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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과 연합국의 군사 개입

20세기 국제정치의 구도 형성

1918년

러시아 내전과 연합국의 군사 개입 대표 이미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합군의 퍼레이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 개요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성립하고 그에 대항하는 반정부 세력이 생겨나면서 러시아 주변과 시베리아 일대를 중심으로 내전이 전개되었다(적백 내전). 소비에트 정권이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해 전선에서 이탈하자,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은 사회주의 확산을 방지하는 동시에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하는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개입하였다(간섭 전쟁). 특히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반란을 일으키자, 미국과 일본 주도로 연합국은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냈다(시베리아 출병). 소비에트 정권의 러시아는 내전과 함께 외국 열강과도 전쟁을 치러야 했다. 1920년에 이르러 연합군의 철수 선언으로 연합국의 군사 개입은 종결되었는데, 일본군은 1922년이 되어서야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였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혁명 이후 내전과 연합국의 군사 개입은 제1차 세계대전과 연동되는 제국주의 전쟁인 동시에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대립으로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국제정치의 측면에서 19세기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구도의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2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1917년 러시아는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하였다. 하지만 그에 대항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아 내전 상태가 이어졌다. 그 예로 미하일 알렉세예프(Mikhail Alekseyev)와 라브르 코르닐로프(Lavr Kornilov)는 각각 육군 총사령관과 해군 제독 출신으로 러시아 남부에서 의용군을 조직해 봉기하였다. 그와 같이 당시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한 반정부 세력은 백군(白軍) 또는 백위군(白衛軍)이라고 불린다. 그 어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소비에트 정권의 군대인 적군(赤軍)과 대비되는 호칭으로 정착되었다. 참고로 적군은 1918년 1월 기존의 무장 조직인 적위대(赤衛隊)에 기초해 창설되었고, 적군과 백군이 대립하는 러시아 내전은 적백 내전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백군은 반정부 세력이지만 정치적, 민족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분열되었다. 실제 백군의 사령관은 대부분 제정 러시아의 귀족과 지주 출신으로, 구체제의 부활을 꿈꾸며 농민의 토지를 빼앗는 등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또 백군은 주로 러시아의 주변과 시베리아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는데, 그곳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당시 내전은 러시아 내전으로 한정되지 않는 동시에 복잡한 국제관계와 연관되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성립 직후 ‘평화에 대한 포고’를 발표하고 즉각적인 휴전과 강화를 주장하였다. 이어서 제정 러시아가 체결한 비밀 협정(사이크스-피코 협정)을 공표하려 했다. 소비에트 정권이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며 국가 간 비밀 조약을 폭로하는 등 기존 국제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국제관계를 주장하자, 연합국은 크게 놀라며 서둘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무엇보다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목적을 새로이 모색하고, 소비에트 정권과 독일이 강화할 경우에 대응해 방책을 마련해야 했다. 먼저 연합국은 소비에트 정권을 승인하지 않고 휴전 및 강화 제안을 거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정권과 독일이 강화하면 소비에트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을 원조하거나 직접 군사 개입을 하기로 하였다.

다음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 각서에 합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즉 현재 러시아에 국가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 내 소비에트 정권을 비롯해 여러 정치세력과 교섭하고 필요에 따라 원조하는데, 그것은 내정 간섭이 아니다. 그와 관련해 지역적으로 프랑스가 우크라이나를, 이외 남동 지역은 영국이 담당한다.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는 미국과 일본에게 파병을 요청한다. 미국과 일본 군대는 시베리아 철도를 함께 관리하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전략 물자가 독일에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3 연합군, 러시아에 군사 개입

1918년 3월 독일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소비에트 정권은 단독으로 독일과 강화 조약을 체결한 후 전쟁에서 이탈하였다(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독일군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러시아의 서부 지역을 점령하고 그 곳에 괴뢰정권을 세웠다. 이후 서부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연합국은 독일군의 시선을 다시 동부 전선으로 향하도록 하는 동시에, 소비에트 정권을 제압하기 위해 러시아 내전에 군사 개입을 하였다. 즉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군수 물자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러시아 북부의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스크를 점령하였다. 일본도 단독으로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군대를 보냈다. 표면적으로 일본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파병 요청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동부 시베리아로 세력을 확대하고 중국에 압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때 1918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감이 컸다. 그 점을 노려 러시아는 국내 체코와 슬로바키아인들과 체코와 슬로바키아 출신 오스트리아군 전쟁 포로를 군대로 조직했는데, 그 규모가 3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소비에트 정권이 독일과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이탈하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중 첼랴빈스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시베리아 철도 인근의 도시로 세력을 확장해 서부 시베리아와 볼가 강 및 우랄 산맥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고 백군 세력과 연합하였다. 이에 동년 8월 미국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구원을 주장했고, 연합국은 공동으로 군대를 보내기로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약 1만5천 명 병력을 아르한겔스크에 상륙시켰고, 미국과 일본이 시베리아로 군대를 보냈다. 특히 일본은 동년 10월까지 약 7만3천 명 병력을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지방으로 보냈다. 그것은 국제 합의를 크게 웃도는 것으로 연합국의 군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시베리아 출병은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고 영국과 프랑스 등이 참가하는 다국적 군대의 개입이었다. 연합군은 반정부 세력의 정권 수립을 옹호하며 소비에트 정권의 파르티잔과 교전함으로써, 전면적으로 러시아 내전에 간섭하였다. 연합국의 개입으로 백군의 세력이 확장되었고 러시아 북서부, 남부, 동부 지역으로 내전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1918년 11월 독일이 패전하고, 연합군의 군사 개입에 변화가 있었다. 즉 독일과의 전쟁에 연관된 군사 행동이라는 구실이 없어지면서, 연합군은 소비에트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을 지원하는 것으로 군사 개입의 목적을 변경하였다. 1919년 2월에는 약 13만 명의 연합군이 백군과 합류해 중앙 러시아로 진격하였다.

