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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滿洲事變]

중일전쟁의 서막

1931년

만주사변 대표 이미지

일본군의 진저우 점령

東京日日新聞

1 개요

만주사변은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계획한 류탸오후(柳條湖) 사건을 발단으로 한다. 이후 일본은 만주지역을 점령하고 이듬해 1932년 3월 만주국을 수립했으며, 동년 5월 탕구(塘沽)에서 중국과 정전 협정을 맺었다. 만주사변은 일차적으로 1931~1933년 류탸오후 사건부터 정전 협정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중국 만주 및 내몽고 지역을 침략한 전쟁을 가리키며 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고 부른다. 당시 국제연맹은 만주사변을 일본의 침략으로 판단해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고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불복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1920년대 협조 외교 지향의 워싱턴 체제를 무너뜨리는 한편, 국내에서 파시즘 체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측면에서 만주사변은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15년 전쟁’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2 만주사변의 전개

1931년 9월 18일 밤, 중국 펑톈(奉天: 현재 선양) 교외 류탸오후에서 일본 남만주철도의 선로가 폭파되는 사건(류탸오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인근에 장쉐량(張學良) 군대(당시 동북변방군)가 주둔하는 베이다잉(北大營)이 있었다. 폭파 사건 즉시 일본 관동군은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장쉐량 군대 주둔지와 평톈을 포격하였다.

다음날 관동군은, ‘중화민국 동북변방군의 부대가 펑톈 서북쪽 부근에서 남만주철도를 폭파하고, 여세를 몰아 일본의 수비대를 습격하였다 ... 원래 남만주철도는 조약에 근거해 일본이 정당하게 획득한 것으로 다른 나라가 손댈 수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일본 신문 『오사카 아사히신문』도 호외를 발행하고, 중국군이 류탸오거우(柳條溝)당시 알려진 류타오거우(柳條溝)라는 지명은 1980년대 연구에 기초해 류타오후(柳條湖)로 정정되었다.를 폭파하고 계획적으로 일본 철도수비대를 습격했다고 보도하였다. 중국군이 먼저 공격을 했고 그에 대응해 일본은 자위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했으며, 군사 점령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1928년 프랑스 파리에서 ‘켈로그-브리앙 조약’ 혹은 ‘전쟁 포기에 관한 조약’(General Treaty for the Renunciation of War)이 체결되었는데, 자위를 위한 전쟁 즉 자국의 이익과 관련된 군사 행동은 침략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만주사변이라는 호칭에도 국제법상 전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관동군이 선로에 폭약을 설치했고, 폭약의 양은 열차 운행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계획되었다. 관동군은 펑톈에 이어 이튿날 9월 19일 계획대로 잉커우(營口), 안둥(安東), 펑황청(鳳凰城), 창춘(長春) 등 남만주철도 선상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한편 관동군은 규모가 약 1만 명에 불과해 애초 조선 주둔 일본군 즉 조선군의 출병을 계획하였다. 지린(吉林)에 소동을 일으켜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파병하고, 조선군의 출병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21일 조선군사령관 하야시 센주로가 칙령 없이 독단으로 압록강을 건너 관동군에 합류하였다.

주목할 것은 관동군이 이미 1931년 6월 만주지역 침략을 구체화한 점이다. 주도 세력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젊은 장교들로, 그들은 육군 내 조직을 형성하고 주요 실무를 장악하고 있었다. 만주사변은 관동군의 돌발적인 군사 행동이 아니라, 육군성 및 참모본부와 함께 논의해 전개된 것이었다. 일본정부도 9월 22일 조선군의 월경을 추궁하지 않고, 관동군의 군사 행동을 추인하였다. 다만 군사 행동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관동군은 진저우(錦州)를 공격하며 남만주를 장악하는 한편, 치치하얼(齊齊哈爾)을 점령하고 북만주로 전선을 확대하였다. 동년 12월에 이르러 일본정부는 기존의 방침을 바꿔 만주사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병력을 증원하였으며, 1932년 1월 일본군의 계획에 따라 만주국 건설을 용인하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진저우와 하얼빈(哈爾濱) 등을 점령하고 만주지역의 주요 도시 대부분 장악한 상태였다. 결국 동년 3월 일본은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국가원수로 하는 만주국을 세우고, 동년 9월 만주국을 승인하고 협정(일만의정서)을 맺었다.

