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 31)
지금껏 알려진 우금치 전투는 공주 우금치 일대에서 1894년(고종 31) 10월 23일부터 11월 11일 사이에 이루어진 두 차례의 전투 중 2차 전투를 지칭한다. 전라도·충청도·경상도 각지의 동학 포접(抱接)이 연합하여 결성된 1만여 명의 농민군, 경리청군(經理廳軍)·장위영군(壯衛營軍)·통위영(統衛營軍) 및 일본식으로 훈련된 교도중대(敎導中隊) 등 조선 정부의 최정예 부대, 최신식 무기와 전술로 무장한 일본군의 세 주체가 뒤섞여 격전을 벌였다. 농민군은 절대적인 수적 우위를 점했으나, 우세한 무기와 전술을 갖춘 진압군의 방어선을 뚫을 수는 없었다.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농민군 세력은 급속도로 와해되었고, 동학농민운동의 동력 또한 상실되었다. 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운동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1894년 1월 전라북도 고부(古阜,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에서 시작된 농민봉기가 1895년 1월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마지막 항쟁을 벌였을 때까지 전국적으로 발생한 동학군의 반봉건 반침략 투쟁을 일컫는 용어는 다양하다. 당대의 사료에는 주로 ‘동학교도들이 일으킨 난’이라는 뜻에서 ‘동학난(東學亂)’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연구에서는 비록 미완의 혁명으로 그쳤지만, 그 혁명적 의의를 기리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명명하기도 하고, 1811년 홍경래의 난 이후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 농민항쟁의 흐름 속에 이 사건을 위치시켜 ‘동학농민전쟁’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보다 중립적이고 보편적 의미를 살리기 위한 용어인 ‘동학농민운동’을 선택하여 이 사건을 설명하고자 한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조선 후기 사회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빈발했던 수많은 민란의 연장선 위에서 그 종점을 찍는 거대한 운동이었다. 또한 그 사상적·조직적 배경에는 조선 후기 이래 ‘아래로부터’ 표출되고 있던 민중의 변혁 의지를 수용하여 체계화한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사상, 그리고 동학의 포접 조직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실제 전개 양상을 살피기 위해 우선 이해해야 할 개념이 바로 이 ‘포접제(抱接制)’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농민군 조직의 근간이 되었던 동학 조직의 구성 원리가 바로 포접제와 연원제(淵源制)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 관련 사료에는 기포(起包)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기포’란 “포를 일으키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포(包)란 그보다 작은 규모로 이루어진 동학 조직의 접(接)이 여러 개 모여 만들어진 좀 더 큰 규모의 동학 조직을 일컫는다. 포는 지역 단위를 기본으로 조직되었으나, 반드시 당시의 군현 단위와 일치하지는 않고 여러 개의 군현에 걸쳐 있는 경우가 많았다. 포접제와 마찬가지로 동학 조직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연원제는 인맥 중심의 직제(職制)로, 특정 지역에 국한되기보다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이를 토대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등 전국적으로 동학 조직의 일정한 지역적 ‘권역(圈域)’이 형성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이러한 권역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동학교도와 일반 농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은 크게 1894년 3월 21일의 1차 봉기와 1894년 9월 초순의 2차 봉기를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 1차 봉기 이전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은 1892년에서 1893년까지 2년에 걸쳐 동학교도와 일반 민중이 모여 전개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동학의 1대 교조 최제우가 처형된 뒤 그 무죄를 증명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그리고 1893년 11월의 사발통문(사건의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참가자의 명단을 둥근 형태로 적은 통문) 모의와 그 실행인 1894년 1월의 고부농민봉기을 꼽을 수 있다. 이후 1894년 3월 21일 전라도 무장에서 동학군의 1차 봉기가 발생했던 것이다.
