 1차 세계대전과 같이 대규모 지상군 중심의 물량전이 될 것이라고 보고 앞으로의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가 모든 자원을 일원적으로 통제하는 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일제는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총동원체제를 위한 조사와 연구를 실시하였다. 1915년 12월 27일 일본 육군성 내 임시군사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유럽 참전국들의 전시체제를 조사 연구하여 일본의 총력전에 대응한 동원 방법을 연구하였다. 1918년에는 국가총동원 발상에 따라 「군수공업동원법」을 제정하고 1925년에는 국가총동원기관설치 준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927년에는 자원국을, 1929년에는 자원조사법을 제정하였다. 1930년에는 잠정총동원기간계획을 세워 조선 및 일제 전 지역에서 실시하였다. 조선에서 잠정총동원기간계획의 주된 내용은 자원조사였으며, 조선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조사를 실시하였다. 유럽 열강에 비해 자원과 생산력이 낮았던 일본은 총동원체제 구축을 통해서 일본 뿐 아니라 식민지에서의 노동력과 자원 동원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일본을 중심으로 조선, 대만, 남양군도, 사할린 등 식민지를 포함한 전 지역의의 인적·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력화(戰力化)하기 위한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는 일제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구상해 오던 총동원체제였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1937년 다시금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일제는 본격적인 총동원체제로 나아갔다. 일제는 일찍부터 총동원체제를 위한 전임기관을 설치하고 조사와 계획을 통해 총동원체제 이행 준비를 유지했기 때문에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신속하게 총동원체제로 이행할 수 있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자 일제는 영국 등 서구열강이 중국을 배후에서 지원해 주고 있다고 판단하고 1939년 4월 9일 발생한 톈진(天津) 사건을 빌미로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 본격적으로 충돌해 나가며 전선을 확장하였다. 일제는 서구의 구질서에 대항하여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나가는 맹주로서 조선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국가와 함께 서구의 구질서에 대항해 신질서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논리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였다.

3 총동원체제로의 전환

1936년 8월 관동군사령관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중일전쟁 도발 직전인 1937년 4월, 국체명징(國體明徵), 선만일여(鮮滿一如), 교학진작(敎學振作), 농공병진(農工竝進), 서정쇄신(庶政刷新)의 조선통치 5대 정강을 발표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원활하게 전쟁 동원을 하기 위한 황국신민화 정책 및 전시 동원 정책의 일환이었다. 황국신민서사 제정, 창씨개명, 교육과정의 일본어 상용화, 신사참배가 실시되었으며 이 역시 황국신민화 작업이었다. 식민지 행정기구의 개편 작업도 병행 되었다. 개편은 국가총동원법 제정과 각 조항이 발동하면서 물자 동원 계획을 수립하고 수행할 운영기구가 신설, 확장되었다가 축소되는 과정을 거쳤다.

1937년 9월 총독관방에 자원과가 설치되어 물자동원계획, 생산력확충계획의 기획 사무를 담당하였다. 1938년 8월에는 식산국에 임시물자조정과 신설하여 조선 내 물자배급과 조정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였다. 1939년 11월 28일에는 자원과와 물자조정과를 일원화하여 기획부를 설치하였다. 기획부는 전시총동원계획의 설정과 수행을 담당한 부서로 총 3개 과(課)로 이루어졌다가 1940년 7월에는 4개과로 증설되었다. 임시기구였던 기획부는 전쟁이 장기화면서 1941년 11월 18일 조선총독부 내 정식 기구로 재편되었다. 기획부의 사무관은 육해군의 무관이 임명되었다. 총동원계획은 전쟁수행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군과 직접적이고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었다.

1942년 11월 1일 「조선총독부관제(칙령 727호)」가 개정됨에 따라 조선총독부 행정기구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1942년 9월 결정된 「내외지행정일원화(內外地行政一元化)」를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국가총동원계획 등 전시행정 기획과 실행을 담당하는 총무국(總務局)이 신설되고 기획부․후생국이 폐지되고 14개의 실․과가 6개의 신설 실․과로 개편되었다. 개편의 사유는 ① 관청사무 간첩(簡捷)에 따른 직원 축소, 그 잉여인원을 대동아 전역의 요원 충족하기 위한 행정 간소화, ② 대동아 전역에 관한 제반 행정을 일원적․종합적으로 하여 신설된 대동아성에 그 책임을 귀일, ③ 제국의 전 영토를 대동아의 중핵으로 만들고 그 일체적 총력을 발휘하기 위한다는 것으로 전시 행정의 기동성을 위한 간략화와 내외지일원화를 들어서였다. 그러나 총독의 권한을 제한하고 있어 조선총독부와 조선총독부 출신 추밀원 의원들의 반대로 미비한 결과로 인해 1943년 11월 30일 1년 만에 총무국은 폐지되고 대부분의 부서 및 관장사무는 총독관방으로 이관되었다. 총무국 기획실에서 관장하던 일부 업무(국가총동원계획의 설정 및 수행, 국토계획, 자원조사등에 관한 사항) 는 신설된 광공국 기획과로 이관되었다. 이와 함께 물자동원 및 생산력 확충 사무 일원화, 생활필수품 관계 사무 일원화, 교통운수 관계 사무 일원화도 함께 진행되었다.