한편 일본군은 만주국에 대한 저항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1932년 3월 청더(承德)를 점령하고 장성(長城) 이남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이듬해 1933년 3월에는 러허성(熱河省: 현재 내몽고자치구, 허베이성, 랴오닝성 일부)을 만주국의 영역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일본군이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 근처까지 남하하자, 동년 5월 중국과 일본은 탕구(塘沽)에서 정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양국은 란허(灤河) 동부 즉 장성 이남에 비무장 지대를 설정하고 일본군은 장성 밖으로, 중국군도 루타이(蘆台)-퉁저우(通州)-옌칭(延慶) 라인 이남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만주국과 함께 장성 라인을 국경으로 사실상 인정하였고, 일본은 만주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3 예견된 충돌 그리고 준비된 침략

만주지역은 이미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남하를 배경으로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러시아는 아이훈 조약(1858년)과 베이징 조약(1860년)을 통해 아무르 일대와 연해주를 획득했고, 1890년대 시베리아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하였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만주지역의 철도, 즉 동청철도 부설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동청철도의 창춘(長春) 이남 지선 및 부속 토지를 획득하고 관동주(關東州)를 조차했으며, 1906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를 설립하였다. 만철은 철도 이외 푸순(撫順)·옌타이(煙台) 등의 탄광을 경영하는 한편, 철도 부속 지구의 행정을 담당하고 철도 10㎞ 당 15명의 군인을 주둔시켰다. 일본은 만철을 중심으로 만주지역에 대한 권익을 확대하였다.

이후 만주지역의 상황은 중국정부와 군벌 및 공산당 세력 등이 분열하고, 각각의 이익을 위해 열강과 관계를 맺거나 대립하면서 한층 복잡다단해졌다. 1922년에는 장쭤린(張作霖)의 평톈 군벌이 동삼성(東三省)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 철도 건설, 산업 장려, 조선인 이주, 토지 상조(商租) 즉 차용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 내셔널리즘의 고조와 함께 국권회복 운동이 확산되었다.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 통일을 목표로 내세우고 외국에 빼앗긴 권익을 되찾기 위해 군벌과의 전쟁, 즉 북벌(北伐)을 시작하였다. 이때 제1차 국공 합작(1924~1927)도 이루어졌다.

그렇게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에서 중국정부와 군벌의 대립, 국민당과 공산당의 견제 등이 전개되는 이면에는 일본, 소련, 미국 등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관여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자국의 권익을 행사하는 데 방해받았다고 주장하며 정치적, 외교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장쭤린이 반공·반일의 태도를 취하며 서구 열강과 관계를 맺고 투자를 도모하였고, 한편으로 국민당은 다시 북벌에 나섰다. 이에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보내 국민당과 장쭤린 양측을 무장 해제하고 만주지역을 지배하려 했다. 다만 일본정부가 국제 여론에 고심해 군대 파견을 주저하자, 1928년 6월 관동군이 펑톈에서 장쭤린이 타고 있던 열차를 폭파하였다. 군벌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괴뢰정권을 세워 간접 통치를 하기로 계획하고 장애가 되는 장쭤린을 배제한 것이다.

일본은 처음에 폭파 사건의 책임을 중국 측에 돌리려 했지만, 곧바로 관동군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 측이 중국정부와 합류해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만주지역에서 이권 회수와 일본상품 배척을 주장하는 운동도 거세어져, 일본의 영향력은 약화하였다. 이미 일본의 투자처, 상품시장, 중공업 원료공급지 등으로 기능하는 만주지역의 변동은 일본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세계 대공황으로 만주지역에서 불황이 이어지는 중에, 중국이 서구 자본을 이용해 독자적으로 철도를 건설하여 만철이 위기에 처했다. 그것은 일본에게 ‘만몽(만주·몽골) 위기’로 인식되었다.

