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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明治維新]

근대 국가의 체제를 확립하다

1868년

메이지 유신 대표 이미지

천황의 도쿄 행행(行幸)

Le Monde Illustré, 20 February 1869

1 개요

1867년 왕정복고의 쿠데타를 계기로 약 250여 년간 유지된 막부가 무너지고, 일본은 일련의 정치 변혁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당시 천황의 명으로 세상이 새로워졌다는 의미에서 고잇신(御一新)이라고 하였고, 이후 메이지 유신이라 불린다. 대체로 메이지 유신의 시기는 1850~1870년대 미국 함대에 의한 개국,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의 대호령(大號令), 보신 전쟁(戊辰戰爭), 폐번치현(廢藩置縣),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등을 포괄한다. 다만 그 시작과 종결에 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메이지 유신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변혁으로서 메이지 유신을 설명하면,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국내 모순과 서구 자본주의의 압력을 배경으로 막번체제(幕藩體制)가 동요되었고 1850~1860년대 정치 격동을 통해 무너졌다. 이후 일본 정부는 부국강병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목표로 문명개화(文明開化)의 기치를 내걸고 근대화 정책들을 추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국제관계를 새로이 정립하였다. 그리고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하고 근대 천황제와 자본주의에 기초한 근대국가를 확립하였다.

2 내우외환의 위기

1830년대 중반 일본에서 홍수와 냉해를 시작으로 수년간 기근이 이어졌다. 이미 상품경제의 확산을 배경으로 빈부의 차가 확대되었기에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하였다. 그럼에도 도시의 상인들은 쌀을 매점했고, 그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고 전국 각지에 봉기가 빈발하였다. 하지만 막부의 대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1837년 오사카(大坂)에서 막부 관리 출신의 오시오 헤이하치로(大鹽平八郞)가 난을 일으켰다. 그는 막부에 관리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한편, 구민(救民)의 깃발을 내걸고 대상인들을 습격하였다.

난은 반나절 만에 진압되었지만, 관리 출신 무사의 체제 비판은 당시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던졌다. 그 배경에는 농업 기반의 체제 원리가 무너지고, 상품생산과 화폐경제 확산에 따른 변화가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18세기 후반 이래 에조치(蝦夷地, 현재 홋카이도)로 남하한 러시아가 빈번히 교역을 요구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는 영국 등 서구 열강이 경계하는 바였고, 점차 서양의 함대가 일본 해안에 출몰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해금(海禁)을 매개로 막부가 교역과 외교를 통제하는 이른바 쇄국(鎖國)을 위협하였다. 즉 19세기 전반 대내외의 변화를 배경으로 200여 년간 유지된 체제가 동요되고 있었다. 이에 1839년 미토번(水戶藩)의 다이묘(大名)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가 당시를 내우외환의 상황으로 인식하고, 막부에 정치개혁의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막부는 의견서를 수용해 개혁을 실시했지만,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덴포 개혁).

그 때 미국의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류큐 왕국(琉球王國: 현재 오키나와)을 거쳐 1853년 에도(江戶) 인근의 우라가(浦賀)에 도착하였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 연안으로 진출해 새로운 상품시장과 고래잡이 기항지 등을 획득하는 데 진력하고 있었다. 미국의 증기선, 즉 구로후네(黑船)에 놀란 일본에게 미국 함대는 무력을 앞세워 개항을 요구했고, 이듬해 막부는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어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箱館)를 개항하였고, 이어서 영국·러시아·네덜란드 등과도 조약을 맺었다. 이후 일본 사회의 여론은 개국(開國) 파와 양이(攘夷) 파로 나뉘었다.

