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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운동[洋務運動]

중체서용 기반의 근대화 정책

1861년

양무운동 대표 이미지

푸저우(福州) 선정국(船政局)

Canadian Centre for Architecture

1 개요

청 조정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서구의 군사 기술을 도입하고 관영 군수공장을 설립하는 등 중체서용(中體西用) 사상에 기초해 서구 문명을 수용하였다. 그 일련의 과정을 양무운동이라고 하며, 동치제(同治帝, 재위 1861~1875)와 광서제(光緖帝, 재위 1875~1908) 시기에 전개되어 동광신정(同光新政)이라고도 한다. 특히 동치제 시기에 상당한 성과가 나타나, 이른바 동치(同治)의 중흥(中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양무운동은 청 조정 주도의 자강(自强) 운동으로 청일전쟁 시기까지 이어졌다.

2 19세기 후반,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

아편전쟁 이후 청 국내 특히 개항장이 위치한 동남 연해 지역은 경제적으로 한층 어려워졌고 사회 동요가 확산되었다. 1851년에는 홍수전(洪秀全)이 이끄는 배상제회(拜上帝會)가 세력을 키워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세우고, 1853년 난징(南京)을 수도로 하였다. 백성은 ‘천하일가(天下一家) 공형태평(共亨太平)’의 이상과 그에 기초한 각종 제도에 호응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천국은 권력 내분과 지배층의 타락, 체제에 내재한 봉건적 경향과 제도의 한계 등으로 인해 쇠락하였고 결국 1864년 진압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 존재했지만 태평천국 세력은 18개 성에 걸쳐 6백여 도시를 점거하였다. 그를 통해 내우외환에 직면한 중국 사회의 문제가 드러나는 한편, 이후 중국사의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중 하나가 지방에 기반을 둔 정치세력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이미 관군은 무력하였고, 청 조정은 지방 유력층이 조직한 의용군 즉 향용(鄕勇)에 의존해 태평천국을 진압해야 했다. 후난 출신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 안후이 출신 이홍장(李鴻章)의 회군(淮軍) 등이 활약하였다. 한편 서양 각국도 애초 방관하다가 태평천국의 군대가 상하이(上海)를 공격할지 모르는 위기에 처하자, 용병을 모집해 상승군(常勝軍)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1860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이후 회군과 연합하는 등 태평천국의 진압에 관여하였다.

태평천국이 진압된 이후 증국번과 이홍장 등은 지방장관 겸 중앙행정관으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에서 발언권을 가졌다. 구체적으로 증국번은 양광총독(兩廣總督)과 흠차대신에 임명되었고, 이홍장은 직례총독(直隷總督)으로 북양대신(北洋大臣)을 겸하였다. 그것은 한인(漢人) 관리의 중용이라는 측면에서 이전 청의 정책과 구별되는 변화인 동시에, 전반적으로 지방장관인 총독과 순무의 병권이 확대되어 지방 세력이 팽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운동을 겪으며 서구의 군사적 우위를 절감하였다.

청 조정도 열강의 침략과 국내 동요를 통제하기 위해 서구 문명을 수용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1861년 아편전쟁과 베이징 조약을 마무리한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의 건의에 따라, 차후 베이징에 상주하는 서구 각국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기구로서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 이하 총리아문)을 설치하였다. 공친왕은 서양의 실체를 파악함으로써 서양의 장기(長技)를 인정하고 그것을 배워 국가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친왕의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은 양무파(洋務派)라고 불리었고, 태평천국을 진압한 지방 기반의 한인 관리들도 양무파에 가세하면서 양무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은 원래 화이관(華夷觀)에 기초해 외국과의 관계 및 교섭 사무를 이무(夷務)라고 불렀다. 하지만 톈진 조약에 따라 서양 대상의 공문서 등에 이(夷)라는 문자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이무 대신 양무(洋務)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또 위원(魏源)과 풍계분(馮桂芬) 등이 중체서용을 주장하면서, 양무에는 서구 문물을 섭취하고 수용하는 내용이 내포되었다. 1860년대 어린 동치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던 서태후(西太后)가 공친왕에 우호적이어서 동치제의 치세에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에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양무운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고, 동치제에 이어 광서제 시기에도 전개되었다.

