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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시작된 반외세운동

미상

위정척사운동 대표 이미지

최익현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은 조선후기,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이 내부적 변신과 외부적 변화를 겪고 있을 시기에 등장하였다. 바른 것(正)을 지키고 그른 것(邪)을 물리치고자 하는 체계화된 이론과 이념적 정향(定向)인 위정척사사상에 기반한 반침략, 반외세운동이다.

2 통상수교거부와 왜양일체론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왕조는 18세기 이후 천주교가 서학의 형태로 전래되자 정학을 높이고 이단을 물리친다는 유교적 논리에 의거하여 이를 배척하였다. 위정척사사상은 개항 이전부터 외세에 대한 위기감에서 대두되었으며 화서(華西) 이항로( 李恒老)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그리고 화서의 제자인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 등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다. 특히 이항로의 위정척사론은 김평묵이 발전적으로 집대성하였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에 의해 실천적 차원에서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에 의해 의병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해 나갔다. 위정척사운동의 사상적 배경은 화이론(華夷論)과 소중화(小中華)이다. 따라서 바른 것은 유교를 기본으로 한 중화(中華)이고, 서양문화는 사악한 오랑캐로서 인식하고 서구열강과 수교한 일본을 서양과 함께 '양이(洋夷)'로 규정하고 이들을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예의를 모르는 금수로 인식하였다.

그 결과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게 되자 이에 강렬하게 저항하였다. 특히 최익현은 ‘병자지부복궐척화의소(丙子持斧伏闕斥和議疏)’를 올리면서 수교에 반대하였다. 최익현은 개항을 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는데, 1. 일본의 침략에 의한 정치적 자주 위기, 2. 일본의 사치품에 의한 조선의 전통 산업 파괴, 3. 일본은 서양의 적과 같으며 천주교가 확산되어 전통 예의의 위기 조장(왜양일체론), 4. 일본인에 의한 재산과 부녀자 약탈의 위기, 5. 금수(짐승)와 같은 일본과 문화 민족인 우리가 교류할 때에 도래할 문화의 위기를 들었다.

기존의 위정척사론의 중심이 서양 오랑캐에 반대하는 것이었다면 개항 이후부터는 서양 오랑캐와 일본은 동등한 일체(倭羊一體論)로 본 것이다. 이는 일본의 조선 침략 야욕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척왜의 논리는 화이적 명분론에 의해서 서양을 금수로 여기던 서양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그는 일본이 지난날의 일본이 아니라 바로 양적(洋敵)의 앞잡이라고 보고 왜양분리론을 비판하고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척왜의 대응논리를 수립한 것이다.

3 조선책략의 전파와 영남만인소

제2차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은 일본에 다녀온 뒤 주일청국공사관 참찬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왕에게 전달하였다. 『조선책략』에는 조선의 외교 정책이 ‘친청국(親淸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해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수록되어 있었다. 여기서 미국은 강대(强大)하고 공명(公明)한 정의(正義)의 나라로 조선에 대해서 이를 얻을 욕심은 없고, 오히려 조선을 이롭게 할 것이라 하여 미국과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할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또한 영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여러 서구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해 문호를 개방할 필요성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그러면서 산업과 무역의 진흥을 꾀하고 기술을 습득해 부국강병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그 구체적인 방략을 여러 항목에 걸쳐서 상세하게 제시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에 관심을 가지고 서구열강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안동 및 상주 등지의 영남 유생들은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면서 조정의 개화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李晩孫)을 중심으로 만인소를 올려 조정의 개화 정책을 비난하고 그 추진자들을 규탄하였다. 이른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종래에는 사교(邪敎)를 엄금했고, 또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에도 통상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을 펴면서 서양오랑캐를 강력하게 토벌했는데 오늘에 와서는 이들과 손을 잡으려 하는 것을 개탄하였다. 이어 일본의 간교함을 지적하면서 그들과의 결탁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지적하였다. 또한 미국은 알 수 없는 나라인데 이를 끌어들여 그들의 꼬임과 요구에 말리면 감당하기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쓸데없이 러시아를 자극하는 것은 이들의 침범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황준헌이 주장한 외교 정책은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처럼 영남만인소에서 구미 여러 나라와 일본의 야심을 논파하고 부당성을 제시하면서 쇄국을 주장하고, 기독교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따라서 『조선책략』의 내용은 망어(妄語)가 아닐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영남만인소에 표현된 위정척사파의 주장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외면했다는 비판도 공존한다. 또한 강화도조약 이후 표면화된 국내의 개화와 척사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기에 이르렀다는 점도 중요한 부분이다.

