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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乙巳條約]

국제사회에서 대한제국의 이름표를 빼앗기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 대표 이미지

한일협약도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을사조약(乙巳條約)’은 1905년(고종 42) 11월 17일 일본군의 포위 속에 대한제국의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고 통감(統監)과 이사(理事)라는 일본 관리를 파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일제 식민지배의 기초 작업을 시행하였다. 대표적으로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통해 한국의 중앙과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통치 기구의 초기 형성 과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을사조약’은 조약안 원본의 제목이 없는 탓에 그 공식 명칭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학계에서는 다양한 견해를 담아 ‘을사조약’,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韓日協約)’, ‘한일협상조약(韓協商條約)’, ‘한일 외교권 위탁 조약안(韓日外交權委託條約案)’ 등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용어인 ‘을사조약’을 사용한다.

2 을사조약의 체결 배경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정한론(征韓論, 19세기 말 일본 정계에서 유행한 논의로, 일본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사상)이 등장한 1860년대부터 일본이 계획해오던 ‘한국 보호국화’라는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핵심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한국 내의 모든 외국공관이 철수했으며, 해외의 한국 공관 역시 모두 철수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제사회라는 무대에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조약체결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1900년 이후 일본은 한국 보호국화를 국제법상 합법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을 둘러싼 열강과 한반도 문제를 치밀하게 조율했다. 대표적인 협정으로는 1902년 영국과 일본 사이의 제1차 영일동맹(英日同盟), 1905년 미국과 일본이 한국 문제를 협의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러시아와 일본이 러일전쟁 후처리 문제를 협상했던 포츠머스 조약을 예로 들 수 있다. 1905년 7월 말 가쓰라와 태프트의 회동 이후 제2차 영일동맹을 거쳐 포츠머스 조약까지 체결하는 데 소요된 기간은 39일에 불과했다. 이외에도 한국을 일본 지배 아래 편입한다는 사항에 미국과 독일이 의견을 일치한 1904년 카이저-루스벨트 합의, 1905년 프랑스의 총리이자 외무장관을 겸임했던 루비에(Maurice Rouvier)와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 버티(Bertie)의 한반도 문제 협의 등 서양 강대국 간의 합의 또한 이루어졌다. 이렇듯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는 근대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와 식민지분할을 꾀하는 제국주의 열강의 정책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국제관계사를 조망해볼 때, 한국은 힘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다. 청과 조선의 밀접한 조공책봉관계(朝貢冊封關係)가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단절된 이후는 더욱 그랬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힘의 공백 상태가 조성되자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등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지닌 주변 열강들은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에서 세력균형을 이루기 위해 경쟁과 협상을 벌였고, 의견을 협의하고 절충하는 과정을 거쳤다. ‘을사조약’의 체결은 제국주의 열강이 힘을 앞세워 세계질서를 강제로 재편하는 흐름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이토 히로부미의 방한과 강요된 을사조약 체결

러일전쟁을 기습적으로 도발한 일본은 개전과 더불어 군대를 한반도에 주둔시켰다.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2.23.)와 제1차 한일협약(第一次韓日協約, 1904.8.22.)의 체결을 강제하여 한국의 정치, 군사, 재정, 외교 부문에 간섭하는 고문(顧問)정치를 시행하였다. 일본군이 러시아 최정예 발틱 함대를 무찌르자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예감한 일본 정부는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905년 4월 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는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는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 업무를 일본이 대행하고, 대한제국의 시정(時政)을 감독하기 위한 주재원(駐箚官)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이후 1905년 7월에서 9월에 걸쳐 한국 보호국화에 대한 미국, 영국, 러시아의 암묵적 동의 혹은 지지를 받아낸 일본은 10월 27일 ‘한국보호권확립실행에 관한 각의결정’을 발표해 ‘을사조약’의 초안을 마련하고,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한국 내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맡겼다. 하야시 공사는 심상훈(沈相薰) 등의 원로 대신을 통해 조약 체결에 대한 고종의 의사를 확인하고, 학부대신(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 등 대신들에 대한 매수 작업도 진행하였으며, 한국 주재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도움을 얻어 궁궐 주변과 서울 일원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천황의 친서를 가지고 한국 땅을 밟았다. 11월 9일 손탁 호텔에 여장(旅裝)을 푼 이토 특명전권대사는 이튿날인 11월 10일 입궐해 고종을 알현하고 천황의 친서를 전달했다. 거기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장래의 분란을 방지하기 위해 두 나라의 결합을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곧바로 보호조약을 체결하려는 이토와, 자신의 병환을 핑계로 알현을 거부하는 고종의 만남은 11월 15일에야 이루어졌다. 이토는 이 자리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담은 조약안을 내놓으며 인장(印章)을 찍을 것을 강요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제국의 외무부서인 외부(外部)를 폐지하고, 외교부를 일본 도쿄로 옮겨 모든 외교권을 일본에 위탁한다. 둘째, 서울에 주재하는 공사를 통감(統監)이라고 개칭한다. 셋째, 서울 및 각 개항장에 주재하는 영사(領事)를 이사(理事)로 개칭한다.

