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단발령

단발령[斷髮令]

조선인의 유교적 신념을 자르다

1895년(고종 23)

단발령 대표 이미지

단발령 시행을 묘사한 조선 말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그림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1 개요

단발령(斷髮令)이란 1895년(고종 32) 11월 15일(음력)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에서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상투를 자르도록 공포한 명령이다. 신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므로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효 이념이 공고하게 자리했던 조선 사회에서는 단발령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더욱이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한 지 약 3개월 만에 친일 내각에서 단발령을 시행하자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김홍집 내각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의 친위대(親衛隊)를 파견한 틈을 타 고종(高宗)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에 따라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였고 단발령 문제는 개인의 자율에 맡겨지면서 일단락되었다. 1900년 이후 광무(光武) 정권에서 개혁을 추진하면서 단발령을 재시행하였으나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도 민간에 보편화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 상투, 그 역사적 의미

상투란 긴 머리카락을 빗어 올려 틀어 묶은 모양으로, 그 위에 망건과 갓을 쓰는 것이(조선시대 기준의) 원칙이다. 상투는 중국, 일본의 그것과 구별되는 한반도 남성의 특징적인 머리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고구려 고분벽화나 신라의 고분출토 유물 등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된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대체로 장가들지 않은 고려 사람들은 모두 두건으로 머리를 싸고 뒤로 머리를 내려뜨리다가 장가든 뒤에는 머리를 묶고 다닌다’ 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성인 남성 역시 상투를 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충렬왕(忠烈王) 대에 원나라의 영향으로 정수리 부분의 머리카락만 남기고 뒤통수에서 묶어 길게 땋은 머리 모양인 변발(辮髮)을 시행했다가, 공민왕(恭愍王) 대의 복고(復古) 정책으로 다시금 상투를 틀게 되었다. 이러한 머리 모양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상투는 유가적 이념의 측면에서도, 사회 관습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로, 상투는 ‘효’라고 하는 유교 이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효의 이념과 실천 방식을 담은 유교 경전인 『효경(孝經)』에는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 즉 ‘모든 신체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감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 또한 조선인들에게는 불효를 저지르는 것과 같은 이념을 담은 행위였다. 둘째로, 장유(長幼)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 사회는 관례(冠禮, 남자는 갓을 쓰고 여성은 쪽을 찌는 일종의 성인식)를 마치거나 결혼한 남성만을 성인으로 인정하였다. 상투는 그러한 성인의 상징으로서 기능했다. 나이가 많아도 결혼하지 못한 사람은 상투를 틀지 못했기에 하대받기 일쑤였다. 셋째로, 상투는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상투에는 망건(網巾, 상투를 틀 때 머리카락이 내려오지 않도록 이마에 두르는 그물 모양의 물건)을 비롯하여 동곳(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정수리에 꽂아 고정하는 장신구), 풍잠(風簪, 갓이나 관이 벗겨지지 않도록 망건 앞에 부착하는 장신구) 등과 같은 여러 장식물이 함께 달렸다. 이러한 부속품들의 재료는 매우 다양했으므로 사람의 신분을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조선시대의 상투는 부모에 대한 효의 실현이기도 했으며, 관례나 혼례를 치른 성인을 상징하기도, 신분의 높고 낮음을 드러내기도 하는 장치물이었다.

이렇듯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상투를 일률적으로 자르고 조선 남성에게 서양식의 짧은 머리 모양을 하도록 강제한 법령이 바로 단발령(斷髮令)이었다. 단발령은 조선 사회에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각양각색으로 꾸며진 현대 남성의 머리 모양, 그 기원에는 단발령을 둘러싼 당시 사회의 불안과 복잡다단한 이권 다툼이 온통 뒤섞여 있었다.

3 1895년 11월 15일의 이면

단발령 시행을 전후로 조선이 처했던 대내외적 상황은 어떠했을까. 우선 조선 내부의 주요 사건으로는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 1895년의 을미사변, 그리고 개화파(開化派) 정부의 주도 아래 1894년부터 1896년 초반까지 이어졌던 일련의 개혁(통칭 ‘갑오을미개혁’)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건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그해 6월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대원군에게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 정치적 군주의 권력이 헌법에 의해 제한을 받는 체제)를 모델로 한 새로운 내각을 수립할 것을 강제하였다. 일본의 의도는 새로운 정권의 이름으로 조선과 청 사이의 전통적 조공책봉관계(朝貢冊封關係, 조공과 책봉이라는 중국 중심의 외교 질서를 토대로 형성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파기하도록 부추겨 청과 전쟁을 벌일 구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본의 의도대로 청과 일본은 조선을 무대로 전쟁을 벌였고,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 정부의 개혁에 간섭할 목적으로 10월 중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주(駐)조선 일본공사로 파견하게 된다. 그러나 1895년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개입하자(삼국간섭) 조선에서 일본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 틈을 타 조선 정부 내부에서는 박영효(朴泳孝) 등의 친일 세력이 제거되고 이범진(李範晉) 등의 친러파가 등장하여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내각이 성립되었다. 일본은 삼국간섭 이후 조선 내부에서 강화된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고 다시 한번 정치적 영향력을 독점하기 위해 1895년 8월 조선의 왕비를 시해하는 극단적인 사건을 벌였다. 그로부터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일본인 고문의 영향 아래 있던 김홍집내각은 대대적인 개혁안을 반포하게 되는데, 단발령 또한 그중 하나였다.

