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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사회주의 국가의 성립

1917년

러시아 혁명 대표 이미지

1917년 소비에트 대회

1 개요

러시아 혁명은 크게 1905년 혁명(제1차 혁명)과 1917년 혁명(제2차 혁명)으로 구분된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다. 전국적으로 파업이 확산되고, 전함 포템킨호(Potemkin)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다만 정부가 러일전쟁을 종결하고 두마, 즉 국회 개설의 칙령을 발포하는 한편 모스크바에서 민중의 무장 봉기가 실패로 끝나며 혁명의 기운은 일단 진정되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사회 문제가 격화하면서 1917년 노동자와 군인 중심의 소비에트가 주도해 제정을 타도하였다(2월 혁명). 이어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권을 세운 후 전쟁을 중단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로 나아갔다(10월 혁명). 러시아 혁명은 국내 사회와 제국주의에 내재한 모순에서 비롯된 민중 혁명으로, 세계 최초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세계적으로 마르크시즘에 기초한 사회주의 체제와 반제국주의 운동을 확대시켰고, 세계사는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2 1905년, 혁명이 시작되다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 아래 철도 건설과 중공업 육성 등 경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 배경에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 자본의 도입과 곡물 수출이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공황이 발생하면서 경제 성장에 내재한 모순이 드러났다. 사회 전반적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었고, 특히 러일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로 러시아 사회는 전례 없는 어려움에 처했다.

1905년 1월러시아력. 1918년 1월말 러시아력이 폐지되고, 러시아에서 서력이 사용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전쟁 중지와 각종 권리 보장 등을 청원하기 위해 궁전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야말로 ‘피의 일요일’이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 정치를 타도하자는 파업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1월부터 4월까지 8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고, 5월에는 공업도시 이바노보의 파업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회의 또는 평의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다음 달 흑해(黑海) 함대의 전함 포템킨호에서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자 먼저 러시아 정부는 전쟁을 중지하기 위해 일본과 강화를 맺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파업을 벌이자, 정부는 의회 소집 등을 선언하였다(10월 선언). 이에 일부 세력이 호응하며 총파업의 태세가 무너졌고, 이어서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무장 봉기가 실패하여 혁명의 기운은 퇴조하였다. 1906년 가까스로 두마(국회: 하원에 해당)가 성립되었지만, 정부가 두 차례 두마를 해산시키는 등 반동 정책을 강화했고 결국 1912년 무렵 민중 운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당시 대외적으로 발칸반도에서 두 차례 전쟁이 있었다(1912~1913). 러일전쟁 이후 아시아에서 남하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워지면서, 러시아는 발칸반도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예상과 달리 발칸반도는 영토 쟁탈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고 1914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유럽 국가들은 영국·프랑스·러시아(삼국 협상) 세력과 오스트리아·독일 중심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였고. 민족과 종교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유럽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다.

러시아는 발칸반도를 차지하는 동시에 국내 혁명의 기운을 잠재우려 서둘러 전쟁에 뛰어들었다. 개전은 거국일치의 분위기와 애국의 열광을 조장하여, 사회주의 세력 중 일부도 조국 방위의 전쟁에 동조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처음부터 군인 수송과 포탄 보급 등에 곤란을 겪었고, 기대와 달리 패전을 거듭하였다. 군인들은 전투 의욕을 상실하였고, 국내는 전시 동원을 내세워 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탓에 식량과 물자가 부족하였다. 게다가 1916년 여름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군사 동원에 대한 민족 반란도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전과 달리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는 총력전으로 전개되었고, 전쟁의 장기화로 생활은 파탄에 이르렀다. 이에 러시아 국민은 전쟁을 일으킨 정부에 반대하고, 황제의 전제 정치인 차리즘에 분노하였다.

3 소비에트가 혁명을 주도하다

19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다시 파업이 일어났다. 동년 2월 민중은 ‘빵을 달라’고 외치며, 전쟁 반대와 전제 타도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그때 진압군을 수송하는 기차는 파업으로 오지 못했고, 전쟁에 지친 군인들도 혁명 세력에 가담하였다. 이어서 노동자·군인의 소비에트가 결성되었고, 그들이 조건부로 지지하는 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니콜라이 2세의 퇴위와 함께 약 300여 년간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의 지배가 무너졌다(2월 혁명).