연합군의 군사 개입으로 소비에트 정권의 적군과 반정부 세력의 백군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고 내전이 격화하였다. 한때 백군의 세력이 거세어 궁지에 몰렸지만, 소비에트 정권은 적군을 조직하고 전시(戰時) 경제정책을 실시해 모든 것을 전쟁에 투입하였다. 무엇보다 각지의 농민이 소비에트 정권과 적군을 지지하였다. 반면 연합국 측에 내부적으로 불화가 생겨나고, 전쟁에 대한 염증도 나타났다.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나, 1919년 4월에는 프랑스 함대가 오데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서 콜차크(Kolchak) 정권 등 반정부 세력이 무너지자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철수시켰고, 1920년 1월에 이르러 연합국이 러시아 봉쇄를 해제하였다. 소비에트 정권이 백군 진압에 성공하였고, 연합군의 군사 개입은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일본군은 러시아 영토에 계속 주둔하였다. 일본 정부는 동부 시베리아를 지배하기 위해 거류민을 보호하고, 조선 및 만주지역에 대한 과격파 즉 볼셰비키의 위협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와 함께 연해주에서 적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것은 연해주 거주의 조선인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조선의 항일 운동 세력은 러시아 내전과 연합국의 군사 개입과 관련되어 활동하였다. 연해주 일대에서 최고려가 지휘하는 자유대대 등이 러시아 적군과 함께 활동하였다. 한편 만주지역의 독립군 연합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무기를 구매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 대비해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항일 운동 진영이 분열되기도 하였다.

1920년 3월에서 5월 사이 시베리아 니콜라옙스크에서 일본 주둔군과 거류민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이용해 일본 정부는 볼셰비키와 파르티잔의 잔혹함을 선전하며,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반대 여론을 환기하고 일본군을 계속 주둔시켰다. 또 보복과 배상 보장을 위해 사할린 북부를 점령하였다. 일본은 국내에서 철수 요구가 거세지고, 특히 워싱턴 회의에서 열강이 압력을 가하자 1922년 군대를 시베리아에서 철수시켰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 출병으로 일본에서 3천5백여 명의 사상자가 있었고, 10억 엔 이상의 전비가 사용되었다. 대외적으로 러시아는 물론 미국과 관계도 악화되었다. 조선과 중국 동북지방에 이어 동부 시베리아까지 세력권에 편입하려는 일본과 아시아로 진출하려는 미국이 이미 대립하고 있었다.

4 20세 초 국제정치의 전환

내전 이후 러시아 전역은 극도로 황폐해 졌고, 연이은 전쟁과 봉쇄로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거기다 내전 중 소비에트 정권에 의한 억압과 더불어, 1920~1921년 가뭄으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그 결과 전쟁과 무정부 상태 그리고 기근 등을 피해 수백만 명이 러시아를 떠나 해외로 이주하였다. 이에 1921년 소비에트 정권은 시장경제를 일부 인정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1919년 소비에트 정권은 국제조직 코민테른을 창설하고, 피지배 계급·민족과 동맹해 혁명을 지속 확대하려 하였다. 1922년에는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카프카지예 등 3개국이 가입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이 성립되었다.

러시아의 혁명과 내전을 통해 세계사적으로 자본주의·제국주의와 사회주의·반제국주의의 대립이 형성되었으며, 제국주의 열강은 자본주의 체제를 방위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주목할 것은 그러한 변화가 국제정치의 측면에서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의 전환과 연동되는 점이다. 19세기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공방을 거듭했는데, 그러한 관계를 체스에 빗대어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렸다. 양국의 패권 경쟁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로 확장되었고, 1885년 거문도 사건도 밀접히 연관되었다. 하지만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여 영·러의 경쟁은 한풀 꺾인 반면, 이제 영국은 유럽에서 독일의 부상을 경계하였다. 이에 영국과 러시아 양국은 1907년 협상을 맺고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 티베트 등에 관한 각축을 종결하였다. 19세기 국제정치의 그레이트 게임이 일단락된 것이다.

그런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국제정치의 그레이트 게임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영국과 러시아 외에 미국과 일본이 함께 공방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전쟁에 휩싸여 있는 동안 미국은 강대국으로 발전했고, 1917년 참전하여서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전쟁 상황을 바꾸었다. 마침내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후퇴했고,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이 먼저 항복하였다. 그 과정에 러시아는 소련으로 변모하였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동안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상황이 전환되었고,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은 유럽이 아닌 국가의 개입으로 종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특히 시베리아 출병으로 대표되는 군사 개입을 통해 영국이 쇠퇴한 반면, 새로이 미국이 대두하고 일본이 주요 위치를 점하면서 국제정치의 구도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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