음력 1895년 11월 15일, 고종은 단발령을 선포하면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태자와 함께 머리카락을 자른 뒤 양복(洋服)을 입고 조정에 나아갔다. 정부에서 단발령을 시행하는 공식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일을 수행하기에 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날은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을 바꾸겠다고 선포한 날이기도 했으며(이 발표에 따라 개국(開國) 504년(1895년) 11월 17일(음력)은 건양(建陽) 원년 1월 1일(양력)에 해당하게 되었다), 단발령과 함께 망건을 더이상 쓰지 않도록 한 날이기도 했고, 외국 복식 착용을 합법화한 날이기도 했다. 법령 제정을 알리는 『관보(官報)』의 건조한 문체에 드러난 그 날의 분위기는 이렇듯 담담했다.

그러나 당시 개인이 남긴 기록을 통해 본 그 날의 이면은 조금 다르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반대의 뜻을 밝히고 자결한 유학자 황현(黃玹)이 남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일본은 이미 1895년 10월부터 고종에게 단발할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고종이 왕비의 장례를 치른 후에 머리를 자르겠다고 저항하자, 일본은 궁 주변에 군대를 배치하고 남산에는 포대를 설치하여 금방이라도 포를 쏠 듯한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1895년 11월 15일(음력), 김홍집내각에서 단발령 시행을 주도했던 내부대신 유길준(俞吉濬)과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 등은 일본인을 대동하여 고종에게 다시 한번 단발을 종용하였다. 고종은 길게 탄식하며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에게 “당신이 내 머리를 깎으시오”라며 머리를 맡겼다. 조병하는 가위를 들어 고종의 상투를 잘랐고, 왕태자였던 순종(純宗)의 머리는 유길준이 잘랐다. 당시 조선의 영국영사였던 힐리어(Walter Caine Hillier) 또한 단발령 선포 당시 대신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1895년 11월 15일은 폭력과 불안과 체념으로 뒤엉킨, 그런 날이었다.

4 단발령 시행 이후 조선인의 반응과 을미의병

1880년대부터 단발 문제는 조선 지식인 사이에서 화두에 오르내리곤 했다. 이는 개항 이후 일본과 미국 등지에 파견된 관료나 조선에 온 선교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단발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것은 일군의 개화파 관료들로, 중국과 미국 등지에서 유학하던 윤치호(尹致昊)나 1897년 주미공사(駐美公使)로 파견된 민영환(閔泳煥) 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1895년의 단발령 반포 당시 민간에서 저항이 그토록 격렬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신체의 훼손과 관련한 유교적 이념이 작용했지만, 사전 예고 없이 돌발적이고 강제적이었던 탓도 컸다.

음력 11월 15일, 김홍집 내각은 1896년 1월 1일(음력 1895년 11월 17일)부로 단발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실시할 뜻을 내부고시(內部告示)로 발표하였다. 발표 후 전국적 시행까지 유예 기간은 만 하루 남짓이었다. 11월 15일부터 16일까지는 정부 관리를 대상으로, 17일부터는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단발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당시 서울의 상황을 보면, 경무사(警務使) 및 순검(巡檢)들은 서울로 들어오는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의 길목을 지키고 서서 통행하는 사람들의 상투를 잘랐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에 온 지방민들은 문밖을 나섰다가 상투가 잘리면 그 상투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통곡을 하며 성을 빠져나갔다. 머리를 강제로 자르다 보니 깨끗하게 잘리지도 않았다. 상투가 잘려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장발승(長髮僧)과도 같았다.

조정의 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도재(李道宰), 김병시(金炳始) 등 단발령에 반발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는 인사들이 속출하였고, 단발령을 비판하는 상소가 전국에서 쇄도했다. ‘내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내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 髮不可斷)’라는 최익현(崔益鉉)의 항변이 대표적이다. 또한 지방의 유생들은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을 지휘하며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의 을미의병(乙未義兵)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5년 말부터 발생하여 1896년 여름에야 막을 내리게 된다. 의병운동의 중심지는 춘천과 제천을 비롯한 강원, 충북, 경북 3도의 접경지역이었다. 의병 봉기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은 인물로는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여주의 이춘영(李春永), 이천의 김하락(金河洛), 안동의 권세연(權世淵), 춘천의 이소응(李昭應) 등 화서학파(華西學派)와 정재학파(定齎學派)를 중심으로 한 위정척사(衛正斥邪) 계열의 지방 유생이었다. 이처럼 을미의병은 봉건질서가 해체되어가는 것에 대한 유생들의 위기의식이 발현한 것이자, 이 문제를 침략 정책으로 이용한 일본 침략주의자들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1896년 2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의 친위대가 지방으로 파견된 틈을 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하자 조선에서 일본의 위세는 급격히 추락하였다. 김홍집 내각도 그날로 붕괴되었고 김병시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삼은 새로운 내각이 출범하였다.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을 말함) 직후 단발의 강제 시행을 철회하고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였다. 신내각에서는 내부대신 박정양(朴定陽)의 이름으로 단발 문제를 각자의 편의에 따르도록 한다는 훈시를 내렸다. 이로써 단발령이 초래한 사회적 혼란은 일단락되었으나 단발이라는 시대적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다. 1900년 이후 광무개혁으로 단발령이 재시행되면서 1901년부터 한성부, 평양부 등 주요 도시에서는 이발소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지방의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단발이 보편화하지 않은 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