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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의병[乙巳義兵]

을사조약 후 한말 의병 참여의 신분층이 저변으로 확대되다

1905년(고종 42)

1 개요

을사의병(乙巳義兵)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乙巳條約)’ 강제 체결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1907년 전반기에 걸쳐 일어나 활동한 의병을 가리킨다. 충청지역에서는 민종식(閔宗植)이 홍주성(洪州城) 전투를 이끌었고, 호남과 영남지방에서는 최익현(崔益鉉)과 신돌석(申乭石)이 활약하였으며 그 외에도 각계각층의 의병들이 활동했다. 1890년대 을미의병의 위정척사적 성격에서 탈피하여 구국의 일념이 거병의 이유가 되었으며 전술적인 면에서도 한 단계 더 향상되었다.

2 을사조약 후 의병의 시작

1894년 청일전쟁 이후에 을미사변(乙未事變), 단발령 등 잇따른 사건으로 을미의병이 발생한 지 10년 후, 을사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그 시대적 배경은 바로 러일전쟁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았고 그 여세를 몰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을 강행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 두 번의 전쟁을 통해 일본은 한반도에서 그 영향력을 대폭 확대했다.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소식은 국내 각지로 전달됐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신문이었다.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을사조약’ 체결의 전말을 전국에 널리 알렸다.

그러자 전국적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확산되었다. 이때 의병이 다시 일어나 일본에 대한 저항이 전개되었다. 북간도와 상해, 시베리아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계봉우(桂奉瑀)는 당시 의병에 대해 『독립신문』에서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을사의병 이전,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이후부터도 의병활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다. 이때부터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등의 신문에 의병의 활동이 보도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을사의병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을사의병은 1907년 7~8월 사이에 발생한 고종의 강제퇴위와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을 계기로 격화된 정미의병과 연속선 상에 있었다.

3 삼남지역에서 각 계층의 격렬한 저항이 펼쳐지다

을사의병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다양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우선 원용팔이 포수들을 중심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거병하였다. 또한 홍주(洪州) 지역에는 이미 항일세력이 대규모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청양(靑陽)과 홍주를 중심으로 예산(禮山)·부여(扶餘)·보령(保寧) 등지에 항일세력이 모여 있었다. 1906년 봄에 전(前) 참판(參判) 민종식은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민종식은 의병장에 추대되어 군자금을 내놓았다. 민종식의 의병부대는 예산(禮山)에 집결한 후 홍주성을 공격하여 관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청양군 화성면 합천(合川)에서 일본경찰대와 관군의 공격을 받고 패전했다.

민종식의 의병부대는 합천전투에서 패배한 후 홍주성 탈환을 위해 절치부심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민종식은 체포를 면한 의병들과 함께 1906년 5월 9일 홍산(鴻山)의 지치(支峙)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켜서 5월 20일 홍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일본에 의해 성을 다시 빼앗기기 전까지 민종식의 의병부대는 일제 군경의 공세를 차단해냈으나, 5월 31일에 일본 군경의 기습 작전에 패퇴했다. 일제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한국 주둔 일본군)을 동원해 민종식의 의병부대를 탄압했다. 1906년 5월 31일에 벌어진 홍주성 공방전은 을사의병 시기 가운데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전투였다. 민종식은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 계획하였으나 결국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계획이 실현되지 못했다. 일제는 홍주성을 점령한 뒤 중심인물 9명을 쓰시마(對馬島)로 보냈다.

한편 민종식이 홍주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과정에서부터 해산 후 재기를 모색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이남규(李南珪)가 깊숙이 관계하고 있었다. 그는 민종식의 홍주지역 의병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핵심인물들을 후원하였으며 의병장 민종식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이남규는 민종식의 홍주지역 의병이 잔여세력이 각지로 흩어져 재기를 도모할 때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일제는 이남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결국 이남규는 1907년 9월 충남 아산군(牙山郡) 부근에서 일제 군경에 의해 살해당했다. 한편 일제에 잡히지 않은 안병찬 등의 인물은 충청남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이들의 활동은 1910년대 항일비밀단체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활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호남지역에서 최익현(崔益鉉)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최익현은 영남지방의 항일세력을 의병으로 규합하여 상호 연계 하에 연합작전을 전개하려 했다. 최익현은 태인의병을 주도했다. 태인의병은 민종식의 홍주의병과 더불어 을사의병을 대표하는 의병 중 하나이다. 최익현은 무리한 경복궁 재건으로 문제가 된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과정과 함께 1876년 개항불가 상소를 올려 더욱 주목받기 시작한 인물이다. 그는 ‘을사조약’ 직후 ‘을사오적’을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를 계기로 의병을 일으켰다.

1905년 12월 말 최익현은 논산군(論山郡) 노성(魯城)의 궐리사(闕里祠)에서 개최한 집회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구상하였다. 그는 이때 구국투쟁을 결의한 약문(約文)을 만들어 친일세력을 처단하고, 상소투쟁 등 7개 항을 결의했다. 이와 같이 최익현은 일본에 무력으로 저항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도, 상소와 격문을 통해 의병투쟁의 정당성을 위한 활동도 전개했다.