1차 봉기와 2차 봉기 사이의 중요한 사건으로는 1894년 5월 7일의 전주화약(全州和約)과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불법점령한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초 조선 정부에서는 관군(官軍)만으로 농민군의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러자 일본 역시 조선의 일본 거류민 보호와 “조선에 일이 있을 시 청과 일본은 공동 출병한다”라는 톈진 조약(天津條約)을 근거로 들며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전라도 고부(古阜)의 동학 접주(接主, 동학 조직 ‘접’의 지도자) 전봉준(全琫準)과 경군(京軍, 서울에서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군대)의 지휘자 홍계훈(洪啟薰)이 서둘러 맺은 것이 전주화약이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자진 철수하는 대신, 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전라도 각 군현에 대한 농민군의 폐정개혁(弊政改革, 탐관오리 처벌과 삼정의 폐지 등 당시 농민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던 사회 적폐를 개혁하고자 했던 움직임)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후 조선 정부는 동학교도의 난이 진압되었으므로 청과 일본에 철병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내정(內政)에 간섭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은 군대를 조선에 계속 주둔시키기 위한 명분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동학군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대원군에게 입헌군주제를 모델로 한 새로운 내각을 수립할 것을 강제하였다. 일본의 의도는 새로운 정권의 이름으로 조선과 청 사이의 전통적 조공관계를 파기하도록 부추겨 청과 전쟁을 벌일 구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점령 사건을 계기로 ‘항일전쟁’의 성격을 띠고 9월 초순부터 본격적으로 동학군의 2차 봉기가 이어졌다.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걸쳐 공주 일대에서 발생한 전투 중 하나였던 우금치 전투는 동학군의 2차 봉기 단계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렀던 전투였다. 이후 동학군이 기세를 크게 잃고 쇠퇴하는 기점(起點)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동학농민운동의 전체 과정에서 최대의 분수령(分水嶺)이기도 했다.
전봉준의 진술에 따르면 우금치 전투를 포함하여 공주 전투에 참가한 농민군은 1만여 명이었다. 이때 전라우도(全羅右道)를 기반으로 한 전봉준의 직속부대는 약 4천 명 규모였다. 나머지 6천여 명은 전봉준이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충청도 강경(江景), 논산(論山), 은진(恩津), 노성(魯城) 등지에서 합세한 농민군이었다. 즉, 2차 봉기의 농민군은 전라도와 충청도 연합군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1894년 8월 말,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항일의 기치를 내걸고 전라북도 삼례(參禮)에서 재봉기를 결심한 전봉준은 대도소(大都所, 농민군 총본부)를 설치하고 인근 군현을 공격하여 무기와 식량 확보에 들어갔다. 전봉준이 재봉기 준비에 돌입한 것은 8월 말부터였지만, 실제로 북상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9월 말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우선 전봉준 자신에게 병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아 군량과 농민군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는 전라도 지역에 국한된 농민군의 현실적인 역량이 취약하다는 점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고려할 문제였다. 따라서 전봉준은 추수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편, 함께 봉기할 연합 세력을 모으는 데 힘썼다. 그는 당시 동학 교단의 최고 지도자였던 최시형(崔時亨)에게 ‘기포’에 동참하여 전국적으로 동학군의 세를 모아주길 청원했으며, 각지의 동학 접주에게도 통문을 보내 ‘기포’의 의의를 밝히며 함께 봉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결과 금구, 전주, 정읍, 부안, 진안 지방의 농민군 지도자들이 휘하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로 합류하였다.
그렇게 모인 4천여 명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을 격파하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1차 공격지로 충청감영이 있었던 공주를 겨냥했다. 충청도의 요충지였던 공주는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자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금강(錦江)이 흐르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 소위 스즈키 아키라(鈴木彰) 역시 “공주를 동학도에게 넘겨주게 되면 사방의 동학도가 금방 봉기해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될 것”이라고 그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삼례에 모인 농민군(남접)은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인 10월 12일경 북상을 개시하여 논산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농민군을 재모집하는 동시에 10월 12일에서 16일 사이에는 손병희가 이끌고 있었던 충청도 북동부지역 농민군(북접)과 합세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최시형 휘하의 수많은 두령(頭領)들이 충청도, 경상도 각지에서 포를 일으켜 논산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등지에서 모인 농민군은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할 즈음 1만여 명의 대규모 남·북접 연합부대를 형성하였다.
