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무오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

육탄혈전(肉彈血戰)하여 독립을 완성하자!

1919년

무오독립선언서 대표 이미지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는 중국 길림(吉林)에서 대한독립의군부의 주도하에 발표된 선언서이다. 논란이 있지만 1919년 3월 11일에 발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이다. 많은 경우 1918년 12월, 즉 무오년에 발표된 것으로 생각되어 ‘무오독립선언서’라고 불리게 되었고, 1919년 3·1 독립선언서보다 앞서 발표된 선언서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1919년 3월 1일 이후에 발표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작성자는 조소앙이었으며, 김교헌, 김규식, 김좌진, 이승만 박은식, 안창호 등 총 39명의 명의로 발표되었다. 일제강점기 만주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주체가 되어 발표된 선언서이며, 무장투쟁을 독립운동의 방향으로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2 『지산외유일지』를 통해 본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 과정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의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이다. 작성 시점이 3·1 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인 1918년 무오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무오독립선언서’라고 지칭되어 왔다. 하지만 선언서 작성 시점이 무오년이 아니며, 선언서에 ‘대한독립선언서’라고 명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오독립선언서라고 부르기보다 ‘대한독립선언서’라고 칭하는 것이 올바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는 ‘무오독립선언서’라는 이름으로 서술한다.

무오독립선언서는 만주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의군부 명의로 발표되었다. 이 선언서를 작성한 사람은 조소앙(趙素昻)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오독립선언서가 작성되는 과정은 정원택(鄭元澤)이 작성한 『지산외유일지(志山外遊一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정원택은 1912년 중국 상해로 망명한 이래,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1918년 음력 12월 20일 중국 봉천(奉天)에 있던 정원택은 당시 상해에 거주하고 있던 신규식(申圭植)으로부터 편지 1통을 받았다. 편지에는 “유럽의 전쟁이 종식되었고,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민족자결을 제창하여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열게 되었다. 약소민족이 궐기할 시기”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상해에 있는 독립 운동가들이 미주와 국내를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하고, 파리에 특사를 보낼 계획 중인데 서간도와 북간도에 연락을 하지 못했으니 그 역할을 정원택이 맡아 달라”는 부탁의 말도 기재되어 있었다. 편지를 받은 지 이틀 후인 12월 22일 정원택은 길림(吉林)으로 가서 박찬익(朴贊翊), 조소앙, 여준( 呂準) 등을 차례로 만났고 신규식이 보낸 편지에 담긴 내용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1919년 음력 1월 27일 여준(呂準)의 집에서 대한독립의군부가 조직되었다. 다음날인 28일 각 대한독립의군부의 부서가 정해졌으며, 피리강화회의의 개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상해에 길림 대표를 파견하고 구미, 서북간도, 러시아령 등에 이에 대해서 신속하게 연락을 취할 것, 자금모집을 위하여 국내에 인원을 파견한다는 것 등이 결정되었다.

대한독립의군부 지도부는 1919년 음력 2월 1일 ‘독립선언서’ 작성을 조소앙에게 부탁하였으며, 조소앙은 그의 동생 조용주와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이후 대한독립의군부는 1919년 음력 2월 10일(양력 3월 11일) 무오독립선언서 4천부를 석판으로 인쇄하여 서북간도와 러시아령, 구미각국, 북경 및 상해, 국내, 일본에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3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 시점

무오독립선언서의 내용 말미에는 ‘단군기원(檀君紀元) 4252년 2월’이라는 발표시기가 적혀있다. 많은 연구들에서는 이것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919년 2월이며, 음력으로 환산하면 1918년 12월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18년은 무오년(戊午年)인데, 이것은 ‘대한독립선언서’를 통상적으로 ‘무오독립선언서’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1918년 12월에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에 발표된 3·1 독립선언서보다 앞서 발표된 것이고, ‘독립운동사상 최초로 작성되고 발표된 독립선언서’라는 평가도 이어졌다.

