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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아시아주의[Pan-Asianism]

아시아 연대에서 침략으로

1924년

대아시아주의 대표 이미지

1924년 쑨원의 일본 고베 강연

中國獨立運動的基點(戴季陶著, 廣州民智書局)

1 개요

1910년대 아시아주의가 대두하고, 특히 1924년 쑨원의 연설 이후 대아시아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그것은 아시아 제국이 연대하여 서구 열강의 억압에 대항하자는 담론이었다. 하지만 실제 아시아주의는 각국의 대외관계, 국제정세, 아시아 인식 등과 연관해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특정 논리 구조의 사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근대 일본에서는 아시아주의가 서구 정치와 문명에 대항하는 대응을 모색하면서도, 자국의 국력과 내셔널리즘의 상황에 따라 연대에서 침략에 이르는 광폭의 태도 변화를 계속하였다. 아시아 대 서구라는 대항 관계를 축으로 하는 동시에, 아시아의 리더로서 일본이라는 맹주론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일본 근대사에 두드러진 사상적 경향이라 할 수 있다.

2 대아시아주의의 대두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아시아주의가 크게 주장되고, 일본 및 중국 등에서 아시아주의와 관련해 다양한 호칭이 등장하였다. 그 예로 일본의 유행어 사전에는 ‘범아시아주의’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아시아의 민족들이 단결해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 상황을 벗어나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려는 사상 및 운동으로 설명되었다. 한편 중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리다오자오(李大釗)는 1919년 1월 「대아시아주의와 신아시아주의」라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는 예전의 대아시아주의를 대신하여 아시아 민족들의 해방과 평등한 연합에 기초해 아시아 연방을 결성하는 신아시아주의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범아시아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당시 아시아주의라는 용어가 다양하게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1924년 11월 쑨원이 일본을 방문해 고베상업회의소 등 5개 단체를 대상으로 ‘대아시아주의’를 강연하였다. 그는 동양의 왕도(王道)와 서양의 패도(覇道)를 구분하고 동양의 왕도를 높이 평가한 후, “현재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아시아가 인의도덕(仁義道德)으로 연합 제휴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압박에 대항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인의도덕에 기초한 동양의 왕도로써 아시아 민족들이 단결해, 서구의 침략에 저항하고 완전히 독립하자는 대아시아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다만 당시 쑨원은 중국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소련 및 공산당과 제휴하며, 서양 패도의 주구가 되어가는 일본을 비판하고 중국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도록 요구하였다.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에는 중국 중심의 정략적 측면이 내재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쑨원이 강연 전날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와 회담한 점이다. 도야마는 정치 결사인 겐요샤(현양사, 玄洋社)를 대표하는 인물로, 1873년 정한론 정변 이후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했지만 18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국권을 우선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국권을 위한 전쟁을 지지하는 한편, 아시아 각국의 독립을 후원하며 그들과 연합해 서구 열강과 대항하는 아시아주의적 태도를 취하였다. 겐요샤의 행보를 보면 근대 일본에서 민권론과 국권론, 서구 근대주의와 국수주의 등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정략적으로 아시아주의가 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쑨원의 강연 이후 겐요샤 등은 대아시아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따라서 아시아주의는 특정의 논리 구조를 가진 사상이기 보다는 외교 및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일본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를 주장하는 것으로, 다양한 정치 관점과 국제정치에서 일본의 위치 등과 연계해 시기적으로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그 과정에 아시아주의 관련 다양한 정책 및 슬로건이 등장하였고 대아시아주의도 그 중 하나였다.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평론가이자 사상가인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는 아시아주의를 “특정 내용을 갖추고 객관적으로 한정된 사상이 아니라, 하나의 경향성이라 할 수 있다.”고 평하였다. 실제 일본 우익에서 공산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아시아주의적 모습이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아시아주의 범주는 정치, 사상, 운동 등 관점에서 따라 달라진다. 근대 일본에서 아시아주의의 시발을 설명하는 경우에도, 해외 팽창의 측면에 중점을 두면 침략론의 정한론(征韓論)부터 언급되지만, 아시아 인식의 측면에 중점을 두면 대체로 흥아론(興亞論)이 강조된다.

3 근대 일본의 아시아주의 스펙트럼

19세기 후반 일본은 서구 열강에 대항해 국가 독립을 지켜야 하는 지상 과제에 당면하고, 근대화 즉 서구화를 목표로 부국강병 정책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외교적으로 서구 열강 중심의 국제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아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당시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인식은 크게 탈아론(脫亞論과) 흥아론(興亞論)으로 나뉘었다. 단적으로 1885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탈아론을 발표한 때,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는 『대동합방론』을 집필하였다. 전자는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일본이 선진적인 서구와 동일화하는 동시에 후진적인 동양과는 차별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후자는 유럽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의 평등 합방 또는 연방을 주장한 것이다. 서구 열강에 대항하고 아시아의 연대를 주장하는 것은 아시아주의의 이념적 테제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근대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관련하여 1870~1890년대 흥아론을 시작으로 ‘대동합방론’과 ‘지나보전론’ 등이 주장되었고 흥아회(1880년, 이후 아세아협회), 겐요샤(1881년), 동방협회(1891년), 동아동문회(1898년) 등의 단체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서 대아시아주의가 강조되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치며 ‘동아연맹론’과 ‘대동아공영권’이 전개되었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아시아주의의 종착점인 동시에 아시아주의로부터 일탈이었고, 패전과 함께 근대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막을 내렸다. 바꿔 말하면 일본 근대사에서 대외관계와 관련해 아시아주의 경향이 패전까지 일관되게 유지된 것이다.

