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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20세기 초 국제 관계의 전환

1904년

러일전쟁 대표 이미지

러일전쟁

The Tacoma Times. January 27, 1904

1 개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러시아의 정세에 주목하며 군비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의화단 진압 이후 러시아가 청에서 철수하지 않으면서 러·일의 대립은 격화하였다. 한국에 대한 지배를 확립하고 만주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과, 만주지역을 점령하고 한국으로 확장하던 러시아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04~1905년 러·일 양국이 한국과 만주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그 배후에 영국·미국·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이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비 조달과 강화 문제에 관여하였다. 예상과 달리 러시아는 연이어 패배하였고, 국내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일본 역시 겉으로 유리하였지만, 실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운 한계에 처해 있었다. 이에 양국은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국제적으로 한국과 만주지역 남부에 대한 우위를 인정받고 사할린 남부 등을 얻었다. 신흥의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 대국 러시아를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킨 점에서 러일전쟁이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만큼, 전후 국제관계에서 일본의 지위가 크게 상승되었다. 연이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이 일본과 협정을 맺고 이른바 삼국 협상의 진영에 일본을 포함시켰다. 따라서 세계사적 관점에서 러일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개에 영향을 주었다.

2 일본, 러시아를 적으로 삼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타이완을 할양받았다. 하지만 러시아·프랑스·독일 삼국의 간섭으로 인해 3천만 냥을 추가로 받는 대신 랴오둥(遼東) 반도를 반환해야 했다. 한편 청과 러시아는 외교적으로 접근하였다. 1896년 러시아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이홍장(李鴻章)을 축하 사절로 불러 양국 간 비밀 조약이 체결되었고, 러시아는 만주지역의 철도(東淸鐵道) 부설권을 얻었다.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고 있던 러시아는, 만주지역을 통과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철로를 개통하고 만주지역에 중요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조선도 전후 러시아와 긴밀히 관계를 맺었다. 일본이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의 왕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한층 커졌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와 협정(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을 체결하고 조선 문제에 관해 러시아와 협조하는 동시에, ‘동양의 맹주’를 꿈꾸며 러시아를 대상으로 군비 확장에 열을 올렸다. 1898년에는 독일이 산둥(山東) 반도와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조차하자, 러시아도 랴오둥 반도 남부의 전략 거점인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조차하였다. 일본은 다시 러시아와 협정을 맺고 대한제국(이하 한국)에서 일본의 우위를 인정받는 대신 러시아의 뤼순과 다롄 점령을 묵인하기로 하였다(로젠-니시 협정).

하지만 1898~1899년 열강에 의한 청의 과분(瓜分, 박을 쪼개듯 분할하다) 상황이 전개되고,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을 포함해 8개국이 의화단 진압을 위해 연합군을 형성하여 베이징(北京)을 점령하였다. 결국 의회단이 진압되고 각국이 군대를 철수하는데, 러시아는 만주지역에 군대를 남겨두면서 해당 지역을 사실상 점령하였다. 아울러 한국에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 등을 파견하고, 마산포(馬山浦) 조차를 시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을 영국은 위협적으로 인식하였고, 청에서 자국의 이익을 방위하기 위해 1902년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이듬해 러시아가 압록강 일대에 삼림을 채벌하고, 용암포(龍巖浦)에 군사 거점을 건설하려 하면서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긴장은 한층 높아졌다. 일본 정부는 원로(元老)와 대신 등이 참가하는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고 러시아와의 교섭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러시아와 교섭했지만 타협에 이르지 못하였고, 점차 일본 사회 전체가 전쟁을 각오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10년간 러시아를 대상으로 군비를 확장한 일본군은 개전을 재촉하였고, 일반 국민 또한 증세에 허덕이면서도 강경한 외교에 동조한 것이다.

마침내 1903년 12월 일본 정부는 개전 준비를 서두르기로 하였다. 국력이 부족해 장기전에 견디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전략적으로 원군(援軍)이 오지 않는 시점에 만주지역의 러시아군을 무너뜨려 우세한 국면을 만든 후 영국과 미국에 의뢰해 강화하려 하였다. 실제 정부는 개전과 동시에 사법대신을 역임한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와도 면식이 있는 그를 통해 미국 정부와 교섭을 도모하며 일본에 관한 여론을 조성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외채 모집을 위해 일본은행 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도 영국으로 파견하였다. 전력상 일본의 패배가 예상된 만큼, 개전 직후 일본의 외채가 폭락하고 투자가들의 외면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은 전비와 군수품을 영국과 미국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원조를 이끌어내고 외채를 모집하기 위해서도 빠른 시일 내 성과를 올려야 했다.

3 전쟁 경과와 강화 논의

1904년 2월 일본군이 인천과 뤼순을 기습한 후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일본군은 한국에 상륙하고, 이어서 다롄의 난산(南山)을 점령해 뤼순항의 러시아군과 만주지역의 본대를 차단시켰다. 이후 일본군은 랴오양(遼陽) 일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바다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려는 러시아 함대를 황해(黃海)와 울산 일대에서 물리치고 제해권을 얻었다. 하지만 뤼순 점령이 늦어지고 랴오양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섬멸하지 못했기에, 전략과 달리 일본군은 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없었다.

