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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軍隊解散]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대, 전국적인 저항으로 답하다

1907년(고종 44)

군대해산 대표 이미지

훈련원 군대해산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군대해산(軍隊解散)은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 무장해제되어 강제로 해산된 사건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1907년 ‘정미7조약’을 맺으며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했다. 이에 박승환(朴昇煥) 참령(參領)이 자결하였고, 군대해산 결정은 서울 시위대(侍衛隊)의 저항을 시작으로 지방 진위대(鎭衛隊)의 의병봉기로 확산되었다.

2 1907년 7월, 군대해산의 전야

1905년 9월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했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상실되어가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며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했다. 그다음 단계는 1907년 7월의 ‘정미7조약’이었다.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된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켰다, 그런 후 1907년 7월 24일 대한제국의 외교권만이 아니라 행정권, 사법권까지 통감부(統監府)가 관장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그것이 바로 ‘정미7조약’이었다.

이미 일본은 1905년 4월 병제개혁(兵制改革)이란 미명(美名) 아래 군대의 지휘부인 원수부(元帥府)를 해체하고 군대를 절반 수준인 8천 명으로 감축시켰다. 이후 1907년 7월 31일 일본은 총리대신(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과 군부대신(軍部大臣) 이병무(李秉武)의 이름으로 군대를 해산한다는 조칙(詔勅,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을 비밀리에 발표시켰다. 군대해산의 이유는 ‘군제를 쇄신하여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군을 한꺼번에 해산하겠다는 것이었다.

군대와 관련하여 이미 러일전쟁 때에 일본군은 서울 도성 안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일본군의 숙영(宿營, 군대가 훈련이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병영 밖에서 머물러 지내는 일)이 문제가 되었다. 전쟁을 위해 갑자기 증강된 일본군은 대한제국 군대가 머물던 병영에 일본군을 같이 주둔시켰다. 대한제국군의 중앙군이었던 서소문 시위대의 제1연대 제1대대 병영에도 일본군이 같이 주둔하여 생활했다. 시위대는 ‘을사조약’ 이후 2개 대대만이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일본군이 시위대 병영에서 숙영하자, 일본에 대한 시위대의 반감이 커졌다. 이들은 일본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저항하였다.

1907년 7월 19일 고종의 강제퇴위가 발표되자, 이에 반대하는 군중들이 모여 반대 시위를 벌였다. 강제퇴위 소식을 듣고 서울에 모인 군중들은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관저에 방화하고, 일본군에게 돌을 던지는 등 통감부의 결정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에 시위대의 병사들이 호응하였다. 시위대 제1연대 제3대대 병사 일부가 탈영하여 군중들에게 합류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 경찰에게 총격을 가했고, 그 결과 10여 명이 즉사하고 2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강제퇴위에 반대하는 군중과 무장한 병사들이 결합하여 물리적 저항이 발생하자, 통감부는 시위대의 무장해제를 추진했다. 우선 시위대 병사들의 탄약을 수거해 시위대 대대장이 보관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용산에 있던 대한제국 군대의 무기를 보관하는 군기창(軍器廠)을 점령했다. 대한제국 병사들이 군중들과 결합하여 더 큰 저항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고종의 강제퇴위를 반대하는 군중들의 시위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대한제국의 군대가 참여했다. 서울에서는 일본 경찰에 대한 시위대의 총격이 7월 19일과 21일에 발생했다. 지방군이었던 진위대 가운데 경상남도 통영(統營)의 부대가 7월 26일 군중과 합세하여 경무서(警務署)와 일본인을 공격했다. 이처럼 군대해산의 전야는 격렬했다.

3 8월 1일의 해산식과 서소문 전투

1907년 8월 1일 오전 7시 시위연대의 대대장급 이상의 장교들에게 긴급소집령이 내려졌다. 일본의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주한일본군이라는 뜻)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이들에게 조용히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대로 복귀한 대대장들은 중대장을 소집하여 사병들의 무기를 회수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군대해산을 병사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동대문 근처에 있는 훈련원(訓鍊院)으로 오전 10시까지 병사들을 인솔하여 집합하라는 내용을 전달했다.

대한제국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기를 반납했다. 그런데 이들이 훈련원에 집결할 즈음 시내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해산식을 위해 훈련원에 모인 병사들이 동요했지만, 일본군이 기관총으로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함부로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한편, 해산식장에 나온 군인들은 약 600여 명에 불과했는데, 왜냐하면 이미 군대해산을 눈치를 챈 병사들이 부대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군대해산에 반대하는 다른 시위대 부대에 합류하여 저항했다. 결국 해산식은 예정시간을 4시간이나 넘겨서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해산식은 1시간 만에 끝났다. 당시는 소나기가 쏟아져서 분위기는 더욱 뒤숭숭했다. 이곳에 모인 병사들은 ‘은사금’(恩賜金, 은혜롭게 베풀어 준 돈이라는 뜻으로, 임금이나 상전이 내려 준 돈)을 받고 해산했다.

