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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과 쌍벽을 이루는 전투

1920년

봉오동 전투 대표 이미지

봉오동전투 기념비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독립기념관)

1 간도 지역의 초기 반일 투쟁과 3·13반일시위

19세기 말 20세기 초, 오래전부터 조선을 병탐(倂貪)하려는 침략 야망을 가진 일제는 드디어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병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조선을 저희들의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이리하여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민족적 원한을 갖고 반일 구국 투쟁을 전개하던 조선의 의병장들과 반일 애국지사들, 그리고 대량의 파산된 조선 농민들이 만주지역으로 끊이지 않고 계속 건너오게 되었는데 통계에 의하면 1919년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 431,198명이었고 그중 간도지역에 조선족이 279,150명(간도인구 총수의 77%을 차지함)이나 되었다. 이에 간도의 조선족 집거지역을 중심으로 반일 지사들은 점차 반일 민족 독립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1910년 이전, 조선의 의병 항쟁은 일제를 내쫓고 이씨왕조를 회복하는 것을 주요목표로 한 반일 무장 투쟁이었는데 비해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지역에서의 반일 민족 독립 운동은 비록 전날 조선 국내의 의병 항쟁이 국외에 연속이기는 하나 의병 항쟁과는 성질과 내용상에서 부동한 한 차례의 운동이었다. 또한 우선 조선이 일제에게 완전히 병탐되어 독립을 철저히 상실한 조선에서 국외의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지역을 근거지로 전개한 특수한 형태의 반일 민족 독립 운동이었고 또 무력 항쟁을 중심에 놓지 않고 조선족 거주지에 신식 학교를 건립하고 근대 학교 교육을 실시하며 반일 단체를 조직하고 근대적 민족의식과 반일 사상으로 조선족 인민 군중들을 교육하고 단결시킴으로써 이후의 규모가 더욱 큰 반일 민족 독립 투쟁을 위하여 준비를 하는데 착수하였던 것이다.

1910년 전후에 조선의 허다한 애국 계몽 활동가, 종교인사, 지식인들은 망국의 비분을 안고 간도를 중심으로 한 조선족 집거지구에 와서 조선 국내에서 배일 신교육 보급운동의 ‘3천리 강산의 매 일리에 하나의 교회와 하나의 학교를 세워 3천 개의 학교와 교회가 있게 되는 날이 곧 독립이 성공하는 날이다.’란 정신을 계승하여 전력을 기울여 신식 학교와 서당을 꾸렸다. 간도에서 애국지사 이상설이 1906년에 선참으로 서전의숙을 창립한 뒤를 이어 반일 애국지사들과 조선족 군중들은 짧은 시간 내에 수많은 신식 사립학교와 신식 서당을 꾸렸는데 당시 조선 주재 헌병 사령부의 통계에 근거하더라도 1912년 3월까지 간도지구에 40여개 학교가 있었고 1916년 12월에는 161개의 학교에 4,094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120여소의 천주교 예수교 교회당이 있었다. 위의 통계에서 보다시피 간도의 조선족 집거지의 매 향촌마다 한 개의 학교나 서당을 세운 셈이었는데 절대 대부분이 순수한 반일 학교나 서당이었다. 이 시기 간도에서 근대 학교 교육 운동을 지도한 중심 인물은 이상설, 김약연, 이동녕, 여준, 서일, 안무 등 명망이 높은 허다한 반일 지사였다. 그들은 각기 학교의 설립자이고 교장이고 교원으로서 비단 국외 즉 간도지역의 반일 민족 독립 운동의 선구자이고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역시 반일 민족 독립 투쟁의 전사이고 골간이며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학교에서 근대 과학 지식을 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민족정신으로 조선족 민중을 교육하여 그들의 민족정신을 환기시키고 그들의 항일 의식을 제고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반일 투쟁에 투신하게 함으로써 민족 해방과 조선 독립을 위하여 일제와 투쟁을 진행한 후비역량을 배양하는데 모를 박았다. 이러한 반일 애국 교육 운동에 대해 일제도 ‘간도의 교육과 민족주의 정치 운동이 서로 혼합되는데 그 책원지는 바로 학교이며’, ‘간도 각지에 분산된 배일적인 학교가 상당히 성행하고 있다’고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각지 학교에서는 수많은 반일 투사들을 배양하였고 조선족 민중의 반일 의식을 크게 제고시켰으므로 학교인 즉 곧 문무 겸비한 반일 투쟁의 후비군을 양성하는 요람이었고 반일 사상의 훈련 기지였으며 독립 활동가들의 집회 장소로 되었다.