하지만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된 1919년 2월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1918년 12월이 아니라 1919년 1월이다. 따라서 무오독립선언서라는 이름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한 실제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것은 3·1 운동 이후였다. 조소앙은 “1919년 정월, 선언서의 초안을 서두르게 되었다”라고 하였고, 『지산외유일지』에는 “3월 11일에 선언서를 인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지산외유일지』의 저자 정원택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다음날 조소앙이 선언서를 기초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무오독립선언은 무오년인 1918년에 발표된 선언서가 아니었으며, 1919년 3월 1일 이후에 발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4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들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사들은 총 39명이었다.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여준, 유동열, 이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봉우, 이상룡, 이세영, 이승만, 이시영, 이종탁, 이탁, 문창범, 박성태, 박용만, 박은식 박찬익, 손일민, 신정, 신채호, 안정근, 안창호, 임방, 윤세복, 조용은, 조욱, 정재관, 최병학, 한흥, 허혁, 황상규

무오독립선언서 서명자들을 살펴보면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조소앙, 이동녕(李東寧), 김학만(金學萬), 문창범(文昌範) 등과 같은 인물뿐만 아니라, 상해 등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신규식, 미주와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이승만, 박용만(朴容萬), 안창호(安昌浩) 등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오독립선언서의 서명자는 해외 각지의 저명한 민족 운동가들이 망라된 것이었다.

서명자들의 소속단체는 재만 대종교, 동제사, 신흥무관학교, 국민교육회, 대한광복회, 재려 한족회, 재미 국민회 등 당시 주요 민족운동단체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대종교인들이 서명자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교헌, 윤세복, 이동녕 등 무오독립선어서 서명자 22명이 대종교에 속해 있었다.

5 무오독립선언서의 내용

무오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무오독립선언서의 첫 부분에서 우리 민족은 “대한민주국으로 자립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우리 대한은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것이었고, 이민족의 것이 아니었다”라고 하여 한국의 주권과 영토는 한민족 고유의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둘째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악행을 지적하였다.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 한반도에서 저지른 악행은 숨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불법적인 방법으로 협약을 맺어서 한국인들을 멸망시키려는 간악한 행동을 자행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불법적인 행동을 한 일본은 “범 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실행한 동아시아의 적”이며, “사기강박과 불법무도와 무력폭행을 자행한 국제법규의 악마”라고 지적하였다. 최종적으로 일본은 “군경의 야만적 힘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고, 종교를 억압하고 핍박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하를 저지하고 장애한 인류의 적”이라고 강조하였다.

셋째 동양 3국의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가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는 아시아의 행복이며, 일본의 행복”이라고 강조했다.

넷째 강력한 어조로 독립을 완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2천만 형제자매들은 “국민본령(國民本領)이 독립임을 기억하고,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해 자립해야 하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라고 주장하였다.

6 무오독립선언서의 의의

무오독립선언서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10년에 발표된 성명회(聲明會)의 선언서, 1917년에 발표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 그리고 1919년에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는 인적, 지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성명회선언서에는 ‘한일병합’의 무효를 주장하고, 이에 저항하여 국외 한인들의 총궐기를 명시했다. 대동단결선언은 1914년 이후 1917년까지 독립운동을 결산하고 새로운 단계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시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세계정세, 국내에서 일어난 3·1 운동 소식에 대한 기민한 대응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무오독립선언서에서 독립전쟁에 대한 주장이 적극적으로 제기되었다. 무오독립선언서에서 주장하는 ‘육탄혈전’에 의한 독립전쟁은 1910년 이후 해외독립군기지건설 또는 해외독립군 근거지 사상으로 대변되는 계몽운동계열과 의병운동계열의 독립운동 방략이 통합되고 발전된 것이었다.

셋째 대동단결선언서에 제기된 주장이 승계되었고 더욱 발전되었다. 대동단결선언과 무오독립선언서는 모두 조소앙이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다. 이 두 선언서에 ‘한국병합’은 부당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주독립의 근거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대동단결선언에서 공론화된 공화주의 노선에 입각한 독립운동은 무오독립선언서에서 더욱 진전되어 ‘대한민주의 자립’을 명문화하기에 이르렀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