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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유일당 운동

정당 형태의 민족운동 총지도기관의 결성 노력과 좌절

미상

민족유일당 운동 대표 이미지

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의 개최지(호란진 한인소학교 터)

국외독립운동사적지(독립기념관)

1 개요

민족유일당 운동은 1920년대 중반 중국 관내와 만주 지역에서 전개된 정당 형태의 민족운동 총지도기관 결성 운동으로, 이념이 다른 여러 민족운동 단체들을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고자 한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일환이었다.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의 결성을 계기로 관내와 만주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나 결실을 이루지 못한 채 실패했다.

2 배경

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의 역할과 위상을 둘러싼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으로 뚜렷한 성과 없이 끝난 후 임정은 민족운동 총괄기구가 아닌 여러 독립운동 단체 중 하나로 그 위상이 약화되었다.

임정의 유명무실화와 민족운동 진영의 이념 분화에 따라 독립 역량의 통합 필요성과 민족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 ‘이당치국(以黨治國)’론에 입각한 민족유일당 조직론은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1924년 초 안창호(安昌浩), 여운형(呂運亨) 등은 ‘대동통일취지서’ 를 발표했고, 같은 해 7월 임시의정원에서는 독립당대표회의 소집을 제의했다. 또한 상해청년동맹회와 주의자동맹 등 사회주의 단체들도 민족협동전선 결성에 동의했다.

국제적으로도 당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는 이당치국론은 현실화되고 있었다. 1924년 1월 제1차 중국 국공합작의 성립으로 중국공산당원들이 중국국민당에 가입했고 이후 중국국민혁명운동은 급물살을 탔다. 또한 국공합작을 가능케 했던 코민테른의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협동전선론 역시 민족유일당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3 중국 관내 지역 민족유일당 운동

중국 관내 지역 민족유일당 운동은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의 조직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북경촉성회는 안창호와 원세훈(元世勳)이 중심이 되었다. 이후 1927년 3월 임정의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한국독립유일당상해촉성회를 결성했다. 이에 앞서 같은 달 임정에서는 제3차 개헌을 통해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정당이 완성될 때 최고 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제2조 단서)는 규정을 만들어 이당치국을 신임시약헌에 명문화했다. 의열단 역시 같은 해 5월 ‘독립당촉성운동에 대한 선언’의 발표를 통해 대독립당이 실현될 때 의열단의 해체를 약속했고 광동, 무한, 남경 등지에 촉성회를 조직해 의열단 단원들로 하여금 개인 자격으로 가입케 했다.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이하 관내연합회)는 그간 북경, 상하이, 광동, 무한, 남경에 조직된 촉성회 대표들을 망라해 민족유일당 출범을 위한 선언 과 강령을 발표했다. 본 강령은 “1. 본회는 한국의 유일한 독립당의 성립을 촉성하는 각지 촉성회조직주비회 성립에 노력한다, 2. 본회는 한국 독립에 필요한 전 민족적 일체 혁명 역량을 총집중함에 선구임을 기한다, 3. 본회는 우리의 실상과 세계 대세에 비추어 독립당 조직에 관한 계획을 연구 제공할 것을 도모한다”는 세 개 항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관내연합회는 바로 다음 해인 1928년부터 난항에 빠지게 되었고, 1929년 10월 상해촉성회의 해체로 민족유일당 운동은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외적으로는 중국 국공분열이 부정적 영향을 미쳤고 내적으로는 좌우 간의 불신과 대립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4 만주 지역 민족유일당 운동

1926년 10월 북경촉성회의 성립 이래 활성화된 민족유일당 운동은 관내 지역을 넘어 만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만주 지역 민족유일당 운동은 정의부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하 만주총국)이 중심이 되었다. 정의부는 1927년 초 회합을 통해 민족유일당 촉성을 결의했고, 만주총국도 같은 해 1월 열성자회의와 제1회 고려공산청년회 만주단체협의회에서 민족유일당 조직 방침을 결정했다.

이와 같은 노력은 1927년 4월 시사연구회로 결산되었다. 시사연구회는 정의부의 주도 아래 길림에서 개최된 제1회 각 단체 대표회의의 논의 결과 조직된 민족유일당 준비기관이었다. 위원으로는 정의부의 이탁(李鐸)과 최동욱(崔東旭), 신민부의 이일세(李一世), 만주총국의 박병희(朴炳熙)와 김응섭(金應燮)이 선출되었다.

이후 정의부는 1927년 8월 유일당을 촉성하고 참의부·신민부와의 연합을 도모하겠다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또한 같은 시기 만주 지역 사회주의 청년단체들도 남북청년단체협의회를 열고 통합을 모색했다. 이처럼 만주 지역 좌우익은 전체 민족운동의 통합을 위한 전제로서 각 계열별 통합을 실현하고자 했다.

시사연구회 역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27년 12월 시사연구회는 반석현(磐石縣)에서 남만혁명동지연석회의를 열어 1928년 3월 1일 촉성회 개최를 결의했다. 또한 재만 32개 단체 앞으로 촉성회에 참가할 대표 파견을 통지했다.

시사연구회 주관의 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의는 계획보다 약간 지연되어 1928년 5월 12일에서 26일까지 반석현과 화전현(樺甸縣)에서 개최되었고, 재만 18개 단체 대표 39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이 회합은 민족유일당 조직 방법상의 차이가 드러나면서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이하 ‘협의회 계열’) 측은 단체가입의 형식을 주장했던 반면,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이하 ‘촉성회 계열’) 측은 개인 본위의 조직 방식을 주장했다. ‘협의회 계열’은 정의부 다수파와 사회주의 분파 중 화요파가 중심이 되었고, ‘촉성회 계열’은 사회주의 분파 중 엠엘파(ML파)와 정의부의 소수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협의회 계열’의 단체 본위 조직론은 대부분의 민족운동가들이 기존 운동 단체와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를 떠나서 민족유일당의 조직이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한편 ‘촉성회 계열’의 개인 본위 조직론은 기존 운동 단체들은 소규모 단체, 즉 지도성과 대표성이 부족한 지역적·파벌적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식에 근거했다.

결과적으로 ‘촉성회 계열’이 탈퇴하면서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촉성회 계열’은 1928년 12월 혁신의회를 만들었고, 정의부 측은 1929년 신민부와 참의부의 일부 세력과 함께 국민부를 조직했다. 국민부의 조직과 함께 삼부는 해체되었다.

5 역사적 의의와 한계

민족유일당 운동은 임정의 유명무실화에 대응하여 정당 형태의 민족운동 총지도기관을 결성하고 독립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 국공분열, 민족운동 세력 간의 입장 차이 등 내외적 여러 요인으로 인해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실패했다고 해도 1920년대 후반 민족유일당 운동은 이후 정당 중심의 민족운동 전개의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즉 민족유일당 운동 실패 후 중국 관내와 만주 지역의 민족운동 세력은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정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민족유일당 운동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간의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좌와 우의 전선통일 시도는 1930·40년대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역사적 경험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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