일본 국내에서 장쭤린 사건 이후 총리가 교체되었고, 일본정부는 재정 긴축과 함께 미·영과의 협조 외교, 대중국 외교의 쇄신, 군축 촉진 등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일본 역시 불황에 빠졌고 사회 불안이 격화하였다. 무엇보다 해군 군축을 계기로 정계와 군대의 반발이 거세어졌다. 대표적으로 당시 추밀원 부의장인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황실 중심을 강조하는 고쿠혼샤(國本社)를 결성해 국민정신의 함양을 도모하며, 실상 정부를 공격하고 정당 기반의 정권을 흔들었다. 결국 우익(右翼)에 의한 총리 저격 사건이 일어났고, 1931년 3월에는 육군 장교들이 주도하는 쿠데타 미수 사건, 즉 3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시 관동군은 만몽 지역을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강조하며 만몽 영유 계획을 입안하였다. 구체적으로 1930년 9월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간지는 만몽에 대한 점령 통치를 제기하고, ‘일본 존립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 사명’이라고 하였다. 관동군과 조선군을 동원해 ‘만몽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고 일본 정치를 전환하려 한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일본군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1931년 1월 중의원 의원 마쓰오카 요스케가 중의원 예산총회에서 ‘만몽은 경제적으로, 국방의 면에서도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했으며, 같은 해 2월 구체적으로 회령(會寧)과 지린(吉林)을 잇는 철도(吉會鐵道)의 공사가 지연되는 문제를 지적하였다. 조선을 경유해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과 일본 도쿄를 잇는 최단의 간선철도를 건설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만주지역에 관해 일본이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중·일 양국의 관계를 악화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먼저 1931년 7월 창춘 서북의 완바오산(萬寶山) 일대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간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약 200명의 조선인이 완바오산으로 이주해 토지를 빌려 개간했는데, 관개수로 공사로 중국인의 소유지를 침범하였다. 이에 중국이 공사를 중지시켰는데, 일본은 교민 보호를 명분으로 영사관의 경관을 파견해 공사를 속행시켰다. 결국 중국인이 수로를 파괴하는 등 조선인과 중국인 간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일본과 중국 간 대립으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조선에서 중국인 배척의 사태가 전개되는 한편, 일본 국내에도 중국에 대한 강경 외교가 제기되었다. 이어서 일본 육군대위의 피살 사건이 공개되었다. 동년 6월 참모본부 소속의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가 농업 기사로 위장해 다싱안링 지구(大興安嶺地區) 내 금지 구역을 조사하던 중 중국군(동북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중·일 양국은 일단 외교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했지만, 일본이 사건을 공개하면서 일본 국내에 중국을 규탄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인 이주 문제로써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하고, 육군대위 피살 사건을 공개해 중국에 대한 강경한 여론이 조장되자 관동군이 주도적으로 만주지역을 침략하였다.

4 일본,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을 선택하다

만주사변이 발생한 후 중국은 국제연맹에 일본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였다. 당시 우선적으로 공산당 토벌에 주력하던 중국정부는 국제연맹의 힘을 빌려 일본의 침략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국제 여론의 압력으로 일본이 물러나기를 원한 것이다. 하지만 서구 제국은 만주지역의 무력충돌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고, 심지어 영국은 시종 일본에 유화적이었다. 국제연맹 이사회는 일본정부의 주장을 수용해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첫째, 국제연맹은 만주지역에 대해 영토 확장의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일본의 성명을 중시한다. 둘째, 일본정부는 국민의 안전 및 재산 보호가 확보되는 대로 가급적 빨리 군대를 철수한다.

그런데 1931년 10월 일본군의 진저우 공격 이후 서구 열강은 일본의 태도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먼저 미국이 장성 이남으로 전선을 확대하려는 일본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 국제연맹은 미국을 이사회의 입회인으로 참가시키고 이어서 동년 12월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곧이어 1932년 1월 일본이 상하이에서 중국과 무력 충돌 하였는데(1차 상하이사변), 항일 세력에 대응한다는 명분을 강조했지만 민간인의 피해가 컸던 격전이었다. 상하이 일대가 자국의 이권과 긴밀히 연관된 만큼 서구 열강은 이전보다 일본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상해사변은 물론 만주사변을 국제연맹 총회에서 처리하도록 했다. 동년 3월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임시총회가 개최되고, 국제연맹은 규약과 전쟁 포기에 관한 조약에 반하는 만주지역의 변동을 부인하였다.

