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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곡령[防穀令]

식량주권 확보를 위한 ‘경제전쟁’

미상

1 개요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에 의해 개항된 이후 일본 상인들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조선에 진출하였고, 조선 쌀과 콩 등 곡물을 매집(買集)하면서 정작 조선 내에 곡물 부족 및 곡물가격 상승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에 지방관들을 중심으로 곡물의 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防穀令)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일본 측은 이에 반발하여 방곡령을 철회시키거나 조선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2 방곡령의 배경

방곡(防穀)이란 행정력을 이용하여 곡물의 유통을 차단하는 경제정책으로, 조선 고유의 용어이다. 즉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통한 근대적 개항 이전에도 존재했던 정책이었다. 개항 이전에는 주로 서울 등 도시지역으로 지나치게 곡물이 유출될 경우 각 지역 내에서 곡물가격 안정을 위해 곡물의 이동을 금지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개항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곡물 수출입이 허용되면서 일본 상인들은 합법적으로 조선에서 곡물을 매입하여 일본에 팔 수 있었다. 또한 조선의 개항은 불평등 조약에 기반해 있었기 때문에 곡물의 과도한 유출을 막을 수 있는 법제적 장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관세에 관한 조항도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상인들은 조선의 곡물을 일본으로 유출하는 데 큰 제약을 받지 않았다.

거의 유일한 제약은 외국 상인들은 개항장 밖 10리(약 4km) 이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 상인들은 주로 조선인 객주 및 중개상인들을 통해 조선 각지에서 모여온 곡물을 개항장 근방에서 매입하여 일본으로 운송하였다. 때문에 개항장 주변을 제외하면 기존의 조선 곡물 유통구조 및 상권은 대체로 유지될 수 있었지만, 국내에 공급할 수 있는 곡물의 양은 전체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 시기에도 방곡령이 발효된 사례는 존재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전과 같이 곡물수급구조가 급격히 변동될 경우 이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조선 미곡상들을 대상으로 내려진 것이 대다수였다. 일단은 일본 상인들의 과도한 곡물 유출을 막을 수 있는 법제적 장치가 없었고, 또한 개항장 이외의 지역에서 곡물을 매집하던 것은 조선인 상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합법적으로 일본 상인들이 과도한 곡물 유출을 막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 때는 1883년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부터였다. 이 조약은 제37관에 조선에서 가뭄과 홍수, 전쟁 등으로 인해 식량이 결핍될 경우 일시적으로 쌀 수출을 금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다만 1개월 전에 지방관이 일본영사관에 통지하여 미리 일본 상인들에게 일괄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지방관이 곡물 유통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하는 조항이기도 하였지만, 최소한 급격한 곡물유출을 막을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기존에 일본 상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제약도 사라졌다. 개항장 밖 10리까지로 활동 영역을 제한했던 것이 100리(40km)로 확장된 것이다. 이는 일본을 비롯한 외국 상인들이 더 넓은 곳에서 활동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일본 무역상들은 개항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진출하여 조선인 또는 일본인 상인들을 고용해 조선 방방곡곡에서 쌀 및 콩 등 곡물을 매입해 오도록 하였다. 기존에는 조선 상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곳들도 일본 상인들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전의 조선 곡물 유통구조에 일본 상인들이 침투하게 된 것이다.

일본 상인들은 이제 조선 상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도 쌀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봄에 어느 지역의 논밭에서 나는 수확물을 사들이기로 계약하고 그 해의 풍흉에 상관없이 계약한 만큼의 수확물을 가져가는 전대의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춘궁기에 계약해야 하는 농민들로서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기존에 조선 중개상인들을 매개로 거래했던 통로는 일본 상인들이 직접 진출하면서 축소되거나 사라졌다. 일본 상인들은 개항장에 지점이 있던 일본 은행들을 통해 대부받은 자금으로 상업활동을 하였는데, 조선의 선박을 고용하거나 직접 대형 선박을 동원하여 내륙 지방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평시에는 물론이고 흉작으로 지역 내 주민들의 삶에 필요한 곡물도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도 일본 상인들이 곡물을 매점하여 가는 경우가 많아지자 민심이 불안정하고 시정에 대한 불만이 쌓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지방관들은 이러한 상황을 막고 해당 지역의 곡물시장을 보호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방곡령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3 일본 상인의 침투에 따른 방곡령과 대표적 사례