이에 대해 고종은 외교 사무에 관한 일본의 감독을 받더라도 독립국가로서의 외교 권한만큼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토는 변통할 여지가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조약안을 거절할 경우 조약을 체결하는 것보다 더 곤란하게 될 것이라는 협박 또한 덧붙였다. 고종이 신료(臣僚)의 자문과 인민의 의향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항변하자, 이토는 대한제국 정부의 의견을 대표하는 대신(大臣)들의 의향을 묻는 것만을 용인했다.

11월 16일에는 이토 특명전권대사가, 11월 17일에는 하야시 공사가 각각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불러 조약안 체결에 대한 협력을 요구했다. 대신들은 고종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면서 협약안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야시 공사는 대신들을 이끌고 일본군이 궁궐 주변을 삼엄하게 경비하는 경운궁(慶運宮)으로 향했다. 오후 4시에 시작된 대신들의 어전회의(御前會議)는 7시가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오후 8시경 고종은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이재극(李載克)을 통해 이토에게 대신들이 조약을 반대하니 협의 확정을 유예해달라고 알렸다.

소식을 들은 이토는 즉시 하세가와 사령관과 사토 마쓰타로(佐藤松太郞) 헌병대장과 함께 입궐하여 고종을 알현하고자 하였다. 고종이 신병(身病)을 이유로 거부하자 이토는 어전회의장으로 가서 대신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조약 체결에 관한 찬반 여부를 묻기 시작했다.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은 극구 반대하다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감금당했으며,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와 법부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또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나머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권중현(權重顯)은 찬성을 표했다. 이 다섯 명의 대신이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이토는 대신 8명 중 5명이 찬성했기에 다수결에 의해 조약안이 가결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이후 군대를 이끌고 외부대신의 직인(職印)을 탈취하여 조약에 날인함으로써 ‘을사조약’은 체결되었다. 강제로 체결된 조약임을 반영하듯 조약안에는 대한제국의 최고 통치권자인 고종의 직인이 찍히지 않았다. 이는 당시 국제법상 합법적인 보호국화를 추진하던 일본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따라서 이후 일본은 고종에게 조약안에 날인하라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가하게 된다. 그렇다면 ‘을사조약’ 체결 이후 상황은 어떠했을까.

4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치권의 실질적 이양

‘을사조약’의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고, 통감부와 이사청을 설치하여 한국 보호국화의 작업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우선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실질적인 과정을 살펴보자.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대한제국에 주재하던 외국 공사관과 외국에 주재하던 대한제국 공사관이 모두 철수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각국에 설치된 공사관은 대외적으로 국가 사이의 교섭 업무를 담당하는 진지(陣地)이자 공식적 외교 루트였을 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에 거주하는 재외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도 했다. 이러한 공사관이 대한제국에서 철수한다는 것은 곧 대한제국과의 직접적인 외교 관계가 단절됨을 의미했다. ‘을사조약’ 이후 영국, 러시아, 미국 등 각국이 대한제국과의 외교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공사관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한 국가의 외교권이 박탈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였다.

일본 정부는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11월 20일과 21일에는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에 주재하는 일본 공사로 하여금 해당 정부에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이 조인된 사실을 알리도록 훈령(訓令)하였으며, 22일에는 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벨기에, 덴마크에 주재하는 일본 공사에게 똑같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또한 11월 23일,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에 서울에 있는 미국 공사관을 철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튿날인 24일, 주한미국공사 모건(Edwin Vernon Morgan)에게 공사관의 철수를 공식적으로 통보하였다. 한국과의 외교 문제는 앞으로 워싱턴에 주재하는 일본 공사관이나 도쿄에 주재하는 미국공사관을 통해 실행될 것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모건 공사는 철수 명령을 받은 지 4일 뒤인 11월 28일,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한미의 직접적인 외교 관계가 종료되었음을 공식 통고하고 철수를 결정하였다. 미국공사관이 첫 번째로 철수를 단행하자, 이후 한국과 수교 관계를 맺은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덴마크,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 역시 차례차례 공사관을 철수하였다.

이렇듯 한국 내부의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일본 정부는 1905년 12월 20일 통감부 및 이사청을 설치하는 내용을 담은 칙령(勅令, 황제가 직접 내리는 구두 명령으로 법적 효력이 인정됨) 240호를 공표하고, 이튿날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으로 임명하였다.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통감부 설치까지 한 달 이상이 소요된 이유는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공사관이 한국에서 모두 철수하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을사조약’에 따른 통감의 권한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는 것이었으나, 칙령에 따른 통감의 권한은 그것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통감은 한국 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조선에 주재하는 일본 사령관에게 무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고, 한국 내정에 필요한 것이라면 중앙 정부나 지방관에게 명령하여 집행할 수 있었다. 이사청은 서울 및 각 개항장의 영사관(領事館)이 개칭된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제가 이사청을 통해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즉, 일본 정부는 통감부와 이사청을 통해 대한제국의 중앙과 지방 통치 권한을 장악하고, 이를 일제 식민지배의 전초 작업으로 삼았다. ‘을사조약’은 1910년 한일병합을 예고하는 프롤로그이자, 한국 보호국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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