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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

대한제국기 국권 회복을 위해 전개된 다양한 계몽 운동

1905년(고종 42)

애국계몽운동 대표 이미지

대한자강회월보(제9호)

e뮤지엄(국채보상운동기념관)

1 손진태가 처음 사용한 애국계몽운동이란 용어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이란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본격화된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전개된 국권회복운동 가운데 문화적 방법을 통한 실력양성을 도모한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애국계몽운동은 위정척사파 유생들이 주도했던 을사의병과는 달리 근대지향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애국계몽운동이란 용어는 1949년 손진태가 그의 저서 『국사대요(國史大要)』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그는 여기서 애국계몽운동에 대해 ‘을사늑약 이후 사립학교를 창설하고 학회를 조직하고 종교단체를 창립하여 신학문을 교수하고 정치사상을 선전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전 민족을 일단의 대 세력으로 하여 완전한 독립을 전취하고자 하였던 운동’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손진태의 설명은 이후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이해의 기본 틀이 되었다.

2 애국계몽운동, 어떻게 시작되었나?

애국계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손진태의 지적대로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 이후부터이다. 하지만 그 모태가 되는 움직임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일제의 국권 침탈의 역사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로부터 비롯되었다. 일제는 같은 해 5월 30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통해 외교재정권 확보, 교통통신 수단 장악 등 한국 침략의 기본방침을 확정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방침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에게 황무지개간권을 요구하였으며 제1차 한일협약을 통해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와 스티븐스(D. W. Stevens)를 대한제국의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에 용빙(傭聘 : 사람을 쓰려고 맞아들임)하도록 강요하였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하는 이른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일련의 국권침탈과정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러일전쟁이 막 일어났을 때 일제가 유포한 아시아연대론에 현혹되기도 하였지만 일제의 국권침탈이 구체화되면서 점차 이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국권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保安會)의 활동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에 맞서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은 국권회복운동의 여러 계열 가운데 문화적 방법에 의해 실력양성을 도모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계몽적 운동의 단초는 1904년 9월에 결성된 국민교육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민교육회는 전덕기(全德基), 최병헌(崔炳憲), 유성준(兪星濬), 이원긍(李源兢) 등 과거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조직하였으며 후에 이준(李儁)도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문명적 학문에 응용할 서적을 편찬 혹은 번역하여 간행하는 것 등을 사업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국민사범학교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5월 24일에 결성된 헌정 연구회(憲政硏究會)는 이보다 진전된 성격을 가진 단체였다. 헌정 연구회는 국민교육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으며 홍필주(洪弼周), 이기(李沂), 이윤종(李胤鍾) 등 개신유학자들도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단체명을 통해 입헌정치를 공식적으로 표방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활동의 영역이 과거 국민교육회 단계에 비해서 확대되었다. 하지만 헌정 연구회 단계에서도 입헌정치는 ‘연구’에만 그칠 뿐 직접 실천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게재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신호탄으로 이에 대한 반대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났다. 지방에서는 위정척사파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으며 서울에서는 상동교회를 거점으로 대규모 시위운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권에 대한 위기의식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으며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계몽운동도 본격화되었다. 1906년 3월 31일 조직된 대한 자강회가 이러한 애국계몽운동을 대표하는 단체이며 서우학회 등 여러 학회들도 이 무렵부터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3 대한 자강회와 여러 학회들

대한 자강회는 헌정 연구회를 모체로 황성기독교청년회, 대한구락부, 『황성신문』 인사들이 힘을 합쳐 만든 단체이다. 회장에는 윤치호(尹致昊)가 선출되었으며 장지연, 윤효정(尹孝定) 심의성(沈宜性), 임진수, 김상범 등이 발기인이었다. ‘교육의 확장과 실업의 발달을 연구 실시함으로 부강을 도모하고 독립의 기초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대한 자강회는 표면적으로는 계몽단체를 표방하면서 정치성을 배제하였지만 당시 친일적인 색채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고 있던 일진회와 대치하는 제반 세력들이 결집한 일종의 정치단체로서의 성격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였는데 한때 전국 33개 지회에 2천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단체로는 대한 자강회 이외에 여러 학회들을 들 수 있다. 1906년 10월 정운복(鄭雲復), 김명준(金明濬), 이갑(李甲), 김달하(金達河), 유동열(柳東說) 등 관서지방 출신자들이 서우학회를 조직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오상규(吳相奎), 이준, 태명식(太明軾) 등 관북지방 출신자들이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북부 지방 출신자들이 선도한 학회설립의 움직임은 남부 지방까지 파급되었다. 1908년 1월 19일 정영택(鄭永澤), 이종일(李鍾一). 유근(柳瑾) 등 기호지방 출신자들이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박정동(朴晶東), 상호(尙灝) 등 영남지방 출신자 145명이 교남교육회를 창립하였으며 남궁억(南宮憶) 등 강원도 출신 인사들이 관동학회를 조직하였다. 1907년 7월에 조직되었지만 실제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던 호남학회도 1908년 2월 제4차 임시총회를 계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는 1908년 1월 서북학회로 통합되었다. 학회가 조직되면 우선 기관지를 발간하고 지회를 설치하며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 학회들은 겉으로는 교육을 표방한 비정치 결사였지만 당시 일제 당국은 학회들을 시국에 관심을 갖는 일종의 정치적 결사로 인식하고 있었다.