반일 독립 활동가들은 반일 독립을 목적으로 허다한 공개적이거나 비밀적인 반일 단체들을 조직하였는데 간도지역에서는 이동춘이 처음 ‘간민교육회’를 건립하면서부터 서일 장군이 ‘중광단’, 이동휘가 ‘간도국민회’, 김약연이 ‘간민회’를 건립하였고 조선족 청년들도 ‘청년친목회’, ‘대동협심회’등 수많은 반일 비밀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당시 34개의 반일 단체가 있었다. 이러한 허다한 단체들에서는 회장(會章)을 제정하고 각지에 지부회를 분설하였으며 간도의 조선족 민중들을 단결하고 반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경제생활의 제고를 모색하고 실업을 발전시키면서 반일 민족 독립 운동을 진행하였다. 이와 아울러 상술한 단체들에서는 의병 항쟁의 전통을 계승하여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반일 민족 독립 무장 대오를 선후로 건립하였는데 이 무장 투쟁의 준비 사업은 학교 운동 중에서 표현이 십분 돌출하였다. 학교 교육에서 금후 반일 민족 독립 투쟁에 투신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기에 일반 학교에서도 군사 훈련이 있었지만 일부 반일 민족 독립 활동가들은 무관 학교를 꾸려 군사 전문 인재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이동휘가 꾸린 나자구무관학교에서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이들은 독립군 부대의 골간이 되었다. 이렇게 반일 지사들은 간도지역의 조선족 군중들을 동원하고 반일 단체와 학교 교육을 통하여 여러 반일 무장 대오를 건립 확대하였는데 대부분 군자금과 무기 장비는 러시아에서 들여왔고 일부는 간도지역의 조선족 군중들에 의거하여 해결하였다.

간도지역에서 반일 민족 독립 운동이 신속하고도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은 데는 당시 간도의 형세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일본 군국주의는 새롭게 대륙 정책을 고취하면서 1894년 우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고 7월에 청일 전쟁을 발동하여 만주의 요동반도를 점령하였으며 만주에서 권익을 위하여 1904년에는 러일 전쟁을 발동하고 이어 만주 남반부를 저희들의 세력 범위에 넣었다. 간도는 중․러․조 3국의 접경지대로서 그 군사지리적 위치나 정치경제적 지위에서나 중요한 의의가 있는 지구였다. 일제는 간도를 조선에서의 장기적인 식민 통치를 확보하는 요해지로 간주하고 ‘만약 간도를 점령하지 못하면 회령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공세를 취하여 북한으로부터 길림으로 진입하려면 우선 간도를 점령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간도지역을 만주 침략의 뒷문으로 삼고 간도를 침입할 음모를 다그쳐 획책하였다. 1907년 8월, 일본은 사이또 중좌가 인솔한 일본 침략군 선견대를 간도에 파견하여 ‘간도의 소속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에 간도 한민의 생명안전은 보호한다.’는 구실로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란 간판을 용정에다 걸었다. 이어 1909년 9월, 일제는 부패 무능한 청 정부를 핍박하여 ‘도문강중-조변무조항’ (일명 간도 협약)을 체결하고 연길, 훈춘, 배초구, 투도구, 용정을 일본의 상부지로 개방하게 하고 동시에 연변 조선족에 대한 영사 재판관을 취득하였으며 용정의 ‘조선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간도 일본 총영사관’으로 고치고 아래에 4개의 영사 분관과 18개의 지방에 경찰서를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일제는 간도에서도 조선 민중들에게 식민지 통치를 강요하였고 반동 군벌과 결탁하는 한편 친일 단체를 세우고 친일 주구들을 길러 간도의 조선족 반일 투쟁을 간섭하고 저애하고 탄압에 나섰다. 이에 반일 단체에서는 애국적 민중들을 조직하여 일제에 의한 ‘2중 망국노’로 된 비분을 안고 견결한 반항 투쟁을 전개하였다.