3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다

총리아문은 부설 기관으로 총세무사(總稅務司)와 동문관(同文館)을 두었다. 전자는 통상 관련 세관 업무를 관리하였고, 후자는 외국어 교육 기관으로 자연과학도 가르쳤다. 총리아문은 외교뿐만 아니라 양무 전반을 처리하며 양무운동의 중추로서 역할을 하였다. 양무운동의 전개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군사 중심의 시기이다. 서양 총포와 군함의 수입 및 서양식 군대 편성, 근대 군수공장의 설립과 군함 건조 등이 주요 목표로 설정되었다. 먼저 청 조정은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으로 관리를 파견해 병기 등을 구입하는 한편, 해군을 설립하고 군사 학교와 외국어 학교 등을 세웠다. 전국 각지에 약 30개 근대 학교를 통해 군사, 과학, 번역 관련의 인재가 육성되었다.

다음으로 조선과 군수 제작을 위해 이른바 양무운동의 4대 공장이라 불리는 강남제조총국(江南製造總局), 금릉기기국(金陵機器局),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 등이 설립되었다. 구체적으로 1865년 이홍장은 상하이에 강남제조총국을 설립해 철포와 탄약, 기선 등을 제조하였고, 난징에 금릉기기국을 세워 대포와 화약을 만들었다. 이와 더불어 강남제조총국에는 부설 기구로서 역서국(譯書局)이 설치되어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이 번역되었다. 이어서 이홍장과 좌종당(左宗棠), 심보정(沈葆楨) 등이 주도해 선정국을 설립하고 푸저우 마웨이(馬尾)에 조선소를 세웠다. 선정국에는 부설 학교가 설치되어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르쳤고, 프랑스와 영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좌종당이 서안기기국(西安機器局), 숭후(崇厚)가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 등을 설립하였다.

그런데 재정을 투입해 군사 중심의 근대화 정책이 실시되었지만 예상보다 성과는 크지 않았고, 군사 공업에 필요한 원료가 부족한 상황이 드러났다. 이에 1870년대 청 조정은 구부(求富)를 슬로건으로 군사 공업을 지탱하는 산업을 진흥하는 데 노력하였다. 즉 양무운동의 제2기는 중국의 자강을 위해 부유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기간산업의 발전에 중점을 둔 시기였다. 해운 경영, 광산 개발, 방직회사 설립, 전신과 철도 건설 등이 이루어졌다. 그 예로 이홍장은 당시 외국인이 독점하던 증기선 수운을 경영하기 위해 민간 자금을 모집해 상하이에 근대 해운기업인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 1872년)을 세웠다. 1878년에는 석탄 채굴을 위해 개평광무국(開平礦務局)을 설립하고, 채굴된 광물을 운반하기 위해 당산(唐山)-서각장(胥各莊) 간 철도를 부설하였다. 그리고 청 조정은 국방 관련으로 전선과 철도 건설에 주력하였다. 1879년 톈진과 다구(大沽) 간에 중국 최초 전신이 부설되고 전보 사업이 시작되었으며, 전보총국(電報總局)이 개설되었다.

양무운동의 제3기는 서구로부터 도입한 기술이 민간 기업으로 확산되는 시기로, 1880년대 후반 이래 민영 공장이 각지에 설립되었다. 군사 공업의 발전에 민간 산업의 보완이 필요했고, 불평등 조약을 배경으로 외국으로 국부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민간 산업의 발전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특히 1890년대 상해기기직포국(上海機器織布局), 대야철산(大冶鐵山), 한양제철소(漢陽製鐵所)를 비롯해 방직·광산·제철 등 근대 산업의 육성이 이루어졌다. 사실 민영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당시 중국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외국 상품의 비중을 어느 정도 줄이는 데 기여하였다. 또 시장의 수요에 상응하는 상품 생산은 중국 내 자본주의 발전에 계기가 되었다.

4 양무운동의 성과와 한계

양무운동은 국가 주도의 근대화 정책으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자강 개혁의 일환이었다. 그를 통해 근대 병기를 갖춘 육·해군이 편성되고 각지에 근대 산업시설이 세워져 자본주의 발달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근대 교육의 보급으로 서양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전통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났다.