소비에트의 지지를 얻은 임시정부는 사회혁명당(SR)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Aleksandr Kerenskii)가 주도하였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공존하는 이중 구조의 정치권력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부르주아에 기반을 둔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고, 산적한 국내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그때 볼셰비키(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분파)를 이끄는 레닌(Vladimir Lenin)이 귀국하였다. 레닌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국외로 망명했는데, 스위스에서 돌아와 뒤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즉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는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월 테제).

마침내 1917년 10월 소비에트가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후 곧바로 다음의 사항을 약속하였다. 첫째, 교전국에 즉시 강화를 제안한다. 둘째, 지주의 땅을 비롯해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위원회에 인도한다. 셋째, 군대 민주화를 통해 군인의 권리를 보장한다. 넷째, 노동자 통제를 수립한다. 다섯째, 헌법 제정 의회를 소집한다. 여섯째, 도시와 농촌에 각각 빵과 생활필수품을 공급한다. 마지막으로 민족 자결을 보장한다(10월 혁명). 1918년 1월 러시아는 노동자·농민·군인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언하고, 이듬해 제3회 소비에트 대회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선언하였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의 확립을 천명한 것이다.

무엇보다 소비에트 정권은 민족 자결을 약속하고, 여러 민족과 자유로운 동맹에 기초한 민족 소비에트 공화국의 연방을 선언하였다. 당시 선언은 형식적이었고 일차적으로 러시아 주변 국가들에 한정되었지만, 대내외적으로 침탈과 착취에 내몰린 중국과 조선의 민중은 사회주의 사상에 기대를 가졌다. 특히 러시아의 극동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조선인의 이주민 사회가 형성되어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는 동시에 러시아 혁명과 직접 연관됨으로써, 조선인의 사회주의 운동 세력이 형성되었다. 일례로 1917년 12월 하바로프스크에 소비에트가 만들어지자, 이듬해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공화국의 앞날은 순탄치 않았다. 러시아 주변 및 시베리아 일대에서 반혁명 세력이 저항해 내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평화에 대한 포고’를 발표하고, 1918년 3월 독일과 조약을 맺은 후 전쟁에서 이탈하였다. 이에 러시아의 상황을 주시하던 당시 연합국의 영국·프랑스·일본·미국 등은, 사회주의 혁명이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직접 시베리아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들 국가들이 러시아의 반혁명 세력을 지원하고 러시아의 내전에 ‘간섭’하면서 러시아의 내전 상황은 한층 복잡해졌다. 동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0년에 이르러 소비에트 정권은 반혁명 세력을 진압하였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에 이은 내전과 경제 봉쇄로 경제 상황은 최악의 상태였다.

4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

비록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남았지만, 러시아 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제국주의 전쟁으로 드러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유럽에서 공산당이 조직되고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후 사회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무엇보다 1919년 3월 소비에트 정권이 혁명의 지속과 확대를 위해 피억압 계급과 민족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국제조직으로서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의 약칭)을 창설하며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운동과 식민지 민족해방 운동을 위해 자금과 사상적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것은 열강의 침탈에 저항하는 중국과 조선 등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19년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장한 14개조 원칙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각국 내에서 소수 민족의 자결(self-determination)을 강조했는데,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측면을 내포하는 등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승전국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패전국의 영토와 이권을 분할해 쟁취하는 데 열중하고, 식민지 문제를 외면하였다. 독일 및 소비에트 연방과 연관된 동유럽과 발트해 연안의 나라들이 독립했을 뿐이었고, 민족 자결은 패전국의 식민지를 처리하는 원칙으로서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윌슨의 원칙은 아시아의 식민지 국가에 희망을 주었다.

1919년 조선에서 각계각층의 민중이 전국적으로 참여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였다(3·1 운동). 중국에서도 정부가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굴복하자, 국민이 반일과 반군벌 투쟁에 나섰다(5·4 운동). 하지만 3·1 운동은 일본의 탄압으로 대부분 진압되었고 이후 중국 상하이에 독립운동을 이끌 지도부로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내부에서는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었다. 다만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서 조선의 독립과 같은 민족 문제를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지 논쟁이 이어졌다. 당시 코민테른은 1920년 ‘민족 문제에 관한 테제’를 발표하고 혁명적 민족운동을 지지하였고, 1924년에는 ‘동양 문제에 관한 일반적 테제’를 통해 반제 민족연합전선을 구체화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중국에서 1921년 공산당이 조직되고,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조선에서도 1925년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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