4 의병의 사상적 배경이 되다

위정척사사상의 시대적 한계는 분명하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으로 발전하여 특히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원이 되었다. 의병항쟁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함에 그치지 않고 직접 참여한 세력들도 있는데 화서학파, 정재학파, 남당학파, 노사학파가 대표적이다.

화서 이항로는 화서학파의 창시자로 조선후기의 극심한 당쟁의 와중에서 서인-노론계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평생토록 경제적 곤란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연구와 후학교수에 힘썼다. 원래 이항로는 일개 향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학파라고 부를 만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영오(柳榮五)와 교류하면서 서력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김평묵의 수제자 홍재구에 의하면, 유영오는 재력이 넉넉하여 ‘가력파요(家力頗饒) 유고팔주지풍(有古八廚之風)’이라고 칭해질 정도였다. 이 같은 넉넉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재사들을 초치하여 숙식을 제공하며 이항로에게 수학하게 하였다. 화서학파는 유영오의 적극적인 인적, 물적 지원에 힘입어 형성되었다.

이항로는 유영오와 제휴관계를 맺은 다음에야 청주에 있는 송시열의 묘소를 참배하고 화양동에 들어가 만동묘(萬東廟)를 참배하였다. 또 다음 해 가을에는 유영오와 함께 송시열을 모신 여주의 대로사를 찾아가 참배하고 돌아왔다. 유영오는 안동 김씨 세도정권 하에서 이조, 병조 정랑, 사헌부 장령, 사간원 정언 등 이른바 요직을 두루 역임했지만, 당색이 북인이었기 때문에 고위직인 당상관에 진출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영오는 척족세도 중 풍양 조씨 내지 풍양 조씨 후원세력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그들의 논객으로서 북인을 대표하여 안동 김씨를 공박하는 상소를 올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상으로 미루어볼 때 유영오는 친안동 김씨계 산림들에 대항하여 풍양 조씨를 재야에서 후원할 재야여론집단을 형성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양근현으로 낙향하여 이항로와 제휴관계를 맺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컨대 이항로는 풍양 조씨의 논객이자 고흥 유씨의 종장인 유영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또한 유영오를 통하여 풍양 조씨 척족의 도움을 받아 조정이 인정하는 재야학자로 부상하였다.

화서 이항로는 병인양요 때 서양과의 강화를 반대하고 주전(主戰), 척화론(斥和論)을 전개하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사상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10년 동안 독학하여 주희, 송시열 등의 저작에 담긴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에 입각한 배외적 민족주의를 깊이 사숙, 체득하였다. 이후 그는 대외적으로는 서양의 사상, 종교, 물품의 유입을 막고, 대내적으로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남인세력의 발호를 저지함으로써 대표적인 위정척사론자가 되었다.

그의 문하에서 김평묵, 최익현, 박문일, 유중교, 유인석, 홍재구, 홍재학 등이 배출되어 화서학파를 이루었다. 이들은 이항로 사후 스승의 강학처인 양근현의 벽계정사(蘗溪精舍)를 비롯하여 경기, 강원, 충청, 황해, 평안, 전라도 등에 널리 퍼져 활발한 강학활동을 전개하여 1900년 이후 전국 각지에 포진한 위정척사파 중 최대세력을 이루었다.

화서학파의 활동을 보면 1873년(고종 10)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그를 하야시켰으며, 1876년(고종 13) 개항을 반대하는 집단 상소운동을 일으켰고, 1881년(고종 18) 신사척사운동 때 고종 및 민비정권을 비판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을미왜변 후부터 대한제국 멸망 직전까지 국내의 제천, 평산, 춘천, 홍천과 국외의 간도지방과 연해주 등지에서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서학파의 반개화(反開化), 항일(抗日)운동은 최대 규모로 장기간 지속되어 이후 일제강점기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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