전봉준은 공주 공격을 앞두고 ‘양호창의군영수(兩湖倡義軍領袖, 전라도(호남)와 충청도(호서) 의병의 우두머리)’의 자격으로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에게 골육상쟁을 피하고 항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관군의 동참을 촉구하는 글을 보냈다. 박제순은 농민군이 공주를 압박해오자 급히 관군과 일본군 측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1만의 농민연합군, 800여 관군, 120여 명의 일본군이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모인 공주에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흘렀다.
10월 23일,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처럼 흐르던 긴장감이 일시에 깨졌다. 공주 우금치 일대인 이인(利仁)에서 공주성을 둘러싼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 전투는 효포(孝浦), 판치(板峙), 웅치(熊峙) 등지에서 3일간 전개되었다. 농민군 약 4만 명과 충청감사 박제순이 지휘하는 감영군, 서산부사(瑞山府使) 겸 경리청영관(經理廳領官) 성하영(成夏泳) 및 경리청부영관 홍운섭(洪運燮)이 지휘하는 두 부대의 경리청군, 이규태가 이끌고 온 좌선봉진군(左先鋒陳軍, 통위영군) 등 조선 정부의 최정예부대, 그리고 최신 무기와 전술로 단련된 일본군 제2중대(1개 소대와 2개 분대)가 온통 뒤섞여 대접전을 펼쳤다. 농민군에 맞선 진압군의 규모는 930여 명으로, 농민군 전력에 비하면 10분의 1 남짓이었다. 무기와 전술 면에서 열세였던 농민군은 초반에 상당히 호전했지만, 10월 24일 또 다른 일본군 지원대가 연합하면서 전세는 곧바로 역전되었다. 전봉준은 10월 25일 농민군을 후퇴시켜 전열을 가다듬고 다음 전투를 준비하였다.
농민군과 진압군은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우금치 일대를 중심으로 2차 격전을 벌였다. ‘우금치 전투’로 알려진 것이 바로 이때의 전투였다. 11월 8일, 농민군은 3진으로 나뉜 진압군을 상대로 맹공을 가해 그들을 공주 감영으로 몰았다. 11월 9일, 승리의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우금치 일대의 진압군 진지를 향해 총공격을 실시하였다. 진압군은 우금치에서 가장 높은 견준봉(犬蹲峰)을 비롯하여 세 면의 고지(高地)를 점거하고 농민군을 기다렸다. 농민군은 낮은 곳에서 꼭대기를 향해 공격을 감행해야 하는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우금치와 견준봉 사이의 작은 산등성이를 방패 삼아 농민군을 내려다볼 수 있던 진압군은 농민군이 다가오면 일제히 사격을 하고 몸을 숨겼다가, 또다시 능선을 넘는 농민군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하기를 되풀이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깃발을 흔들고 북을 울리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올라오는’ 농민군의 모습을 본 관군은 ‘저들은 그 어떠한 의리이며 그 어떠한 담략인가. 그들의 행동을 말하려 하고 생각함에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하다’ 라며 그 불굴의 기세를 기록해 놓았다.
이날, 4~50차례의 일방적인 사격이 있었다. 농민군의 시체 더미가 온 산에 가득했다. 2000년대 초반 우금치 일대에서 녹취한 구술 자료에 따르면, 농민군과 진압군의 격전지였던 삿갓재와 승주골에서는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흙만 덮었다고, 그 일대는 전부 무덤이었다고, 주민들이 동원되어 3년에 걸쳐 농민군 시신을 치웠다고 한다.[박맹수, 정선원, 『공주와 동학농민혁명:육성으로 듣는 공주와 우금티의 동학 이야기』, 모시는사람들, 2015, 137쪽에 수록된 오성영 구술(2003.2.20., 2004.10.23.)]
1만여 명의 농민군 중 공주 우금치 일대에서 1, 2차의 격전을 치르고 생존한 사람은 5백여 명에 불과했다. 농민군 전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전봉준 부대는 우금치 전투를 계기로 급격히 쇠퇴하였다. 농민군은 더이상 연합전선을 형성하지 못한 채 와해되었고, 이후 지역별 항쟁만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