간도지구에서 장기적으로 온양되어(???????) 오던 대규모적인 반일 운동이 드디어 1919년 3월에 폭발되었다. 조선에서 일어난 거국적인 3·1 운동에 고무된 간도지역의 76%를 차지하는 조선족 반일 군중들은 ‘간도 한국 독립 운동 의사부’의 조직 지도하에 3월 13일 용정에서 반일 시위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일제는 연길 도윤(延吉道尹) 장세전에게 압력을 가하여 반일 민중 집회를 탄압하게 하자 장세전은 450명의 군경을 용정으로 파견하고 육군 제2혼성여단 보병 10단장(团长 : 연대장) 맹부적을 용정촌 군경 총지위관으로 임명하고 ‘중일 친선을 방해하는 행동’을 진압하게 하였다. 3월 13일. 용정촌 백리 안팎의 반일 군중들이 3만여 명이나 반동 군경들의 저애를 물리치고 집회 장소인 용정 천주교 교회당 앞 광장으로 집결하여 왔다. 정오를 알리는 예배당의 종소리가 울리자 군중들은 한 사람같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사람마다 태극기를 추켜들었다. 대회 집행 주석인 김영학이 각 반일 단체의 연합 명의로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한 시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표달하자!’고 호소하였다. 이어 대립자명동중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충렬대가 ‘조선독립’이라고 대서특필한 오장기(五丈旗)를 들고 시위 대열의 앞장에 서서 일본 영사관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일본 영사관 주위에 군경을 배치하고 대기하고 있던 맹부덕(孟富德)은 드디어 사격 명령을 내려 공덕흡(孔德洽)을 비롯한 시위 군중 13명이 당장에서 숨지고 30여명이 중상과 경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6명은 그날로 숨지고 말았다. 이렇게 3·13시위는 일제와 반동 군경의 피비린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날 시위를 이어 간도와 남만, 북만 등지에서 4월까지 계속 시위 활동을 전개하여 반일 군중 운동은 고조되었으며 그 규모와 시간상에서 전례가 없었던 것이다. 각지의 반일 시위는 일제 경찰과 만주 반동 군경들의 무참한 탄압을 받았지만 일본 침략자들의 침략 기염을 꺽어 놓았으며 반일 애국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렇게 3·13시위를 계기로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반 만주지역의 반일 인사들은 신속히 조선 반일 독립 무장 부대를 건립하고 장성시켜 1920년대의 반일 무장 투쟁의 고조를 이룩하게 되었다.

2 독립 무장 부대들의 첫 협동 작전 : 봉오동 전투

3·13시위 후 각지의 반일 애국 단체에서는 전날 반일 무장 대오 건설을 다그쳐 온 기초 위에서 신속히 수많은 무장 대오를 건립하고 그 역량을 키워나갔다. 이에 반일 단체들은 조선족 민중 속에 뿌리를 튼튼히 박고 군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입하고 반일 부대 성원들을 훈련시켰다. 민족 독립의 희망을 반일 무장 대오에 둔 광범한 반일 군중들은 생활난에 허덕였지만 가축, 식량, 나무를 팔아 자금을 지원하였고 초신과 엽총을 가져왔으며 어떤 반일 인사들은 가산을 팔아버리고 가정 전체를 데리고 반일 대오에 참가하였다. 또 여러 반일 단체에서는 계속하여 민간의 무기를 수집하고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 관부와 친일 부호들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활동 자금을 보충하였다. 1920년 1월 용정의 반일 애국지사 윤준희 등 6명 청년들은 조선은행 용정분점이 조선 회령에서 거액의 돈을 실어온다는 정보를 받고 3일 저녁 동량구 선바위 밑에 매복하여 있다가 돌연 습격하여 일본 군경과 그 일행 5명을 소탕한 후 15만원의 현금을 탈취하고 가까운 러시아로 건너가 체크 부대의 수중에서 무기를 구입하려 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영용하게 희생되었다. 일년 남짓한 발전을 거쳐 1920년 중반에 간도의 반일 무장 대오는 상당한 규모와 장비를 갖춘 무력 단체로 장성하였는데 비교적 강한 무장 부대가 7개, 전투대원이 2900여명, 보총 2600여 자루, 권총 500여 자루, 기관총 5정이 있었다. 그중 의란구에 본부를 둔 안무 장군의 국민회 대오가 400여명에 보총 450여자루, 본부를 왕청현 시대파에 둔 서일 장군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가 600여명에 보총 500여자루, 권총 150여자루 ,기관총 3정, 왕청현 대감자에 본부를 둔 광복단 부대가 300여명에 보총 150자루 권총 200여 자루, 왕청현 삼가구에 본부를 둔 의군단 부대가 300여명에 보총 400여 자루, 권총 50여 자루, 유명한 의병장 홍범도의 독립군 부대가 300여명에 보총 300여 자루, 권총 30여 자루, 왕청현 봉오동에 근거지를 둔 최명록, 박영의 군도독부 부대가 300여명에 보총 260자루 ,권총 50여자루, 기관총 2정, 왕청현 석현에 본부를 둔 신민단 부대가 200여명에 보총 160여자루, 권총 30자루로 장비되였었다. 이외에도 안도현의 정의군정사, 훈춘현의 청년단 등 여러 개의 소규모적인 무장 대오들이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리하여 무장 대오들은 경신년에 들어서면서 분산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의 군경과 친일 주구들을 처단하고 도문강 남안 조선의 일제 군경을 습격하였다. 통계에 위하면 1920년 한 해에만 각지의 반일 독립 무장 대오는 중조 변경지대에서 무려 1651번에 이르는 무장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3월 한 달에 두만강 연안에서 8차례나 조선의 일제 군경 보초소를 습격하였다.