1944년 11월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행정 개편 발표가 있었다. 국민생활 필수물자의 확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생활물자과 신설하고 광공국 내 토목과를 건설과로 확대 개편하였다. 근로동원본부를 신설하였으며 의무교육제도 실시와 학도근로동원 등을 위해 학무과를 전문교육과와 국민교육과로 분화하였다. 유림층과 종교인의 적극 동원을 위해 연성과에서 교무과를 분리하고 국민총력운동에 관한 사무를 관방 정보과로 이관시켰다. 1945년 1월에 설치된 근로동원본부는 근로동원을 원활히 수행하고 근로능률을 앙양시킴으로써 생산전력 증강을 위해 신설한 것이었다. 정무총감이 본부장이었으며 조선의 노동력에 관한 계획과 조정, 집행에 이르는 최고의 총괄기구였다. 이와 같은 지속적인 행정 기구 개편은 중일전쟁에서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 에 이르기까지 확대된 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활한 전쟁 동원을 위해 행정 기구의 개편외에도 가장 중요한 문제인 인력 동원 – 징병(병력)과 징용(노동력) - 대한 법안이 제정되고 시행되었다. 조선인 병력 동원 문제는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난 다음해인 1932년부터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 이하 조선군) 내에서 논의가 되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시기부터 본격화 되었다. 1937년 6월 일본 육군성은 조선군에 조선인 병력동원에 대한 의견을 요청하였고 1937년 7월 2일 조선군사령부는 「조선인 지원병제도에 관한 의견」을 제출한 것이다. 이런 과정과 준비를 거치면서 1938년 2월 22일에는 「육군특별지원병령(陸軍特別志願兵令)」이 공포되었으며 4월 3일부터 지원병제도가 시행되었다. 1943년 7월 27일에는 「해군특별지원병령(海軍特別志願兵令)」이 공포되었으며 8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법들은 지원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원을 강요하거나 강압과 회유책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1941년 12월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 까지 일으키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었고 연합군에게 계속 패전하면서 부족한 병력 보충을 위해 1944년부터 징병제(徵兵制)까지 시행되어 조선의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지속적으로 내몰렸다.

징병이 전선의 병력을 동원하기 위한 법령이었다면 징용은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 업무에 동원되는 노동력을 충원하기 위한 법령이었다. 이를 위해 1939년 7월 8일 「국민징용령」이 제정되었으며 조선에서는 1939년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피징용자는 일반 노무자와 군(軍) 소속의 작업장에 동원되는 군노무자가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 되고 확대되면서 징용대상자와 종사업무가 계속 확대되었으며 동원된 피징용자들은 일제가 지정한 지역과 작업장, 관리공장, 전쟁지역 등지에 배치되어 강제노역하였다. 1942년부터 해외 동원이 증가하였으며 1944년부터 급증하였다.

일제가 일으킨 전쟁 수행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총동원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위와 같은 동원령 뿐 아니라 조선인에 대한 통제와 회유책이 필요했다. 일제는 통제책으로 국민정신총동원운동(國民精神總動員運動, 1938.07.07.~1940.10.16.)을 실시하여 조선인들의 정신과 사상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전국 단위의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을 조직하여 조선총독부 → 조선연맹 → 도연맹 이하 부락연맹 → 애국반 → 개인으로 이어지는 통제망을 가동하였다. 일본어 상용화, 창씨개명, 신사참배, 황민화교육, 지원병제도 등을 선전-보편화하였고,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궁성요배와 같은 의식을 매일 아침, 작업 전후, 매달 애국일 등에 시행토록 강요하였다. 그 외 생활방식에서도 통제책이 이루어져 색복(色服)․국민복․몸뻬 착용, 시간엄수, 경로애유(敬老愛幼), 청결정돈, 위생방역, 근검절약, 허례의식 폐지, 자원애호, 폐품회수, 근로연장 등 국민생활 지침들을 강요하여 일상을 규제하고 통제하였다.

이와 같이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본격화된 전시체제는 1938년 5월 「국가총동원법」 이 시행되면서 총동원체제로 전환되었다. 총동원체제는 전쟁을 운용하기 위한 체제로서, 인력과 물자를 비롯하여 국가가 전쟁수행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동원의 대상이었으며 식민지 조선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적․물적 동원을 위해 다양한 법들이 제정․시행되었으며 이는 「국가총동원법」을 확대 적용한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압제하에 놓여 있던 조선인들은 중일전쟁과 국가총동원법 시행 이후부터는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체제라는 이중적 억압 구조 속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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