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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통제의 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연계 활동

1919년 ~ 1921년

1 개요

연통제(聯通制)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국내와의 연계 활동을 위해 운용한 제도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통제를 실시하여 국내에 대한 통치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1919년 7월 10일 「임시연통제」를 공포하였다. 이것이 동년 12월 1일에 「임시지방연통제」로 개정되었으며, 국내는 13도 12부 221군의 행정단위로 구획되었다. 또한 독판부(督辦府)-부서(府署)-군청(郡廳)-면소(面所)의 행정기구를 두었다. 이러한 행정기구는 임시정부에서 발포하는 법령이나 각종 공문을 국내에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동시에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고, 각지의 연락을 담당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2 연통제의 시행: 정부와 국민 간에 기맥을 상통하다

1919년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부·내무·재무·군무·법무·교통 총 6부 체제로 이루어진 행정부를 구성하였다. 연통제와 관련해서는 내무부를 이해해야 한다. 내무부는 비서·지방·학무·경무·농상공 5국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수장인 내무총장은 “헌정주비, 국회의원선거, 지방자치, 교육, 경찰, 위생, 농상공무와 종교, 자선에 관한 사무”를 통할하도록 되어 있다(「대한민국임시정부장정」 제35조). 이 중에서도 지방국의 설치와 지방자치에 대한 업무는 내무부의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장정」 제42조에는 지방국의 사무를 모두 9개로 규정하였으며, 여기에서의 지방은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장 제3조의 규정에 따라 “구한국의 판도”였다. 즉 지방국은 임시정부의 국내 행정을 위한 행정부서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에 소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지방국의 역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치가 필요했다. 연통제는 이를 위해 설치된 것이다. 1919년 7월 10일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과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명의의 국무원령 제1호 「임시연통제」가 공포되었다. 여기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정부와 국민 간에 氣脈을 상통하여 復國事業에 완성을 기하고 내외의 활동을 일치키 위하여” “내지와 외국 거류지에 연통부를 둘” 것을 언명했다(제1조). 또한 연통부를 3급으로 나누어 각 도에 감독부, 각 군에 총감부, 각 면에 사감부를 두기로 하였다(제2·3조). 감독부에는 감독과 부감독, 총감부에는 총감과 부총감, 사감부에는 사감을 두기로 하였다(제4·9·14조). 연통제는 정부와 국민이 떨어져 있다는 현실 속에서 임시정부의 국내활동을 뒷받침하고 이를 통해 독립운동을 수행하고자 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에 ‘적의 재판과 행정상 모든 명령을 거절하라’는 제목의 「임시정부령」 제2호를 발표했다. 또한 5월에 「통유(通論)」 제1호를 발표하여 “본 정부가 국토 내에 도, 군의 구획을 정하여 자치단체의 설정을 완성”한다며 국내활동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공언하였다. 최근의 한 연구는 이 2개의 포고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방)자치제’라는 표현을 적극 평가하면서 연통제를 지방자치제에 대한 “임시정부식 표현”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한편 「임시연통제」는 1919년 12월 1일에 「임시지방연통제」로 개정되었다. 이로써 감독부가 독판부(督辦府)로 개칭되고, 부서(府署)가 새롭게 창설되었다. 또한 총감부는 군청(郡廳)으로, 사감부는 면소(面所)로 개칭되었다. 지방행정구획과 직결된 「내무부령」도 1호부터 3호까지 발표되었다. 이로써 김구(金九)가 『백범일지』에서 말한 “전국을 통치”하는 ‘비밀조직 연통제’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3 연통제의 내용: 임시정부의 행정조직망을 국내로 확대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위에서 언급한 「내무부령」을 통해 국내의 지방행정을 도-부-군-면으로 구획하였다. 도는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강원도, 함경북도, 함경남도로 구성하였다. 부는 모두 12부 체제로서 경기도에 경성부와 인천부, 전라북도에 군산부, 전라남도에 목포부, 경상북도에 대구부, 경상남도에는 부산부와 마산부, 황해도에는 해주부, 평안남도에 평양부와 진남포부, 평안북도에 신의주부, 함경북도에 청진부를 두었다. 전국 행정단위의 규모도 1906년 1수부-13도-11부-332군에서 13도-12부-221군으로 변화되었다. 참고로 같은 시기 조선총독부가 정비한 행정단위는 13도-12부-317군으로서 군의 숫자가 크게 차이나는 것이 특징이다.