반일 독립 무장 대오의 급속한 장성과 침중한 타격에 경황실색한 일제는 반일 무장 투쟁을 압살하려고 광분하였다. 1920년 봄, 일본 정부는 만주지역의 조선 반일 투쟁을 엄격히 단속할 것을 북경 정부에 강요하는 한편 봉계 군벌과 더욱 결탁하여 수차 반일 무장 대오의 근거지를 소탕하고 반일 군중들은 대거 체포하여 갖은 혹형을 다 가하고 마구 학살하였다. 이에 대처하고자 1920년 5월 11일 심민당, 군정서, 군무도독부, 광복단, 의군단, 국민회 등 6개 반일 부대는 봉오동에 집결하여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최명로, 홍범도가 지휘하기로 하였다.

봉오동은 가야하의 하류에 위치하였는데 서쪽은 연길, 남쪽은 도문강 건너편의 함경북도 6진과 마주하였고 동서북 3면이 산에 둘러싸여 있었다. 봉오동전투는 6월 4일 신민당의 한개 소대가 후꾸가와 산다로 보초장이 지키는 조선의 국경 보초소를 습격한 데로부터 시작하여 된 삼툰자 전투, 후안산 전투, 봉오골 전투, 피파정 전투 등 4차례의 전투를 일컫는다. 6월 4일 저녁, 조선 독립군 부대는 보복 ‘토벌’을 오는 남양 수비대 아라요시가 끌고 온 한 개 중대의 병력을 삼툰자에서 매복 습격하여 패주시켰고 6월 6일 후안산에서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한 19사단의 한 개 대대 병력을 반격하여 적군 120여명을 섬멸한 후 6월 7일 봉오골에서 일군을 포위 공격하여 물리치고 6월 8일에 삼림 속으로 이동하였다. 봉오골 전투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는 230여명의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 150여명을 섬멸하고 수십 명을 부상시켰으며 보총 60여 자루와 기관 총 3정을 노획하였다. 봉오동 전투 승리의 소식은 곧 『길장일보(吉長日報)』와 『독립신문』을 통하여 국내외에 전파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여러 반일 독립 무장 부대가 처음으로 연합 작전한 전투로서 그 승리는 간도에서 반일 독립 부대를 섬멸하려는 일제에게 타격을 주었고 단합된 반일 무장 부대의 위력을 과시하였으며 각지의 반일 무장 대오와 반일 군중들의 반일 독립 구국의 사기를 고무하였고 대규모적인 반일 무장 투쟁에 경험을 제공하여 주었다.

