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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나로드 운동

‘민중 속으로’ 들어가려 한 계몽운동

1931년 ~ 1934년

브나로드 운동 대표 이미지

1932년 학생 여름 브나로드 운동 포스터

동아일보

1 개요

브나로드 운동은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총 4회에 걸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가 주도한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이다. 1회부터 3회까지는 브나로드 운동으로 불렀으며, 4회 때는 계몽운동이라고 불렀다. 대중의 실력양성과 민족운동의 장래를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기획되었다. 또한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의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이기도 했다. 국내 13개도와 만주·일본·중국 등 국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총 1,547건의 강습이 이루어졌다. 4천여 명이 운동에 참여하였고, 8만여 명이 강습을 들었다.

2 운동의 배경: 문맹을 해결해야 한다!

브나로드(в народ)는 19세기 후반 제정(帝政)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계몽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농민·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이들의 혁명 정신을 일깨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나로드니키(народники)라고 불렸던 이들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자(хождение в народ)’는 슬로건을 내세웠으며, 브나로드는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일찍이 동아일보는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다만 동아일보는 조선과 러시아는 사정이 다르다고 인식했다. 이 때문에 브나로드 운동은 대체로 문자 보급 운동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했다.

브나로드 운동의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민족주의 세력의 현실 인식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은 1930년대 초반을 민족의 역량 부족과 일제의 통치력 강화가 맞물린 시기로 보았다. 예를 들어 송진우(宋鎭禹)는 신간회(新幹會) 해소의 가장 큰 원인으로 “내재적 역량의 부족도 부족이지만은 외압의 심한 것이 큰 원인”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들은 대중이 더이상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에 호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통치체제가 안정되고 대중의 혁명적 정서가 쇠퇴하였다고 본 민족주의 세력은 급진적인 운동 이외의 다른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실 인식 속에서 동아일보는 당시의 사회적 화두인 문맹(文盲)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민족주의 운동의 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사회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천도교, 기독교 등의 종교단체, 그리고 학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동아일보 역시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였다. 동아일보는 문맹 퇴치를 “독서의 능력과 간이한 숫자 지식을 넣어주는 것” 그리고 “생산 및 소비의 각종 협동조합 운동”으로 구별하면서 전자를 브나로드 운동으로 구체화하였다. 이로써 동아일보는 “다시 새로운 운동을 논할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이 운동은 당시 동아일보가 처한 경제적 위기와도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동아일보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역시 문맹이 적어지면 신문 독자가 증가할 것이라는 상업적 계산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미 조선일보가 1929년부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표어 아래에 문자보급운동을 수행하던 상황에서 동아일보도 브나로드 운동의 당위성을 강화하였다. 실제 동아일보의 판매 수익률은 브나로드 운동을 기점으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난다.

3 운동의 양상: ‘타협적’ 대중계몽운동

브나로드 운동은 기본적으로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았다. 지식인들은 스스로 ‘민중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예를 들어 이광수(李光洙)는 ‘지식인이 농민, 노동자를 계몽할 때 민족운동의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이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부합하는 운동임을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청년들의 고양된 열정을 계몽으로 인도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계몽운동이 아니면 청년들은 비밀운동, 지하운동에서 그 분화구를 찾고야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 시기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이광수는 「실지운동에 다섯 가지 주의」라는 운동의 강령을 제시하면서 “당국의 허가”를 필수 조건으로 내세웠다. 브나로드 운동의 타협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은 후일 운동의 내부 한계로 작동하게 된다.