최익현은 1906년 6월에는 전라북도 태인(泰人)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봉기한 지 1주일 만에 의병 약 900여 명이 모였다. 태인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대한제국 정부는 최익현에게 의병해산을 요구하는 고종의 칙유(勅諭, 임금이 몸소 이르는 말이나 포고문)를 전달했다. 최익현은 대적해야 할 상대가 관군이었기 때문에 동족과는 싸울 수 없다는 이유로 의병을 해산시킨 후 체포되었다.

한편 양반관료 출신인 민종식과 최익현과 달리 평민 출신 의병장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평민의병장 휘하에는 양반 유생층과 관인이 참여해 활동하고 있었다. 양반과 평민 두 계급이 지휘부와 병사부 양 측에 포진해 있었던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에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고자 신분상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기 때문이다.

평민출신 의병장 가운데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신돌석 부대는 영양(英陽)과 청송(靑松) 등의 내륙지방만이 아니라 울진(蔚珍) 등의 해안가를 넘나들며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6년 6월 영덕을 장악한 후, 9월에 영양을 점거했던 활동이 주목된다. 그러나 곧 일제 군경의 공세에 직면하여 일시적으로 활동을 중지했다. 이후 1906년 11월경 신돌석 부대는 영양의 일월산(日月山), 대둔산(大遯山) 일대로 근거지를 옮긴 후 1907년 봄에 활동을 재개했다. 이때 신돌석 부대는 1908년 11월 신돌석이 영양과 영덕 등지를 비롯한 경북 내륙과 동해안 일대를 무대로 활발하게 전투를 전개했다. 그 밖에도 영천(永川)·경주(慶州)·청송 일대에서 정환직(鄭煥直)·정용기(鄭鏞基) 부자의 산남(山南)의진, 진보(眞寶)·영덕 일대에서 유시연(柳時淵) 의병부대 등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8년 후반기로 접어들며 일본의 공세와 물자 부족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의병투쟁을 지속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특히나 당시는 일본이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의병이 전력에서 이탈하던 시점이었다. 이 시기에 신돌석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로 가서 의병활동을 재개하려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유인석, 홍범도 등 다른 의병장들도 점차 만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당시 신돌석도 같은 선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주 이동을 실행으로 옮기기도 전인 1908년 12월 영덕 부근에서 자신의 옛 부하에게 살해되면서 그의 의병활동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4 참여층과 전술 면에서 발전한 의병투쟁

을사의병은 을미의병당시의 인물들과 인맥적으로 상호 연계되어 있었다. 이미 을미의병 당시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다시 참여하여 주도세력을 형성했다. 원주의병의 원용팔(元容八), 단양(丹陽)의 정운경(鄭雲慶), 홍주의병의 안병찬(安炳瓚)이 그러한 사례였다. 그 외에도 영해지역의 신돌석도 을미의병에 참여한 전력을 갖고 을사의병에 참여한 것이다.

을사의병은 시기적으로 을미의병과 정미의병의 중간에 위치한다. 형태상으로도 중간적 발전 단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 안목으로 본다면 을사의병은 을미의병보다 정미의병에 더 가까운 양상을 보여준다.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되는 의병전쟁의 양상이 이 단계에서 그 틀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어떤 점에서 발전하였는가? 참여층의 확대, 의병부대 간의 연합, 무력과 선전전을 병행하였다는 점이 그러하다. 을사의병은 을미의병당시 한계로 지적된 지역성, 학연성, 혈연성을 어느 정도 극복해 가는 경향을 보여준다. 또한 을사의병은 전술적인 면에서 을미의병과 두드러진 차이를 보여준다. 을미의병 당시 수만, 수천의 대단위로 구성된 의병부대와는 달리 의병 발생 빈도가 증가하고, 부대별 의병의 참여자 수가 줄어들었다. 이는 상당수의 포수와 포군 등이 가세한 것과 연동한 전술상의 변화로서, 정미의병기에 보편적 전술인 유격전이 이 시기부터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무렵에는 산악지대가 의병의 근거지로 점차 그 비중을 더해가게 된다. 그만큼 일제 군경을 상대로 한 전투가 치열해져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위와 같은 변화는 을사의병 시기에 이르면 의병이 정예화되며, 의병부대에 참여하는 신분층이 저변으로 확대되었다는 사실도 의미한다.

그 가운데 농민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을사의병 초기 단계에서 농민층이 주축이 된 ‘농민의병’이 다수 출현했다 이들의 출현은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맥락과도 닿아있지만, 동시에 경제적 원인도 있었다. 농민은 농촌의 장시(場市)를 방어하고 농촌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특히 쌀의 해외유출과 관련하여 농민층은 쌀의 유출을 막고자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농촌 경제의 방어는 유생 출신 의병과도 경제적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유생 의병장들의 격문과 실제 투쟁 과정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다.

한편 을사의병 시기에는 참여층의 저변이 확대된 것에 더하여, 부대와 부대 간 연합전선을 모색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사례는 최익현의 태인의병이었다. 호남지역에서 의병세력을 규합하였던 최익현은 민종식의 홍주의병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또한 최익현의 부대는 영남지방 의병세력과의 연계도 시도하였다.

마지막으로 을사의병 시기는 일본의 부당한 행동에 대해 선전과 외교전이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최익현의 태인의병, 민종식의 홍주의병은 외국 공사관을 상대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성토하여 외국의 지원과 협조를 요청했다. 특히 최익현은 일본 정부에 항의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선전·외교전이 병행된 이유는 일제에 저항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지원과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을사의병 시기에 이르면 의병부대들은 국제관계의 존재와 현실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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