1858년 미국의 요구에 따라 막부는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쇼군(將軍) 후계 문제에 고심하던 막부는, 천황의 허락 없이 서둘러 미국·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 등과 조약을 체결하고 쇼군 후계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자들을 탄압하고 사형에 처하였다(안세이 대옥). 그것은 역설적으로 막부에 반대하는 세력을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제 일본 사회는 막부 세력과 반막부 세력으로 나뉘었다. 반막부 세력은 천황을 받들고(尊皇) 외국 세력을 물리칠 것(攘夷)을 주장하며, 내우외환에 직면한 일본 사회를 첨예한 정치 격동으로 이끌었다. 거기다 외국과의 통상 조약은 청과 서구 제국 간 불평등 조약을 모델로 체결되었기에 일본에 불리한 일방적인 최혜국 대우, 영사재판권, 관세 협정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결과 관세율이 매우 낮게 설정되어 생사와 차 등이 대량으로 해외로 유출되고, 국내에서는 수량 부족으로 물가가 급등하였다. 동시에 면직물 등 외국 상품이 들어와 농민에게 타격을 주었다. 일본이 개국과 함께 서구 자본주의의 시장에 편입된 것이다.

3 왕정복고의 쿠데타

존황과 양이를 주장하는 무사들은 천황이 있는 교토(京都)로 모여들었다. 1860년에는 쇼군 후계에 불만을 가진 미토 번의 무사들이 막부의 최고 관리 이이 나오스케(井尹直弼)를 암살하는 돌발 사태가 벌여졌다. 쇼군의 거성인 에도 성 주위가 피로 물들고,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막부는 체제 안정을 위해 교토의 조정과 연합을 도모하는 이른바 공무합체(公武合體)를 제시하였다. 1862년부터 1864년에 걸쳐 교토의 존황양이 세력을 진압했으며, 특히 대표적인 조슈번(長州藩) 무사들을 조정에서 쫓아내고 조슈번 정벌에 나섰다.

한편 사쓰마번(薩摩藩)의 경우 원래 공무합체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영국인 살해 사건으로 영국 함대와 무력 충돌을 하였고, 그 대응 과정에서 쇼군 후계 문제와 관련해 막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후 조슈번과 더불어 막부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을 논의하였는데, 양측 모두 서구 제국과 싸우며 군사력의 열세를 통감하고, 당시 정치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1866년 막부가 다시 조슈번 정벌에 나섰지만 실패로 끝났고, 이제 조슈번과 사쓰마번 등이 막부 타도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사회적으로도 쌀을 비롯해 물가가 폭등하고 조세가 가중되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불만이 폭발하고 각지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1867년에는 ‘에에자나이카(ええじゃないか)’ 등을 외치며 난무(亂舞)하는 행렬이 이어지는 등 사회 전반에 불만이 폭발하였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권력 유지의 방편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반납하였다(대정봉환). 이를 천황이 곧바로 허가했지만, 조슈번과 사쓰마번 등은 왕정복고(王政復古)를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결국 1868년 5개조의 서문(誓文)을 통해 새로운 정부의 기본 강령으로 개국 화친(開國和親)과 공의 세론(公議世論)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정체서(政體書)에 기초해 삼권 분립의 정치 조직을 갖춘 천황 중심의 정치제도를 부활시켰다. 더불어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조칙과 함께 천황이 메이지(明治)를 연호로 정하였다. 메이지는 『역경(易經)』의 구절 중 ‘성인이 남면해 천하를 다스리니 천하가 밝게 다스려진다(聖人南面而聽 天下嚮明而治)’에 근거한다.

4 근대화 정책의 전개와 저항

왕정복고 이후 1868~1869년 내전이 있었지만(보신 전쟁), 일본 정부는 에도 성을 접수하고 반정부 세력을 제압하였다. 천황이 에도 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에도는 새로이 도쿄(東京)라고 불리었다. 도쿄라는 호칭 자체가 근대 일본의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주도로 다이묘, 즉 번주(藩主)가 토지와 인민을 천황에게 반환하였다(판적봉환). 이는 형식적인 절차로서 번주는 지번사(知藩事)로 임명되어 영내 정치를 유지하였다.

1871년에 이르러 일본 정부가 행정적으로 번을 폐하고 현을 설치했으며, 지번사를 폐지하고 각 현에 현령(縣令)을 파견하였다(폐번치현). 이어서 일본 정부는 옛 번의 채무 및 무사 봉록(封祿) 등을 떠안으며, 1876년 다이묘와 공경(公卿) 및 무사들의 봉록을 정리하는 대신 일시금(一時金)으로 금록공채(金祿公債)를 지급하였다(질록처분). 이 시점에서 막번체제의 기반이 실질적으로 해체되었고, 다음의 경제·사회 정책이 맞물려 이루어졌다.