독판부는 1室 4司 체제로 구성되었다. 비서실은 관인관수(官印管守), 기밀, 인사, 포상에 관한 사항을 주된 업무로 삼았다. 내무사(內務司)는 서무과, 지방과, 회계과, 심사과를 두고, 도의 행정 전반에 관한 사항을 맡았다. 재무사(財務司)는 세무과, 이재과를 두고 세금과 금융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교통사(交通司)는 문서 및 물품의 郵傳, 교통선로와 구획에 관한 사무를 주로 맡았다. 경무사(警務司)는 기밀과와 경호과를 두고 범죄를 검거하거나 적을 정찰하였다. 부서와 군청에는 서무, 재무, 경무의 3개 과만 편성되었는데, 이는 독판부 각 司의 업무가 부와 군 차원으로 재편된 것이다. 한편 도-군-부에는 참의가, 면에는 협의원이 있었는데, 이는 일종의 자문기관으로서 낮은 단계의 ‘지방의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러한 연통제 조직에 대해 주요한(朱耀翰)은 “신민회 당시의 지방비밀조직의 구상과 비슷한 것으로 도산의 창안”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통제 시행을 위해 특파원(特派員)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1919년 7월 23일에 파견된 충청북도 특파원 김태원(金義源)은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신현구(申鉉九)와 만나 연통제에 관해 논의했다. 또한 7월 25일 파견된 평안남도 특파원 유기준(劉基俊)은 연통제 조직을 시도하였다가 9월 9일에 체포되기도 한다. 함경북도 경성(鏡城)의 경우를 보면, 특파원이 지역 유지에게 ‘연통제취지서’를 전달하고 이 취지에 승낙하는 인물들과 상의하여 적임자를 추천받았다고 한다. 안창호의 기록에 따르면, 특파원은 이렇게 추천받은 적임자를 연통제 직원에 임명할 수 있었다. 특파원은 「임시연통제」가 공포된 7월에 가장 많이 파견되었으며, 이동녕(李東寧) 내무총장 시기까지 모두 32차례 파견된다.

4 연통제의 운영: 특파원을 파견하여 독판을 임명하다

연통제는 함경북도에서 가장 먼저 시행되었다. 1919년 9월경에 특파원 명제세(明濟世)가 함경북도 회령군의 한 교회에 「임시연통제」 규칙을 송부하였다. 당시는 연통제가 개정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이 취지에 찬성한 이들은 회령에 감독부를 두고, 각 군과 면에 총감부와 사감부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관련자들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조선과 임시정부가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상해에 가기보다 조선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기부금 모집도 함께 수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1920년 11월, 일제에 발각되어 관련자 75명이 모두 재판에 회부되면서 좌절된다. 당시 언론은 이를 ‘연통제 공판’ 또는 ‘연통제 사건’이란 제목으로 연일 대서특필하였다.

이후 함경북도에 독판부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20년 5월에 특파원 안정근(安定根)과 왕삼덕(王三德)이 파견되었다. 대한제국 관리였던 오중묵(吳重默) 이 당시 47세의 나이로 독판에 추천되었으며, 1920년 9월 29일 이승만에 의해 임명장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이미 평안북도의 조병준(趙秉準), 함경남도의 윤화수(尹和洙), 평안남도의 이덕환(李德煥), 전라북도의 이석현(李石峴), 전라남도의 기동연(奇東衍)이 독판에 임명된 상황이었다. 아래의 표는 독판의 임명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표 1〉 독판의 임명 상황
독판부   독판(임명일)   특파원(파견일)
함경북도 윤화수(尹和洙, 1919.12.17)
→한영호(韓永鎬, 1922)
 
평안북도 조병준(趙秉準, 1919.12.05)
→안병찬(1920.04.19~1921.09.07)
→김승만(독판대리)
정제형(鄭濟亨, 1920.01.21)
평안남도 이덕환(李德煥, 1919.12.05)  
황해도 1920년 3월 설치 / 최석호(崔錫浩, 1921)  
경기도 1920년 9월 설치 / 민철훈(閔哲勳, 1921) 이종욱(李鍾郁, 1920.02.26)
충청북도 이용(李鎔, 1921)  
충청남도 이기상(李起祥, 1921)  
전라북도 이석현(李石峴, 1919.12.05) 소병원(蘇秉元, 1919.09.22)
이종욱(1920.02.26)
전라남도 이석현(李石峴, 1919.12.05) 기동연(奇東衍, 1919.12.05)
〈표 1〉 독판의 임명 상황

다만 실제 계획과 달리 연통제는 국내의 모든 행정구역을 아우르지는 못했다. 위의 표처럼 1919년부터 1921년에 걸쳐 독판이 임명된 곳은 10개 도에 그쳤다. 또한 부서는 평양부, 진남포부, 인천부에만 설치되었다. 군청은 43곳에 설치되는 데 머물렀다. 참고로 평안북도의 경우 총 19개의 군 중에 17개의 군에 군감이 임명되어 연통제가 가장 잘 시행된 도로 알려져 있다. 경기 이남의 삼남지방에는 연통제가 실시되지 못하거나 시행되더라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특히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강원도에는 연통제가 실시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에는 독판 임명 이외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경기도도 독판과 인천부 부장(府長)이 임명되었을 뿐이다. 다만 충청북도에는 충주·제천·괴산·보은·청주·단양 등지에 직원이 다수 임명되었음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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