한편 당시 국제연맹 이사회가 임명한 조사단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영국의 리튼 백작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Lytton Commission)은 도쿄를 거쳐 중국에 도착한 후 상하이, 난징, 한커우, 베이징 등을 시찰하고 약 1달 간 만주지역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1932년 10월 국제연맹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조사단은 보고서에 중국과 만주지역의 실정, 중·일 양군 간 분쟁, 만주사변의 경과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만주사변을 일본의 침략으로 규정함으로써 일본의 군사 행동은 정당방위가 아니며, 만주국은 자발적으로 세워진 게 아니라고 보고하였다. 즉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의 일부로서 자치권을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만주지역에서 일본의 권익을 인정하고, 중국과 일본 간 경제협력을 주장하는 등 매우 타협적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서구 열강은 전반적으로 일본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1933년 2월에 이르러 국제연맹이 특별총회에서 조사단의 보고서를 반영한 권고안을 채택하였다.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며, 만주국을 합법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현상 재건을 위한 일련의 조치를 제안한 것이다. 이에 중국은 국제연맹의 권고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거부하였다. 국제연맹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미 만주국을 승인하였고, 국제연맹에 대표단을 파견해 만주국 건국의 정당성을 열변하였다. 그리고 국제연맹이 권고안을 채택하자, 일본 대표단이 국제연맹의 회의장에서 퇴장하였고 이어서 동년 3월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버리고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까지 만주국에서의 권익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5 1930년대 중엽 동아시아의 변동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면서 사실상 1921년 워싱턴 회의를 계기로 전개된 이른바 협조 외교의 워싱턴 체제가 무너졌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 간 관계에 기본적으로 만주지역 즉 ‘동북 요인’이 작용하게 되었다. 1933년 만주사변에 대해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만주국의 귀속 문제가 양국 간 현안으로 남겨졌을 뿐 아니라, 일본이 화베이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기반이 마련되어 향후 양국 간 전쟁의 씨앗이 생겨났다.

당시 일본에서는 군대 내 파벌 대립이 격화하는 한편, 일본군은 점차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며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가진 집단으로 세력화하였다. 구체적으로 만주사변 직후 육군 장교의 주도로 쿠데타가 계획되었고, 이어서 새로 육군대신에 임명된 아라키 사다오를 중심으로 청년 장교 조직이 형성되어 극단적으로 천황 친정에 의한 국가 개조를 주장하였다. 1932년에는 해군 장교가 총리대신을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나 정당 기반의 정권이 무너졌다(5·15 사건). 경제적으로도 일본은 긴축 재정에서 적극 재정으로 전환하고 전시체제에 상응하는 구조가 갖춰졌으며, 그 과정에서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재벌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사회적으로는 국위 발양과 개척지 확보 등을 기대하는 여론이 커져, 대외 강경의 목소리는 정부가 조정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 사회는 점차 파시즘 체제로 전환되었고, 결국 화베이 문제를 계기로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점에서 만주사변은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15년 전쟁’의 1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930년대 중국 정부는 공산당 평정을 우선시하는 방침을 유지하고, 일본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민중은 일본의 침략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예컨대 1932년 상하이에서 중국 민권 보장 동맹이 결성되었고, 반공과 독재 강화에 몰두하는 정부를 비판하며 항일 투쟁을 촉구하였다. 중국 공산당 역시 1932년 대일 항전을 선언했지만, 국민당 정부의 압박에 밀려 1934~1935년 대장정을 감행해 옌안(延安)으로 이동하였다.

만주지역에 조선인이 많이 이주한 만큼 조선인에게도 만주사변의 영향은 상당하였고, 조선인의 대일 저항이 거세어졌다. 먼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 주도로 1932년 1월 도쿄에서 이봉창의 의거에 이어, 동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의 의거가 있었다. 일본 천장절 기념식장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던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1명이 사망하고 주중 일본 공사와 총영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한인애국단의 활동으로 중국에서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 호전되고, 임시정부도 곤경에서 벗어났다. 중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다만 일본 경찰이 임시정부 인사를 체포하면서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근거지를 옮겨야 했다. 한편 중국에서 한국독립당을 필두로 정당 중심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다만 좌우 연합과 통일전선에 대한 이견으로 정당의 분열 및 결성이 빈번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은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들어가 함께 항일 전투에 나섰다. 이후 만주지역에서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동북인민혁명군 등을 중심으로 조선인의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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