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암태도 소작쟁의

암태도 소작쟁의[巖泰島小作爭議]

단결된 힘으로 소작료 4할을 쟁취해 내다

1923년 ~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 대표 이미지

암태도 소작인 항쟁 기념탑

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암태도 소작쟁의(巖泰島小作爭議)는 1923년 12월 4일 암태소작인회(巖泰小作人會) 결성과 함께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할 것을 요구하며 일어난 농민운동을 말한다. 지주 문재철이 소작료 4할을 거부하며 시작되었고, 소작인회 측과 지주 측의 갈등을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다. 그 결과 1924년 4월 중순 소작인회 간부 13명이 구속되었으며, 암태면민들은 두 차례 목포에서 석방투쟁을 이어갔다. 암태면민들의 치열한 투쟁과 전국적인 연대 속에 1924년 8월 30일 소작료 4할 합의를 이끌어냈다.

2 암태소작인회의 결성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는 섬임에도 불구하고 수산업보다는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국세조사보고(朝鮮國勢調査報告)』 전라남도 편을 보면 당시 암태도 인구는 총 3,645명(남 1,728명, 여 1,917명)이며 이 중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총 3,433명(남 1,603명, 여 1,830명)이었다. 전체 인구 중 약 94%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영세한 소작농이었다.

당시 암태도 토지 대부분은 소수의 지주가 독점하고 있었다.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이 문재철(文在喆)이다. 부친인 문태현(文泰炫) 때부터 고리대업과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쌓았고, 토지에 투자하며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문태현의 부를 물려받은 문재철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편승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한 목포로 이주해 유지로서 활동하며 식민권력과 유착하였다. 1920년대 일제의 저미가(低米價) 정책으로 수익이 감소하자 소작인들에게 높은 소작료를 징수해 손실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한편 3·1 운동 이후 암태도에서는 사회단체가 결성되면서 민족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1920년대 초 박복영(朴福永)이 중심이 되어 암태청년회를 결성하였다. 또 1922년 8월 고백화(高白花)를 중심으로 암태부인회를 결성하였다. 두 단체는 앞장서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지막으로 1923년 가을 만주와 목포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서태석(徐邰晳)이 귀향하였다. 때마침 1923년 1월 27일 순천에서 농민들의 요구로 관철된 ‘소작료 4할’ 요구가 암태도까지 확산되었다.

1923년 12월 4일 서태석의 주도 아래 암태소작인회(이하 소작인회)가 창립되었다. 이날의 창립대회에서는 ① 논 소작료 4할, 밭 소작료 3할, ② 소작료에 불응하는 지주에게는 소작료를 내지 말 것, ③ 지주와 분규가 있어 내년 2월 25일까지 해결이 안 될 경우 그 지주와 관계된 회원은 모두 파작(罷作)을 단행할 것, ④ 1리 이상 소작료 운반 운임은 지주가 부담할 것, ⑤ 마름은 부인할 것, ⑥ 본 회원으로서 위 결의사항을 위반할 경우에는 출회(黜會)는 물론 교제를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다. 암태소작인회가 지주들에게 소작료 4할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으로 암태도 소작쟁의가 시작되었다.

3 지주와의 갈등과 소작인회 간부 구속

소작인회의 소작료 4할 요구를 대다수 지주들은 수용하였다. 그러나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문재철은 끝까지 거부하였다. 결국 1924년 3월 21일 소작인회를 정기총회를 열고 문재철에 대한 소작료 불납동맹을 실행하였다. 이후 몇 차례 교섭이 있었으나, 문재철 부친 문태현은 소작인회의 요구를 모두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소작쟁의의 양상은 소작인회와 문재철 일가와의 대립 구도로 흘러갔다.

1924년 3월 27일 소작인회는 암태청년회, 암태부인회와 함께 면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부터 ‘소작료 4할’ 요구는 소작인회 뿐만 아니라 암태도 주민 전체의 문제로 확대된 것이다. 이날 열린 면민대회에서는 재차 문재철에게 소작료 4할을 종용하고, 만일 수용하지 않으면 문태현의 송덕비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문재철 측은 면민대회가 끝나자마자 송덕비를 파괴할 것이라 예상하고 50여명을 송덕비 근처에 대기시켰다. 마침 타지에 나갔던 서태석·박종남·서동오 세 사람이 배를 타고 암태도에 도착하였다. 문재철 측은 세 명을 송덕비를 파괴하러 오는 일행으로 오인하였고, 이들이 송덕비 근처를 지날 때 폭행하면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마침 면민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소작인회 회원들이 이를 목격하고 달려오면서 큰 충돌로 번졌다. 이로 인해 양측에서는 수많은 부상자가 생겼고, 서로를 고소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다음날인 28일, 양측 간에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문태현이 또 거부하면서 결국 송덕비는 파괴되었다.