브나로드 운동에는 기독교와 천도교 등의 종교단체와 지역유지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였다. 그중에서도 학생은 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참여세력이었다. 당시 학생은 1926년의 6·10 만세운동과 1929년~1930년의 광주학생운동을 통해 맹휴(盟休, 동맹 휴교), 시위, 비밀 독서회, 반제동맹(反帝同盟) 등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브나로드 운동은 민족적·사회적 상황을 각성시키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각 지역에 학우회(學友會)를 결성하여 활발히 운동에 참여하였다. 1931년 함경남도 안변군에서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한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학생 강치봉(姜致奉)은 브나로드 운동을 “조선의 르네상스 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당시 송진우의 말을 빌리면, 동아일보는 “노인, 유아, 사회적 활동을 기대할 수 없는 벽촌의 부녀”들을 제외하고, 조선인 문맹의 숫자를 800만 명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이들 전부에게 문자가 완전히 보급되어 운동이 완성되는 기간을 “10년 이내”로 예상하였다. 동아일보는 계몽대(啓蒙隊), 별동대(別動隊), 강연대(講演隊), 기자대(記者隊) 등의 조직을 창설하고, 본사-지국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운동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각지에 파견된 계몽대원들은 매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7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를 운동의 시행기간으로 삼았다. 이 기간 계몽대원들은 지역 내 문맹을 모아 강습을 개최하였다. 계몽대원들은 이윤재(李允宰)의 『한글공부』와 백남규(白南圭)의 『일용계수법』을 교재로 사용했다. 또한 체조와 창가, 동화와 같은 흥미 위주의 과목이나 위생, 수공과 같은 실생활에 유용한 과목도 강습하였다.

운동의 시행은 마냥 순탄하지 않았다. 운동의 타협적 성격과는 관계없이 당국의 감시는 항상 존재하였다. 게다가 방학 기간은 농번기(農繁期)와 매우 정확히 겹쳤기 때문에 일손을 빼앗긴다는 농민들의 불만도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경비 문제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운동의 시행주체였던 동아일보가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교재를 제공하는 것 외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으며, 당국의 단속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 때문에 운동은 지역 사회의 후원을 통해 진행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양자의 결합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브나로드 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까지 확산되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평안도 448건, 경기도 339건, 황해도 164건, 전라도 150건, 충청도 116건, 경상도 113건, 함경도 79건, 강원도 59건, 만주 53건, 일본 18건, 중국 5건 등, 총 1,547건의 강습회가 개최되었으며, 여기에는 모두 4,116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4년 동안 강습회를 들은 인원은 88,230명에 달하였다. 송진우는 운동 초창기의 폭발적인 사회적 반응에 힘입어 “우선 최근 3개년에 30만 명”의 문맹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바 있었지만,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4 운동의 종결: 민족주의 세력의 마지막 대중운동

조선총독부 경무국(警務局)에서 발간한 『최근의 조선치안상황(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을 보면, 1933년 현재 브나로드 운동의 참여자가 “항시 민족적 불온언사를 지껄였다”고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총독부는 브나로드 운동이 사회에 미칠지도 모를 불온한 영향력을 항상 경계하였다. 게다가 동시기에 이미 농촌진흥운동이라는 관제운동(官制運動)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브나로드 운동에 우호적일 필요가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브나로드 운동이 전개되던 4년 동안 총 194건의 강습회를 단속하였다. 1934년부터는 농촌진흥회의 활동 외에 모든 민간운동을 금지한다는 조치가 전국에 걸쳐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의 압력은 브나로드 운동의 태생적 문제들을 급격하게 드러나게 했다. 브나로드 운동의 주요 형태였던 강습회는 기본적으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국의 허가가 필수적이었다. 동아일보의 소극적 태도는 운동의 참여세력을 서서히 와해시켰다.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던 지역 유지들은 농촌진흥운동의 주체로 전환되었다. 농촌진흥운동에서 주관한 문자보급운동의 성과는 같은 시기 브나로드 운동에 앞섰다. 1934년 경기도에서는 5,943명의 강사가 3,900여 개의 강습소에서 73,676명에게 문자를 보급하였다. 이는 브나로드 운동의 4년 성과와 거의 맞먹는 수치였다. 결국 동아일보는 1935년 6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브나로드 운동의 종료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브나로드 운동 이후 민족주의 세력의 조직적인 대중운동은 더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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