양무운동은 중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일차적으로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화혼양재(和魂洋才) 즉 일본 고유의 정신에 기초해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취사 활용하는 태도가 강조되었고, 조선에서도 배외주의의 위정척사(衛正斥邪)가 주장되는 한편 개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양무운동의 한계도 분명하였다. 운동 초기에 세워진 공장들은 모두 국가 재정에 의존해 관영으로 운영되었다. 공장은 국가의 수요에 상응해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채산성이 도외시되고 이윤이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자체적으로 시설을 유지하고 생산을 확대하는 기반을 축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양무운동을 대표하는 4대 공장조차 수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해 기계 생산을 했지만, 기계와 기술 인력은 전적으로 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1870년대 이후 청 조정이 민간 자본을 모집해 공장을 세우고 사업을 확대했으나 대부분 관독상판(官督商辦) 즉 상인이 출자 경영하고 관에서 감독하는 반민반관의 관민합영(官民合營) 형태였다. 그 결과 양무운동과 관련된 기업들은 점차 전통적인 경영, 관리의 무능력과 부패, 자본 부족 등의 문제를 드러내며 본질적으로 근대 기업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양무운동의 한계는 중국의 문화와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서구의 기계 문명과 기술을 도입하려는 이른바 중체서용을 이념으로 한 것에서 비롯하였다. 이후 청프전쟁(1884~1885)을 거치면서 서양 기술의 습득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개혁을 역설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하지만 결국 문제 제기에 그쳤고 실천에 이르지 못하였다. 풍수(風水) 때문에 철도 도입이 지연되는 사태가 대변하듯이, 청에서 근본적인 제도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치적으로도 청 조정 내 양무운동을 반대하는 보수 세력이 만만치 않은 기세로 양무파와 대립하였다. 그들은 일찍부터 동문관에서 이루어지는 자연과학 교육을 반대하였고, 서구로 파견된 유학생도 조기에 귀국시켰다. 결정적으로 1880년대 후반 보수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고 양무파를 몰아내면서 양무운동의 추진력이 쇠퇴하였다. 거기다 조정에 보수 세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양무파의 지방관들은 서로 경쟁하거나 대립하였다. 지방 장관이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 기업도 함께 옮기는 등, 양무운동이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양무파 관리들은 근대 기업을 적극적으로 설치해 자신의 실권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홍장이 북양대신의 직책에 있으면서 북양함대를 만든 것이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5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무너지다

양무운동이 추진되던 1870~1880년대 대외적으로 청은 중화질서의 해체에 당면해, 동아시아 각국에게 행사하던 이른바 종주권을 포기해야 했다. 먼저 1874년 프랑스와 베트남 간 제2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고 청에 대한 베트남의 번속(藩屬) 관계가 부정되었다. 이에 청이 이의를 제기하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지만 패전하였다. 1885년 청은 톈진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였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明治) 유신을 실행하면서 류큐 왕국(琉球王國)을 일본 영토로 귀속시켜 류큐번(琉球藩)으로 하였다. 그로 인해 전통적으로 류큐 왕국이 조공하던 청과 외교 마찰이 생겨났다. 1874년에는 타이완 원주민이 류큐 사람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타이완을 침략하였는데, 일련의 과정 끝에 결국 청은 일본과 화의를 맺고 일본군의 행동을 승인하였다. 류큐 사람을 일본인으로 인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류큐번을 일본의 속지로 승인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류큐번에 청과의 책봉·조공 관계의 폐지, 메이지 연호의 사용 등을 명령했으며, 1879년 류큐번을 철폐하고 일본 본토의 지방행정 체제에 대응하여 오키나와현(沖繩縣)을 설치하였다.

한편 일본은 1875년 서양 열강의 수법을 모방해 운요호(雲揚號)를 보내 조선 해안에서 무력을 행사한 후 이듬해 조선과 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맺었다. 그것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위협하는 것이었지만,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배경으로 청은 조선에서 일본보다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이에 일본은 조선을 주권선(主權線)으로 설정하고 적극적으로 군사 침략을 준비하였고,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청과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청은 양무운동을 통해 군사력을 확충한 상태였고 서구 열강은 청을 ‘잠자는 사자’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북양함대가 서해 해전에서 괴멸하는 등, 청은 패전하였고 1895년 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로 인해 청은 국고 수입의 3년분에 상당하는 2억3천만 냥(랴오둥반도 반환금을 포함)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중화관에 기초한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자강의 기치를 내건 양무운동은 일차적으로 청프전쟁에서 타격을 받았고, 이어지는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파산하였다. 30여 년간 양무운동이 서양 기술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오히려 체제 유지를 도모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자강운동으로서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잠시 청 조정을 안정시켰지만, 주권을 강화하거나 민생을 안정시키지는 못한 것이다. 이후 서구 열강은 노골적으로 청을 분할하는 경쟁에 나섰다. 강유위(康有為) 등이 입헌군주제 도입 등 체제 개혁을 주장하며 이른바 변법(變法) 운동을 시도했지만, 보수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무술정변). 한편 서양 열강의 침입이 계속되자 중국 민중은 서양 문물을 적대시하고, 철도나 전선 등을 파괴하기에 이르렀고, 1900년 외국의 침략에 저항해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일으켰다. 의화단은 청 조정과 외세에 의해 진압되지만, 저항 정신은 1911년 혁명(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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