일본 상인들이 조선 내륙까지 본격적으로 진출했던 1885년 무렵부터 방곡령은 전국적으로 수십 건에 달할 만큼 다수 발동되었다. 특히 일본 상인의 내륙 행상(行商)이 급증하는 시기는 방곡령 발생 빈도와 거의 일치한다. 이 시기의 방곡령 대상은 이전과 달리 대부분 일본 상인들이었다. 그 이전에 있었던 방곡령이 조선 상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것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즉 이 시기 방곡령의 궁극적 목적은 곡물이 일본으로 지나치게 유출되어 조선 내 지역의 곡물시장을 교란시키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상인 및 그에 고용된 사람들의 활동으로 기존 조선 상권이 크게 위협받고, 결국은 곡물가격을 상승시켜 도시빈민, 지역의 농업노동자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상황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1883년 〈조일통상장정〉으로 방곡시행권을 회복한 이후 최초의 공식적인 방곡령은 1884년 11월 함경도(咸鏡道) 원산(元山)지방에서 일어났다. 이전 해의 흉년 여파가 극심했던 데다, 개항 후 미곡의 해외 유출로 악영향이 심했기 때문에 지방관이 방곡령으로 대처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부산(釜山)을 비롯해 전국적인 수준에서 방곡령이 지방관 또는 정부에 의해 발포되는 사례가 발생했다. 그러나 방곡령은 애초의 조약 내용과 조선 정부의 의도처럼 순조롭지 않았다.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방곡령이 발포되었더라도 일본 측은 부당함을 내세우며 이를 반대해 결국 시행이 번번이 중지되었다. 또한 한발 등 기상상황에 따른 흉작을 방곡령의 주요 원인으로 제시하여도 이에 대해 일본 측이 자체적으로 조사하여 흉작의 여부를 판단하려 하는 등 방곡령을 시행하는 조선 정부의 주권을 무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 정부는 이러한 일본 측의 요구를 대체로 받아들이면서, 방곡령을 통해 지역의 곡물 상권 및 민심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무력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1883년 이후 방곡령은 전국에서 수십 차례에 걸쳐 발포되었지만, 그중 일본 측의 조선 정부에 대한 ‘손해배상’ 사건으로 전화된 것은 1889년~1890년 사이에 있었던 함경도 및 황해도(黃海道)에서의 방곡령 사건이었다.

첫 번째 방곡령 사건은 황해도에서 일어났다. 인천에 근거를 둔 무역상들은 이소베(磯部六造)와 이시가와(石川芳太郎)라는 일본인 상인을 고용하여 황해도 지방에서 4개월가량 곡물을 매집하도록 하고 이를 인천항으로 수송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침 1889년 5월, 황해도 관찰사였던 조병철(趙秉轍)이 방곡령을 발령하여 이를 운반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상인들은 빈손으로 인천에 돌아와 호소하였고, 일본 영사의 청구에 따라 당시 인천(仁川) 감리서(監理署)는 곡물 반출을 금지하지 말라는 관문(關文)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해도 측에서는 황해도에는 개항장이 없었을뿐더러, 방곡령의 반대급부였던 수입쌀 면세조치도 연장되어 있던 상태였으므로 곡물 반출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재차 일본 측은 조선 정부에 방곡령을 철회하고 압류된 곡물을 반환하도록 요구하였고, 결국 이것이 관철되었다. 이 사건에서 방곡령이 실제 효력이 있었던 기간은 약 20여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이시베와 이시가와를 고용했던 일본 무역상들은 이 기간 동안 큰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고 일본공사는 조선 정부에 이에 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게 된다.