특히 근대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 국내에 아시아는 뒤쳐져 있다는 인식이 확고해졌고, 아시아 멸시의 감정도 확산되었다. 하지만 1895년 삼국 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획득할 수 없었던 반면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이 조차를 통해 청 영토를 분할하자 지나보전론이 대두하였다. 당시 외무대신을 역임한 오쿠보 시게노부(大隈重信)는 “지나(중국)를 문명으로 이끌 수 있는 나라, 지나라는 위독한 병자를 치료해 살릴 수 있는 나라는 세상에 일본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겐요샤의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는 ‘열강이 중국을 분할해 일본과 이웃하면 일본의 국방을 위협’한다고 인식하였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남하가 일본에게 최대 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 그는, 1901년 고쿠류카이(흑룡회, 黑龍會)를 창립해 일본을 맹주로 하는 지나보전론을 주장하였다. 국방을 위해 아시아 연대를 강조하며, 국권 확장을 목적으로 아시아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우익의 저변에는 아시아주의 경향이 있었고, 아시아주의는 우익의 주요 슬로건이 되었다.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은 아시아 대국의 위상을 확보하고 국제적으로 지위가 높아졌다. 하지만 서구에서 여전히 황화론과 일본인 이민 배척 등이 이어졌고, 서구의 시선으로 보면 일본은 문명과 인종이 다른 존재였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에 당면하여 전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번 서구에서 대란이 끝나고 서구 대륙의 정치와 경제가 질서를 회복한 후, 각국이 다시 동양의 이권에 주목하면 백인과 유색인의 경쟁이 격화하고 백인이 함께 우리 유색인을 적으로 할지도 모른다. 지금 동양에서 유색인종으로 독립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일본과 지나 뿐이다.” 한편 중의원 고데라 겐키치(小寺謙吉)는 『대아세아주의론』(1916)을 통해 탈아입구에 기초한 국제 협조, 현상 유지, 경제 확장 등의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인종 경쟁, 동서 문명의 대항, 아시아 해방 등을 언급하며 일본의 지도와 지지를 통한 중국 개조와 보전을 주장하였다. 결국 일본은 탈아입구를 완수하지 못한 채 아시아로 회귀하여 아시아주의를 주장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우위를 전제로, 아시아 각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그들과 동맹하여 서구 열강과 대항하려 하였다. ‘문명국 일본의 사명감’이 더해진 대아시아주의가 대두한 것이다. 근대 일본에서 아시아주의는 아시아 각국의 내셔널리즘을 무시한 관념으로, 일본 내셔널리즘의 변형일 뿐이었다.

4 아시아주의의 종착, 대동아공영권 구상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만주국을 세우는 등 중국을 침략하였다. 1933년 2월에는 국제연맹 임시총회에서 전권대사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가 과거부터 일본이 극동의 평화와 질서 그리고 진보의 지주였다고 열변하였다. 이듬해 1934년 4월에는 외무성 관리 아모 에이지(天羽英二)가 기자 회견에서 ‘아시아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은 아시아인에게 있으며, 서구 제국의 간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동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그의 발언은 서구 제국으로부터 아시아 먼로주의(Monroe Doctrine of Asia)라고 비난을 받았다. 사실 아모의 발언은 일본 외무대신이 중국 주재 일본공사에게 보낸 지시를 누설한 것으로, 지시 중에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평화 질서를 유지할 것, 배일 운동의 타파, 열강의 공동 작전 및 책동을 파괴할 것 등이 포함되었다.

일본에서 대아시아주의는 아시아 제국이 연대해 서구 열강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자고 주장하면서, 실제 열강의 아시아 침탈에 앞서거나 대신하며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제국주의적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아시아 연대론과 결별하고, 침략 정책을 은폐하며 ‘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침략’의 명분을 만든 것이다. 구체적으로 ‘동아신질서’와 ‘대동아공영권’ 등이 제시되었다. 먼저 일본 정부는 1938년 11월 중일전쟁의 목적이 동아신질서의 건설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영원한 동아의 안정을 위한 신질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반공주의, 또 하나는 아시아주의와 관련된 것이었다. 전자는 항일 용공의 중국 정부를 부정하고, 일본·만주국·중국 연대의 방공(防共)을 달성하는 것이다. 후자는 동양문화의 인의도덕에 기초해 ‘동아에서 국제 정의를 확립’하고, 동양 전통의 정신문화와 서양 근대의 물질문화를 융합한 ‘신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단 동양문화의 경우 일본문화를 순화 발전시켜, 중국문화와 기타에 새로이 생명을 불어넣어 재생 재건시켜야 했다.

다음으로 1940년 7월 일본 정부는 ‘기본 국책 요항’을 작성하고 ‘대동아신질서’를 표명하였다. 동아신질서가 중국을 대상으로 한 것과 달리, 대동아신질서는 동남아시아를 포함해 아시아 전체에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에 기초해 동년 8월에는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이라는 외교 방침이 발표되었고 이어서 동년 11월 일본, 만주국, 중국(왕징웨이정권) 삼국이 공동 선언을 하였다. 즉 도의에 기초한 신질서에 근거해 항구적 평화를 확립하고 세계 평화에 공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삼국은 상호 승인하고 호혜 관계를 맺으며 선린 우호, 공동 방공, 경제 제휴 즉 경제 블록을 달성하기로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일본정부가 대동아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아시아주의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일본흥아동맹(大日本興亞同盟)을 결성한 점이다. 그를 통해 ‘건국의 정신에 반하여 황국의 국가 주권을 불분명하게 하는 국가 연합 논리의 전개 또는 그에 기초한 국제 형태의 확립을 촉진하려는 운동을 박멸하려’ 하였다. 이제 천황제 국가의 파시즘 체제에 호응하는 슬로건으로서 대아시아주의만이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 구상은 일본과 미국·영국의 대립을 첨예화하였고 일본을 태평양전쟁으로 내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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