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산미증식계획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전락한 식민지 조선

1920년 ~ 1945년

산미증식계획 대표 이미지

가마니가 노적되어 있는 군산항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산미증식계획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쌀을 증산하여 일본 내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는 목적을 세우고 시행한 정책이다. 1920년대 이후 총 3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제1차 계획’은 1920~1925년에 실시된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畵), ‘제2차 계획’은 1926~1934년에 실시된 ‘산미증식갱신계획(産米增殖更新計畵)’, ‘제3차 계획’은 1940~1945년에 실시된 ‘조선증미계획(朝鮮增米計畵)’이라고 한다. 이것을 총괄하여 일반적으로 ‘산미증식계획’이라고 부른다. 산미증식계획의 결과 식민지 조선의 농업생산 체제는 벼농사 위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으로 쌀의 반출이 늘어나면서 한국인의 쌀 소비량은 오히려 감소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한국인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또한 대지주들은 쌀 생산을 통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토지소유를 확장하는데 주력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은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2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된 이유는?

일제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세우고 실시하였다. 첫째 일본 국내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일본 정부의 국제수지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해갔다. 하지만 물가가 폭등하면서 일반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일본 정부는 1917년부터 1918년에 걸쳐 〈폭리단속령(暴利取締令)〉, 〈물가조정령(物價調停令)〉 등과 같은 법령을 발표하였고, 쌀 수출을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의 가격은 계속 폭등하였으며, 결국 1918년 8월 전국적으로 ‘쌀 소동’이 벌어졌다. 1890년대 이후 쌀 수입국이었던 일본에 저가의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 문제가 큰 사회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둘째 조선총독부는 기존에 세웠던 농업정책을 수정해서 실시해야 했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세웠던 농업정책은 계획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대규모 관개(灌漑)를 개선하고 토지 개간 및 간척사업을 진행하는 ‘토지개량사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셋째 1919년 3·1 운동 이후 식민지 지배에 동조하는 사회계층을 창출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지주층을 사회적, 경제적으로 일제의 정책을 앞장서서 수행하는 층으로 포섭하려고 하였다.

3 제1차 계획(1920~1925) : 산미증식계획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서 미곡을 생산하기 위한 ‘30년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내용은 관개(灌漑)개선, 개간, 개척, 지목 변환과 같은 ‘토지개량사업(土地改良事業)’과 시비(施肥)증대, 경종법(耕種法) 개선, 신품종 보급 등과 같은 ‘농사개량사업(農地改良事業)’으로 구분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두 사업을 1920년부터 15년간 1차적으로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것을 ‘제1차 계획’이라고 한다.

‘제1차 계획’의 목표는 ‘토지개량사업’과 ‘농사개량사업’을 통해 “약 900만 석의 미곡을 증산하고, 이 중 약 460만 석을 일본으로 반출(搬出)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토지개량사업’의 경우,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진행하기로 했던 면적의 59%인 9만 7,500정보를 달성하는 데 그쳤다. 또한 ‘농사개량사업’의 주요 내용이었던 경종법 개선, 시비 증가 등도 잘 이루어지 않았다. 그 결과 실제 수확량은 예상보다 훨씬 못 미치게 되었다.

한편 1921~1925년에 생산된 미곡 량은 연평균 1,453만 석이었다. 이것은 산미증식계획이 진행되기 전이었던 1920~1921년 연평균 생산량 1,370석보다 약 80만 석 정도 증가한 수치에 불과했다. 이에 반하여 일본으로 반출된 미곡은 연평균 174만석에서 369만석으로 약 200만석 정도 증가했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에서는 쌀이 이전에 비해 많이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제1차 계획’이 실패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토지소유수익’이 ‘토지개량에 의한 투자수익’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지주들은 고율의 소작료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토지를 개량하는 것보다 토지를 구입하는 것이 훨씬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다음으로 경제 불황에 따라 사업자금 조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토지개량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설립하려고 했던 특수회사도 원래계획과 다르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4 제2차 계획(1926~1934) : 산미증식갱신계획

조선총독부는 1926년부터 ‘제2차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것을 ‘산미증식갱신계획((産米增殖更新計畵)’이라고 한다. 이것은 총 12년에 걸쳐서 시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제2차 계획’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는 사업조달 자금 비중을 낮추고 정부알선 자금 비중을 높였다. 이와 동시에 지주들의 이자 부담도 경감시켰다. 그리고 사업을 대행할 기관으로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내에 ‘토지개량부(土地改良部)’를 설치했고, 1927년에는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朝鮮土地改良株式會社)를 만들었다.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 내에 ‘제2차 계획’을 추진하는 기관을 정비하고 확충했다. 1926년 조선총독부는 기존에 존재하던 ‘토지개량과(土地改良課)’ 외에 식산국(殖産局)에 ‘수리과(水利課)’와 ‘개간과(開墾課)’를 신설하였다. 1928년에는 토지개량과, 식산과, 개간과를 통합하여 ‘토지개량부(土地改良部)’를 만들었다. 토지개량부는 ‘산미증식갱신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여러 행정기관, 농회, 금융 조합 등을 동원하는 데 앞장섰다.

‘제2차 계획’ 시기에 진행된 ‘토지개량사업’의 실적은 전체적으로 좋지 않았다. 착수면적은 원래계획의 46%, 준공면적은 원래계획의 51%정도를 달성하는데 그쳤다. 시기적으로 보면 1920년대 후반의 실적은 좋았지만 1930년 초반에는 부진하였다. 농사개량사업’의 경우에는 자금 공급이 상대적으로 잘 이루어졌다. 농사개량사업을 위한 정부알선 자금의 융자실적은 1926~1929년 77%, 1930~1933년 75%, 1934~1937년 181%였다.