한편 함경도는 원래부터 곡식이 풍부한 지역이 아니어서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곡물 유통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일본 상인들의 곡물 유출이 본격화되면서 타격을 받았던 지역이었다. 당시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은 1889년 10월부터 1년간 방곡령을 시행하고자 하였고, 조약에 따라 그 1개월 전에 통리아문(統理亞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수속 및 절차상의 실수로 일본 측에는 거의 1개월가량 늦은 시점부터 방곡령이 발효될 것이라고 전달되고 말았다. 함경도에서는 예정대로 10월부터 일본 상인에 대해 방곡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는 이에 항의하고 철회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방곡령으로 입을 수 있는 손해를 조선에서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강경한 방곡 입장을 취하고 있던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을 파면할 것을 요구하여 결국 정부는 3개월 감봉 및 강원도 관찰사로 전임(轉任) 발령을 내기에 이르렀다. 일본 측에서는 같은 해 8월에 함경도 북부 안무사(按撫使)가 발령했던 방곡령에 대한 손해까지 합하여 조선에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이듬해인 1890년에는 황해도에서 한차례 더 사건이 발생했다. 오사카 출신으로 인천에 진출해 있던 일본 상인 도이(土井龜太郎)와 유다케(佑竹甚三)는 1889년 9월부터 황해도 및 평안도(平安道)에 상인들을 파견해 곡물을 대규모로 매입하게 하였고, 이듬해 3월 이를 수송하려 했는데 3월 9일 황해도 관찰사 오준영(吳俊泳)이 방곡령을 발령하면서 운송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이전에 황해도 및 함경도에서 위와 같은 분규가 발생했음에도 또다시 방곡령이 발령되었던 것은 그만큼 곡물의 대대적인 매점이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일본 측은 상인들의 청원에 따라 통리아문에 방곡령 철회를 요구하였고 결국 방곡이 해제되어 실제 방곡 시행 기간은 10일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은 이 기간 발생 혹은 발생했을 수 있는 손해에 대해 조선 정부에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4 방곡령에 따른 손해배상 요구의 배경과 결과

방곡을 시행하는 방곡 시행권은 이미 〈조일통상장정〉 상에 규정되어 있었고 조선 고유의 주권에 속하는 성격의 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해배상까지 요구하였던 것은 일본 내 곡물시장과 관련이 있었다. 일본에서도 1889년과 1890년에 걸쳐 큰 흉작이 있었고, 이미 일본 곡물시장과 연결되어 있던 조선산 곡물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산업화를 추진하던 일본 국내 상황에서 일본에서의 곡물 수급 외에도 조선에서의 대량 곡물 반입을 통해 곡물 가격을 낮게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에서 상행위를 하는 자국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방곡령을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손해배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정부가 손해배상을 공식적으로 조선 정부에 제의한 것은 주요 사건 발생 2년여 후인 1891년 12월이었다. 조선 정부로서는 배상에 응할 이유가 없었으나 일본의 강경한 요구, 그리고 분쟁이 확대될 것을 경계하여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협상으로 쉽게 타협점을 찾지 못하자 결국 중국의 원세개(袁世凱)까지 중재에 개입하게 되었고, 1893년에 총 11만 엔의 배상액을 인정하였다.

5 방곡령의 의미

방곡령은 개항 이전에는 조선 내 각 지역의 곡물 수급 안정을 위해 해당 지방관이 결정하는 제도였으나, 개항 이후, 특히 일본 상인들의 조선 내륙 진출 및 곡물 유통구조 침투가 심화되었던 시기 이후에는 일본으로의 과도한 곡물 유출을 막고 조선의 상권 및 곡물 수급을 유지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결국 이 시기 방곡령은 곡물시장구조가 점차 일본으로 종속되는 현상을 막고, 조선 민중들의 생활을 보호하고자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오히려 번번이 일본의 압박에 의해 지방 차원의 방곡령을 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방곡령에 따른 손해배상으로까지 사건이 전화되면서 방곡령의 실효성은 현저히 줄어들고 말았다. 또한 이후 조선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면서 방곡령이 저지하고자 했던 조선의 일본 식량공급 기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제는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유통과정뿐만 아니라 곡물 생산과정까지 깊숙이 개입하였고 매년 엄청난 양의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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