1905년 1월 일본군이 뤼순을 점령하였다.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이끄는 일본군 제3군의 공격이 실패하고, 약 6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얻은 승리였다. 동년 3월에는 러시아군과 일본군 각각 약 35만과 25만이 평톈(奉天)에서 충돌하였고, 러시아군 9만과 일본군 7만의 사상자가 나왔다. 일본이 어렵게 승리했지만, 이후 육상에서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동년 5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일본 함대가, 발트 해 연안 리예파야에서 출발하여 7개월 동안 29,000킬로미터를 항해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파하고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일본은 이미 전력 소모와 경제 부담으로 한계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한층 절박한 상황이었다. 연이은 패배에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국내 전역으로 혁명이 확산되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하루 빨리 전쟁을 끝내야 했다. 한편 일본을 원조한 영국과 미국도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승리하여 만주지역을 독점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이에 1905년 6월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이 러·일 양국에 강화를 권고하였다. 동년 9월 미국의 조정으로 포츠머스에서 러·일 양국이 강화조약을 체결하였고,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와 러시아의 세르게이 비테(Sergei Witte)가 조인하였다.

아시아 국가 일본이 서구 열강인 러시아에게 승리하자 전 세계는 놀라워했다. 다만 일본의 승리는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려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이 있어서 가능하였다. 실제 일본은 전쟁 비용의 절반 이상을 미국과 영국 자본에 의지하였다. 한편 러시아 역시 전쟁 비용의 상당 부분을 프랑스 자본에 의존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열강의 대리전이기도 했다.

4 20세기 초 국제관계의 변화

강화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한다. 둘째, 랴오둥 반도의 남단(뤼순과 다롄 포함) 조차권과 동청철도 내 뤼순-창춘의 지선(이후 남만주철도) 및 부속 토지 탄광의 조차권을 일본에게 양도한다. 셋째, 사할린에서 북위 50도 이남 영토를 일본에게 양도하고, 연해주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게 준다. 다만 강화조약에 러시아의 배상은 없었다.

청일전쟁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방대한 전비가 투입되었는데, 일본은 배상금을 받지 못했다. 사실 전쟁 중 일본 정부는 자국의 승리를 선전하며 국민의 기대를 조장한 반면, 전쟁 수행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숨겼다. 따라서 일본 국민은 대부분 국력의 피폐를 알지 못한 채 배상금 없는 조약에 반대하였고, 1905년 9월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 집회를 열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정부가 계엄령을 내리고 폭동을 진압했지만, 총리 가쓰라 다로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일본은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했다고 할 수 없지만, 강화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억제하고 한국과 만주지역을 세력권에 편입하는 등 일차 목표를 달성하였다. 무엇보다 서구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배타적인 우위를 인정받았다. 이미 개전 직후 일본은 한국의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강제로 의정서를 체결했으며, 그에 근거해 한국에서 전략적으로 필요한 지점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한국과 협약을 맺어 재정과 외교 고문을 임용하도록 하는 등 한국 내정에 간섭하였다(제1차 한일협약). 또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 앞서 일본은 미국과 협정(가쓰라-태프트 협약)을 맺고, 영국과 협약(제2차 영일동맹)을 갱신하는 등 한국에서 일본의 우위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한 후 1905년 11월 강제적으로 제2차 한일협약을 맺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동년 12월 한성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다음으로 일본은 랴오둥 반도의 남단 즉 관동주(關東州) 조차를 시작으로 만주지역의 남부를 세력권에 편입하고 중국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구체적으로 관동총독부(이후 관동도독부)를 설치하고, 이어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창립하였다. 1905년 12월에는 청과 만주지역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러시아로부터 받은 이권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남만주철도의 연장 및 연선의 광산 채굴과 수비대 주둔, 압록강 연안의 삼림 채벌권 등 새로운 이권을 얻었다(만주선후조약). 이어서 1907년 러시아와 협약으로 만주지역의 남부를 세력권에 포함시켰다. 사실 러일전쟁은 청의 영토에서 타국이 서로 전쟁을 벌인 것이었다. 이후 청은 만주지역으로 이민을 장려하고 성(省)·부(府)·현(縣)의 지방행정을 실행하는 한편, 원세개(袁世凱)가 이끄는 북양군 일부를 주둔시키는 등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력을 약화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국제적으로 근대 국가로서 전쟁에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이후 메이지 유신의 당면 과제였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할 수 있었다. 주목할 것은 그 과정이 전후 국제관계의 재편과 맞물려 이루어진 점이다. 러시아는 동아시아로 남하하는 정책이 저지되자 발칸반도로 관심을 돌려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대립하였고, 독일의 약진을 우려하던 영국에 접근하였다. 이를 계기로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의 협조 관계 이른바 삼국 협상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1907년 일본은 프랑스와 협약을 맺고 아시아에서 각자의 세력권을 상호 인정하였다(프랑스·일본 협약). 이어서 러시아와도 조약을 체결하고 러시아·일본 양국은 각각 만주지역의 북부와 남부를 세력권으로 하는 한편, 외몽골에서 러시아의 권익과 일본의 한국 지배를 상호 승인하였다(러시아·일본 협약). 러일전쟁 이후 유럽에서 삼국 협상이 이루어지고 일본 역시 삼국 협상의 진영에 연관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의 세력 구도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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