일본은 군대해산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여 강행하였다. 그러나 일부 군인들은 군대해산 당일에 강력히 저항했다. 특히 서울에서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의 군인들이 주도했다. 이 항쟁의 직접적 계기는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이었다. 그는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했고 신하로서도 충성을 다하지 못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자결 소식은 시위대의 군인들에게 바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들이 박승환의 자결소식을 전달받은 것은 무기를 반납하기 위해 훈련원으로 가려는 때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부대원들은 무기고로 가서 무기를 탈환했다. 2개의 대대가 무장하고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전투는 1907년 8월 1일 오전 9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1시간 20분 만에 제2연대 제1대대의 시위대 병영을 점령했다. 오전 11시 40분경에는 제1연대 병영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남대문(숭례문) 방향에서 시위대 병영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과 한국군의 주요 교전은 남대문 부근의 훈련원에서 시작되었으나 주요 전투는 서소문 일대에서 벌어졌다. 일본군이 서소문 시위대 병영을 점령한 후 전투가 일단락되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양측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민가 수백 호가 불에 탔으며 해산군인을 지휘하던 남상덕(南相悳)도 전사했다. 지휘관을 잃은 해산군인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전국으로 흩어졌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서는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의 무장을 해제한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도 군인이 무장을 해제당한다면 이는 큰 수모이며, 따라서 무장한 대한제국 병사들이 일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4 확산되는 저항, 지방 진위대의 의병봉기로

한편 서울 시위대의 항전은 하루 만에 끝이 났지만, 지방 진위대의 해산은 일본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서울 시위대의 장병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에 합류했다. 그리고 군대해산과 서울 시위대의 봉기 소식은 서울에서 가까운 지방 진위대에도 전달되었다.

해산을 거부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대표적 부대로 강원도 원주진위대와 강화도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가 있었다. 1907년 8월 2일 원주진위대 대대장 홍유형(洪裕馨)은 소집명령을 받아 서울로 갔다. 이때 대대장 대리 김덕제(金德濟)와 민긍호(閔肯鎬)는 봉기를 계획했다. 김덕제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민긍호는 서울출생으로 진위대의 병졸로 입대하여 강원도 지역에서 근무하던 중이었다. 김덕제와 민긍호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은 1907년 8월 5일 무기고를 장악하여 1,200정의 소총과 약 40,000발의 탄환을 확보했다. 그런 후 원주지역 포수(砲手, 총으로 짐승을 잡는 사냥꾼)와 농민들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경찰을 공격하고 원주를 장악했다. 이들은 이후 2개의 부대로 나뉘어 강원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의병이 되었다. 김덕제는 600여 명을 이끌며 평창·강릉·양양지역을, 민긍호는 약 1000명을 이끌며 충주·제천·여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일본은 민긍호의 의병부대를 진압하기 위해 분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은 1907년 9월 말 의병을 해산하고 ‘귀순’하라는 황제의 조칙을 만들어 각도에 선유사(宣諭使, 병란이 났을 때에 임금의 명령을 받고 백성들을 타일러 무마하기 위하여 파견하는 임시 벼슬)를 파견했다. 몇 차례의 ‘귀순’ 권유에도 불구하고 민긍호는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오히려 1907년 말 이인영(李麟榮)이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할 때 민긍호는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 자격으로 합류했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 민긍호의 부대는 강원도에서 주로 활동하다 결국 1908년 2월 말 원주 부근에서 교전 중에 체포되어 순국했다. 민긍호의 의병부대는 해산군인들의 의병 합류와 정미의병(丁未義兵)이 활성화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1907년 8월 9일 수원진위대 소속의 강화분견대도 봉기했다. 부교(副校) 지홍윤(池弘允)과 연기우(延起羽) 등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강화진위대장을 지낸 이동휘(李東輝)의 영향을 받아서 개신교 신자들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 출신의 군수와 일본인 경찰들을 처단했다. 약 600명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일본 군경과 공방전을 벌이다가, 8월 11일 강화도를 빠져나와 경기도와 황해도 지역의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해산군인들은 경기도와 강원도를 무대로 의병부대를 직접 조직했다. 그 결과 의병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들은 의병부대에 무기와 전술, 그리고 군사 훈련 면에서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의병장과 의병부대에서 해산군인들의 수가 점점 증가했다. 또한 해산군인들은 경기·황해·강원지역으로 의병투쟁의 범위가 확산되는 데에도 한몫했다.

군대해산은 이처럼 일본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의병활동의 범위가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고, 의병부대의 전술과 무기의 향상, 의병부대 구성의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군대해산 이전의 의병장들은 주로 전직 관료 출신과 양반 유생들이 많았으나 이후에는 해산군인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들과 아울러 산포수와 광부 출신의 노동자 참여도 늘어나며 의병항쟁의 계층이 확산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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