1930년대 들어가면서 조선총독부가 ‘산미증식갱신계획’을 실행하기가 어려워졌다. 그 이유는 먼저 1920년대 중반부터 일본 시장에서 쌀의 양이 넘치게 되는 문제가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1929년에 발생한 세계대공황과 연이어 발생한 농업공황으로 쌀의 가격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입된 미곡은 일본에서 생산된 쌀의 가격을 더욱 하락시키는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일본으로 들어오는 조선 쌀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그 일환으로 1932년 11월 미곡통제조사회(米穀統制調査會)를 설치하였고, 1933년 3월에는 「미곡통제법(米糓統制法)」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산미증식갱신계획’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31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개량부가 폐지되었고, 1932년에는 조선총독부 토지개량부가 폐지되었다. 최종적으로 일본 내 지주들의 조선 쌀 배척운동을 벌이면서, 1934년 ‘산미증식갱신계획’은 중단되게 되었다.

5 제3차 계획(1940~1945) : 조선증미계획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식량 확보가 중요시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농업상황은 좋지 않았다. 1939년 가뭄이 들었고 대규모 흉작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일본정부는 식민지 조선에서 생산하는 쌀을 활용하는 것에 주목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증미계획(朝鮮增米計畵)’을 세우고 시행하였다. 이것을 ‘제3차 계획’이라고 한다.

‘조선증미계획’은 크게 ‘경종법개선사업’과 ‘토지개량사업’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사업기간은 1940년 이후 6년간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경종법 개선을 통해 쌀 463만석, 토지개량을 통해 쌀 120만석을 증산 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발발하고 전쟁을 벌이는 지역이 확대되면서 일본의 식량사정은 점점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42년 ‘조선증미계획’은 개정되었다. 이것을 ‘개정증미계획’이라고 한다. 이 계획의 목표는 “1940년부터 12년간 토지개량에 의해 619만여 석, 경종법 개선에 518만여 석, 합계 1,138만 석을 증산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43년 ‘300정보 이상의 대 지구 관개개선사업’을 진행하고 ‘간척사업’을 시행하기 위한 기관으로 조선토지개발영단(朝鮮土地開發營團)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관개개선사업과 간척사업은 자재부족 인해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또한 전쟁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노동력과 자금이 부족하게 되었다. 결국 조선 ‘조선증미계획’은 계획된 데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6 산미증식계획의 결과는?

조선총독부가 진행한 산미증식계획이 식민지 조선에 끼친 영향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식민지 조선의 농업 생산구조가 왜곡되었다. 산미증식계획은 쌀을 증산한다는 목표아래 진행되었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의 농업구조는 ‘미곡 단작형(米穀單作形)’ 생산구조로 변하게 되었다. 쌀의 단작화가 진행되면서 농가의 자립성은 약화되었으며, 농민들의 경영은 더욱 불안정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실행한 쌀 중심의 증산정책은 조선후기 이래 성장하고 발달해온 밭작물 생산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재래의 전통적 농법을 무시하거나 유치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의 결과 미곡생산량은 증가하였지만 밭작물 생산량은 줄어들었다. 1912년부터 1941년 사이 면, 벼, 쌀보리, 밀 등은 단보 당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하지만 수수, 콩, 팥, 피 등과 같은 밭작물의 생산량은 크게 감소하였다.

산미증식계획으로 증가된 쌀 생산 비율보다 일본으로 반출된 비율이 더 컸다. 한국인의 쌀 소비량은 산미증식계획이 시행되기 이전보다 오히려 더 감소하였다. 1930년 쌀 생산량은 1920년에 비하여 약 250여석이 증가하였지만, 반출량은 약 430만 석이 늘어났다. 1인당 쌀 소비량은 1912년 0.77석, 1926년 0.53석, 1936년 0.38석으로 감소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부족한 쌀은 만주에서 수입된 잡곡과 베트남 쌀 등으로 보충되었지만, 식량의 절대적인 소비량은 줄어들었다. 결국 많은 한국인들의 생활수준이 어려워졌다.

셋째 지주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농사개량을 위해 조선총독부가 알선한 자금 대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지주, 자작농, 지주ㆍ자작농의 단체’로 제한되었다. ‘토지개량사업’ 자금은 농업회사나 수리조합을 대상으로 대출되었고 개별 농민은 제외되었다. 결국 농업금융혜택은 중규모 이상의 지주층으로 한정되었고, 소작농 및 소규모 토지소유자는 혜택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미곡시장의 확대는 지주층에게 더욱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반 농민은 생산의 대부분을 현장에서 중개상에게 팔았다. 이것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에 비하여 보통 약 34~38% 싼 가격이었다. 반면 지주들은 쌀을 현미, 정미로 가공한 후 판매하여 이익을 확대하였다. 한편 과중한 수리조합비는 중소지주와 자작농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중소지주와 자작농 층은 조합비를 견디지 못해 토지를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인 지주, 한국인 대지주들은 토지를 더욱 집적해 나갔다. 이와 함께 많은 지주들은 소작료를 증가시키고 각종 부담들을 소작농에게 부과하였고, 그 결과 많은 소작농민들은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산미증식계획은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협력하였던 일본인 지주 및 한국인 대지주들에게는 성장의 기회였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식량부족을 경험하게 되었다. 또한 지주들이 사업비를 전가하면서 소작농들의 부담은 더욱 커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