3 음모 획책한 훈춘(琿春)사건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 일제는 간도지구의 조선 반일 독립군 부대의 신속한 발전과 그 강대한 전투력에 크게 놀랐으며, 일본 영사관 산하의 무장 경찰과 소수의 부대로는 날로 장대해지는 반일 독립군 부대를 대처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되어 조선 반일 독립 무장을 ‘토벌’할 계획을 음모 획책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두만강의 소유 나루터를 봉쇄하고 회령에서 삼봉까지의 민간 철로 운수를 모두 정지시키고 6월 7일부터 12일까지 3천여 명의 육군을 두만강 변경 요지인 종성, 동관, 창수, 삼봉 등지로 수송하고 수시로 국경을 넘어 ‘토벌’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일제는 북경 군벌 정부와 반주 봉계 군벌과 더욱 긴밀히 결탁하여 조선 반일 독립 투쟁을 진압하려고 하였는데 중국의 반동 군벌들은 일제의 압력에 의해 일제의 ‘토벌’을 묵인하고 협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6월 20일 연길 도윤은 각현 지사들을 모아놓고 조선 반일 독립 무장을 단속할 데 대한 문제를 상의하였다. 7월, 봉천 주재 일본 고문 사이또는 봉계 군벌 두목 장작림과 밀담하였는데 사이또는 ‘중국의 소분대와 일본의 대부대가 협력하여 토벌하되 표면상으로는 중국측이 주동이 되어야 한다’.고 제기하니 장작림은 ‘일본군의 출병을 묵인한 이상 대책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특히 주의할 바는 내가 출병을 허락했다는 것을 공개하지 말 것이다. 북경정부도, 성장도, 지방 관리도, 인민들도 다 모르게 하고 일본 측에서만 비밀리에 양해하고 실행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렇게 일제가 만주 군벌을 위협 농락하고 그들과 비밀 결탁을 하였기에 길림성 당국에서는 일본군이 출병하여 조선 반일 독립 부대를 단속하는 것은 ‘주권에 유관되는 중대한 문제’라고 인정하고 단연코 거절했지만 병력을 출동하여 ‘토벌’할 수는 있다고 회답하였다. 그러나 연길 진수사에 소속된 병사들과 지방순경들은 조선 반일 부대를 동정하고 그들과의 교전을 꺼려하였기에 사전에 ‘토벌’ 갈 곳의 반일 독립 무장 대오들과 연계를 취하고 ‘대부대가 곧 토벌하러 올 것이니 깊은 산속으로 숨는 것이 좋겠다.’고 알려 주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간도 각지의 반일 부대들은 선후하여 안도, 화룡 방면으로 안전하게 전이하였다.

조선 주재 일본 군사령부는 8월에 간도지구의 반일 무장 대오를 일거에 소멸할 간도 출병 계획을 상세히 작성하였다. 이에 동원할 병력은 라남 19사단의 제37, 제38사단을 주력으로 하고 시베리아에서 철퇴하는 일본군 제11, 제13, 제 14사단 동북에 원래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그리고 간도 일본 총영사관 산하 군경, 도합 25000여명이었다. ‘토벌’의 중심은 간도지역이었는데 간도를 크게 훈춘-왕청, 연길-화룡 두개 큰 포위 ‘토벌’ 구역으로 나누고 ‘토벌’의 중점을 훈춘, 왕청 용정, 도문강 연안 등 4개 곳에 두었다. ‘토벌’의 대상은 반일 단체와 반일 독립 무장 대오였으며 그리고 반일 투쟁을 지지 성원하여 주는 조선족 반일 군중들과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집거 마을이었다. 그리고 ‘토벌’의 정책은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는 ‘삼광정책(三光政策)’이었다.

출병 계획을 상세히 작성한 일제는 저희들의 출병 요구를 공공연히 중국 정부에 제기했으나 중국 정부의 엄정한 거절을 받게 되고 몇 번이나 외교 도경을 통해 교섭했어도 협의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출병 구실을 만들기 위해 비열하게 훈춘사건을 조작해 내었다. 1920년 9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만주지역에서 이름난 마적 두목이며 살인 악마인 장강호를 매수하고 그에게 금전과 무기를 보내주며 훈춘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9월 12일, 장강호는 마적 3, 4백 명을 네 패로 나누어 훈춘현성을 포위공격하고 변방 초소에 불을 지른 후 관은전호 등 지방 관청에 쳐들어가 재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는데 이번 습격에서 비적들은 일본 상부지내의 가옥 2백여 채를 불사르고 1,500만조(弔)에 달하는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조선족을 위수로 한 무고한 군중 90여명을 납치해 갔다. 이것이 바로 제1차 훈춘사건이었다.

9월 30일, 일제에게 매수된 마적 두목 진동은 훈춘 황구에 주둔한 군경을 습격하고 탄약 일부와 20여명의 병사들을 나포해 갔다. 10월 2일 새벽 4시에 장강호와 진동이 거느린 4백여 명 비적들은 동서 두 길로 나누어 또 다시 훈춘현성을 습격하였는데 입성한 비적들은 일본 영사관과 일본인 상점 6개에 불을 지르고 현금 12만원을 약탈하였으며 일본인 11명과 조선 사람 6명을 살해하였다. 4시간이나 훈춘현성에서 행패를 부리던 비적들은 아침 8시가 되어서야 2백여 명 백성들을 납치하여 가지고 철퇴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2차 훈춘사건이었다. 이 두 차례의 이른바 ‘훈춘사건’이란 곧 일제가 마적과 결탁하여 계획적으로 조작해 낸 비열한 음모 사건으로서 저희들의 강도적 출병을 정당화하려는 저열한 수법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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