먼저 일본 정부는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까지 세입은 대부분 농민으로부터 걷는 세금이었기에 한 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크게 달라져 불안정하였다. 이에 정부는 공조를 부담하는 이를 토지 소유자로 인정하고, 지가(地價)를 기입한 지권(地券)을 발행하였다. 그리고 지가의 3%를 조세로 납입하도록 하였다(지조개정). 일정한 세율의 조세를 화폐로 납부하게 함으로써 세입을 안정시킨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 안정과 통합을 위해 정부는 국민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민평등(四民平等)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황족(皇族), 화족(華族), 사족(士族), 평민 간 신분 차별이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1872년 정부는 신분에 상관없이 직업과 거주 등의 자유를 보장했으며, 학제(學制)를 발포하고 국민의 의무교육을 제정하였다. 이듬해에는 국민개병(國民皆兵)의 이념에 근거해 징병령을 발포하였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주도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자립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의 정책들을 실행하는 동시에, 문명과 개화의 기치를 내걸고 사회 전반의 제도를 바꾸었다. 그것은 서양화를 목표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걸친 급진적 변화에 각계각층의 불만과 저항도 있었다. 서민들은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 등이 오히려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징병령 등 사민평등 정책으로 신분적 우위를 상실하고, 경제적으로 열세에 몰린 사족의 불만도 상당하였다.

특히 1876년 일본 정부가 대례복을 착용하거나 군인 및 경찰인 경우를 제외하고, 평소 칼을 착용하지 않도록 하였다(폐도령). 이에 사족은 무사의 아이덴티티를 빼앗긴 것으로 여기고 크게 반발하였고, 서일본에서는 반정부 성향의 사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내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구심점으로 하는 사쓰마 출신 사족이 중심이 되어 대규모 내전을 일으켰다(西南戰爭). 일본 정부는 어렵게 내전을 진압하였고, 사족 반란은 종결되었다.

5 헌법 공포와 근대 천황제 국가의 성립

사실 반정부 성향의 사족이 형성된 배경에 1873년 조선과의 외교 문제로 촉발된 정부 내 갈등이 있었다. 그때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이 하야하였다(정한론 정변). 에토와 사이고 등이 사족 반란에 참가한 반면, 이타가키 등은 조슈번과 사쓰마번 출신이 장악한 정부를 번벌(藩閥)이라고 비판하며 선거에 의한 민선의원(民選議員) 개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1880년 국회기성동맹(國會期成同盟)을 조직하고 헌법 초안을 제시하였다. 이후 자유민권(自由民權)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일본 정부는 집회조례(集會條例) 등으로 언론을 통제했지만, 헌법 제정의 필요성은 인식하였다. 현실적으로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불평등 조약의 개정이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근대국가로서 체제를 확립해야 했다. 이에 1881년 정부는 10년 후 국회 개설을 약속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헌법 연구를 위해 유럽으로 향하였다. 그는 귀국 후 프로이센(독일) 계통의 헌법에 기초해 일본의 실태를 반영한 헌법 초안을 준비하였고, 법안은 수년간 추밀원(樞密院)에서 수정되었다.

마침내 1889년 흠정(欽定)의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되었다. 헌법에 따르면 신성불가침의 천황이 주권을 가지고 절대 권한을 행사한다. 통치권을 총람하고, 군대 통수권과 내각 임면권을 가진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입헌군주제의 근대 국가가 확립된 것이다. 제한적이지만 헌법이 규정하는 범위에 한해 종교, 직업, 언론 등의 자유라는 국민의 권리도 인정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제국의회가 개설되었다.

일본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정부 주도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해 성과를 거두었고, 주변 국가들은 메이지 유신에 주목하였다. 김옥균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도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94년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해 타이완이라는 식민지를 영유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고,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세계에 알렸다. 서구 제국은 일본 근대화의 성공에 놀라워했고, 아시아 국가들은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개혁을 시도하였다. 대표적으로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청이 변법 운동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후 일본은 천황대권(天皇大權)의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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