4 애국계몽운동의 사상과 내용

애국계몽운동은 독립협회 계열의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위정척사파 유생들이 주축이 된 의병과는 달리 근대지향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애국계몽운동 진영에서는 의병운동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대로 의병들도 애국계몽운동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애국계몽운동의 문명개화론은 정치의 영역에서는 입헌정치론, 교육의 영역에서는 국민교육론, 경제의 영역에서는 식산흥업론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고 있었다. 입헌정치론은 독립협회 당시의 민권론을 계승한 것으로 입헌정치를 실시하여 국민국가를 건설해야만 국민적 통합을 통해 국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주장한 대표적 단체가 바로 헌정 연구회이며 대한 자강회도 이를 이어받았다. 국민교육론은 신교육을 통해 백성들을 국가의 주인인 국민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교육론은 입헌정치론의 연장선에서 제기된 것이며 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국민교육론에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국가에 대한 권리의식, 자치정신, 참정능력 함양 등이다. 경제의 영역에서 제기된 식산흥업론은 당시 세계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상공업 육성에 힘써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개화론의 연장선에서 경제개방을 주장하였으며 경제사상 가운데에도 자유주의적 개방경제론을 수용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은 신교육운동, 언론운동,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한 경제구국운동, 신문화운동, 국학운동, 종교운동 등 여러 형태로 진행되었다. 신교육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의 출발점이었다. 국민교육회를 비롯한 애국계몽운동 단체나 개인들이 학교설립운동을 전개하여 수천 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대한 자강회에서 1906년 이를 바탕으로 의무교육 실시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사범학교를 세워 교사를 육성하였으며 각종 교과서를 편찬하여 공급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은 국민을 계몽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과 함께 신문 잡지 등 언론매체도 활용하였다. 이전부터 발행되어 오던 『황성신문』과 『제국신문』 이외에 『대한매일신보』가 새로 창간되었으며 『만세보』도 천도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 국민의 계몽에 힘을 보탰다. 학회를 비롯한 여러 애국계몽운동단체는 『대한 자강회월보』, 『서우』, 『기호흥학회월보』, 『호남학보』, 『교남교육회잡지』 등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소년』, 『조양보』, 『가뎡잡지』, 『소년한반도』 등의 잡지도 국민 계몽에 기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한 경제구국운동도 애국계몽운동의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였다. 그 일환으로 각종 회사의 설립, 한국인 상공회의소의 설치, 경제연구단체와 실업장려단체의 조직 등이 추진되었다. 국민 계몽을 위한 신문화운동과 국학운동도 전개되었다. 국어와 국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국사(國史)도 애국심과 민족정신의 고취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특히 강조되었다. 종교도 애국계몽운동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박은식(朴殷植)을 비롯한 개신유학자들은 유교개혁을 통해 국권회복에 기여하고자 하였으며 천도교도 민족교육이나 언론출판을 통한 국민계몽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대종교는 단군을 정점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의 단합을 추구한 민족종교였다.

5 애국계몽운동의 분화와 신민회의 등장

애국계몽운동은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한 1907년 이후 현실인식과 운동방략을 놓고 분화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이 분화한 것은 이 무렵 일제의 침략이 한층 본격화되었고 이에 대한 대응방식에 있어서 입장 차이가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이 분화한 양쪽에 대한협회와 신민회가 있었다.

대한 자강회는 1907년 8월 임금이던 고종의 자리를 물려주는 양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강제 해산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대한 자강회 세력을 주축으로 천도교 계열의 인사들까지 가세하여 대한협회가 결성되었다. 대한협회는 대한 자강회를 사실상 계승하였는데 대한 자강회에 비해서 정치적 성격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었다. 대한협회는 헌정 연구회 시절부터의 지론인 입헌정치론을 계승하여 정당정치론으로 발전시켰으며 자신들이 정당임을 자임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한협회는 당시의 보호국 상태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이에 적응하려고 하였다. 대한협회의 정당정치론은 보호국 질서 하에서의 정치참여를 의미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대한협회는 시간이 갈수록 일제에 타협적인 태도로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09년 9월에는 이른바 삼파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일진회와의 연합까지 시도될 정도였다.

신민회는 대한협회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단체였다. 대한협회가 공개단체였다고 한다면 신민회는 비밀결사였다. 이는 당시 보호국이라는 현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일제 침략에 끝까지 항거하겠다는 뜻이다. 신민회는 1907년 12월 무렵 조직되었다. 신민회의 창립회원은 안창호(安昌鎬), 양기탁(梁起鐸), 유동열(柳東說), 이갑,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전덕기(全德基) 등 7명인데 이 가운데 이동녕, 이동휘, 전덕기 3명은 상동청년회 회원이며 나머지 4명은 관서지방 출신이다. 신민회는 상동청년회로 대표되는 기호지방 출신의 중간계급과 양기탁과 안창호로 대표되는 관서지방 출신의 신흥세력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신민회 핵심구성원의 연령은 주로 30대 소장파로서 대한협회의 주도층이 40대와 50대인 점과 비교된다.

신민회의 이념으로는 국수보전론을 들 수 있다. 나라가 망했어도 국수(國粹) 즉 민족정신을 지키면 후일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편 대표적 인물이 신채호(申采浩)이다. 신민회는 구체적 행동방략으로 독립전쟁론을 주장하였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기 위해서는 독립전쟁이 불가피하며 이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민회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망명하여 국외에서 독립전쟁 기지 건설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근대지향적이었던 애국계몽운동은 신민회 단계에 이르러 국외무장투쟁의 현장에서 위정척사파 유생이 이끄는 의병들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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