양측의 고소가 이루어지자 식민권력도 재빠르게 개입하였다. 먼저 양측의 화해를 요구했으나 소작인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목포경찰서는 소작인회 간부들을 체포하는 것으로 사건을 해결하고자 했다. 4월 10일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결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경성으로 향하던 서태석이 대전에서 체포, 목포로 호송되었다. 이어 서창석을 비롯한 간부진 12명이 차례로 구속되었다.

4 아사동맹(餓死同盟)의 전개와 소작료 4할의 관철

주요 간부들이 구속되자 소작인회도 강경대응으로 맞섰다. 5월 11일 임시총회를 열고 소작료 4할을 관철할 때까지 소작료 불납동맹을 이어갈 것과 만일의 사태가 또 발생한다면 회원 전체가 사생(死生)을 함께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구속된 간부들이 석방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6월 3일경 면민대회가 다시 열렸고, 구속자 석방을 위해 목포에서 석방투쟁을 함께 하자고 결의하였다. 4일과 5일 박복영, 고백화를 중심으로 남녀 400여 명이 범선 7척을 타고 목포로 향하였다. 도착 즉시 목포경찰서에서 구속자 석방시위를 열었다. 이튿날도 100여명이 더 합세하였고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앞에서 시위를 이어나갔다. 시위는 7일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시위는 식량 부족과 당국의 호소로 중지되었다. 예심판사는 일주일 이내 예심을 마치겠다고 약조하였고, 소작인회는 만일 석방치 않는다면 다시 오겠다는 엄포를 하고 일단 암태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당국은 13명을 석방하기는커녕 7월 3일 공판에 회부시켜 버렸다. 공판 회부 소식을 들은 암태면민들은 다시 목포에서 단식농성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7월 8일 500여 명이 열 척의 배를 타고 목포로 나왔다. 그리고 목포지청 앞에서 ‘대지(大地)로 요를 삼고 창공(蒼空)으로 이불을 삼아’ 굶어 죽기를 각오하며 아사동맹에 돌입하였다. ‘백발이 뒤덮인 칠십 노파와 어린아이를 안은 젊은 부인’들도 함께 하였다. 당국은 계속 돌아갈 것을 강권했지만 암태면민들은 구속자들을 풀어줄 때까지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단언하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밤과 낮으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도 아사동맹은 16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13일 목포 문재철의 집 앞에서 시위하던 31명이 검속당하기도 하였다.

죽음을 불사른 암태면민의 두 차례에 걸친 투쟁은 전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국 각지에서 암태소작인회를 동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목포청년회, 하동군 노농연합회, 장성군노농공조회, 완도군 소안노농연합회 등 열거할 수 없는 많은 단체에서 후원금을 보내왔다. 또 조선노농총동맹에서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선청년총동맹과 함께 동정연설회를 개최하려 하기도 했다.

암태면민의 강경한 투쟁과 전국적인 연대 속에서 당국은 직접 개입하기로 하였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식민지 체제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으로 번질 우려를 염려한 것이었다. 7월 15일 나카지마 켄조우(中島健三) 목포경찰서장은 문재철을 설득하여 타협안을 마련하였다. 동시에 구속자들을 광주지방법원으로 이송시켜 버렸다. 당국의 기만적 행위에 암태면민들은 또다시 광주에서의 투쟁을 계획했지만 나카지마 서장의 설득과 저지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8월 30일 서장의 중재 아래 문재철과 소작인회 대표 박복영 사이에 화해조서가 체결되었다. 체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소작료를 4할로 하고, 1할은 농업장려금으로 할 것
2. 농업장려금은 소작회에서 관리할 것
3. 소작회에 지주도 참여할 것
4. 미납한 소작료는 삼개년을 기한하고 분납할 것
5. 도괴(倒壞) 철거한 문태현의 비석을 복구할 것
6. 목하 계속 조사 중인 형사피고사건은 양방에서 취하할 것
7. 지주가 소작인 간에 기본금 이천원을 기증할 것
[『매일신보』,「巖泰爭議解決」, 1924년 9월 2일자]

이로써 1923년 12월 암태소작인회 결성부터 9개월간 계속되어 온 암태도 소작쟁의는 암태면민들의 승리로 끝났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소작료 4할을 쟁취한 이후인 9월 18일 구속자들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렸다. 소요죄 및 상해죄가 적용되었으며 서태석 징역 2년, 서창석 징역 1년, 김연태·손학진 징역 8개월, 박필선·김문철·김운재·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서동수·박병완·서민석·박홍언·박용산·박응선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5 암태도 소작쟁의의 의의와 영향

암태도 소작쟁의는 소작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암태소작인회의 결성과 소작료 4할 인하투쟁, 주요 간부의 구속과 아사동맹으로 이어지는 고된 투쟁 끝에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그러나 암태도 소작쟁의를 지주와 소작인 간의 갈등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3·1 운동 이후 거세게 일어난 민족운동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었다. 또 여러 민족운동 단체의 지지와 연대 속에서 식민지 체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의 하나였다.

한편 암태도 소작쟁의는 인근 섬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1924년 지도를 시작으로 1925년 도초도, 자은도, 1927년 매화도에서 소작료 4할을 요구하는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