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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문화정치’

다양한 친일 세력을 육성하여 식민 통치의 안정을 꾀하라

1919년

1 머리말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은 비록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나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일제는 단지 총칼로 무장한 권력에만 의존해서는 식민통치가 안정되지 못하며, 비용 측면에서도 효율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개량적인 통치정책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변화에는 일본 정계에 서민 출신인 하라 다카시(原敬)가 수상으로 취임하여 이른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가 열린 것도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10년대의 ‘무단통치’와 대비해 ‘당근과 채찍’을 병행한 1920~30년대의 통치방식을 ‘문화정치’라 부른다. 무력에 기초한 식민지배정책이라는 점에서 문화통치와 무단통치는 본질상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군이 치안을 직접 담당하던 헌병경찰체제에서 문관인 보통경찰이 치안을 전담한 보통경찰체제의 성립, 민족운동을 분열시켜 체제 내로 흡수하기 위한 민족분열정책과 조선인 대우 및 지방제도 개선 등 부분적인 양보 정책(=개량 정책)을 추진했다는 면에서 현상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책의 변화와 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식민 지배정책의 수정

한반도를 뒤덮었던 3·1 운동의 열기가 다소 가라앉은 1919년 4월, 일본 내각 수상 하라 다카시는 당시 군부를 대표하고 있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육군대신(陸軍大臣)과 협의한 후 식민지 조선의 지배정책 개혁안으로 4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문관(文官) 위주로 제도를 개정할 것,
둘째, 교육은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동일 방침을 취할 것,
셋째, 헌병제도를 개편하여 경찰제도로 할 것,
넷째, 조선을 일본의 연장으로 인정하여 조선을 동화(同化)할 것

이러한 원칙에 기초하여 하라 수상은 조선 총독을 무관이 아닌 문관 출신으로 교체하고 조선총독부의 관제를 개혁하였다. 1919년 6월 조선총독부 관제개정안이 일본내각을 통과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8월 12일 예비역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조선총독(朝鮮總督)에, 내무관료 출신의 미즈노 렌타로(水野練太郞)가 정무총감(政務總監)으로 임명되었다. 9월 서울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시정방침훈시」에서 관제개정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관제개혁’의 취지는 지금 폐하의 조칙(詔勅)에 지시된 바와 같이 …… 총독은 문무관의 어느 쪽에서도 임명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다시 헌병에 의한 경찰제도를 보통 경찰관에 의한 경찰제도로 대치하고 다시 복제를 개정하여 일반 관리·교원 등의 제복대검(制服帶劍 : 제복을 입고 칼을 차는 것)을 폐지하고 조선인이 임용·대우 등에 고려를 가하고자 한다. 요컨대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에 따라 정치상·사회상의 대우에 있어서도 내지인(內地人 : 일본인)과 동일한 취급을 할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일제가 표방한 ‘문화정치’에 의한 관제 개정이 사실상 그 본질에서는 무단통치와 같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총독정치의 기본을 순전한 문화정치로 한다는 방침을 명백히 하고 크게 문화적 개발에 힘을 기울이기 위하여 보통 문화정치라고 일컬어지지만 반도통치(半島統治)의 근본방침에 있어서는 조금도 상이한 바가 없다. 그 시정상의 강령은 치안 유지, 민의 창달, 행정 쇄신, 국민생활 안정, 문화 및 복리 증진 등이다. (조선총독부, 『시정25년사』, 314~315쪽)

이러한 방침에 따라 사이토 총독은 다섯 가지 강령을 시행하기 위해 ‘경찰제도 혁신, 교육의 보급·개선, 산업 개발, 교통·위생의 정비, 지방제도 개혁, 사법상의 개혁’ 등 제도 개선을 추진했다. 이 제도 개선 중 핵심은 경찰제도, 즉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바꾼 것이다.

3 보통경찰체제의 수립

3·1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 일제는 탄압의 제1선에 서있던 군을 제2선으로 물러나게 하고 대신 문관인 경찰이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보통경찰체제로 전환하였다.

보통경찰체제의 수립을 위해 일제는 조선총독부 본부의 관제 개정과 더불어 지방관 관제를 개정했다. 첫째, 지방관 관제 밖에 있던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했기 때문에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와 각 도 경무부는 폐지하였다. 대신 각 도지사로 하여금 경찰권을 대행시키게 하고 그 아래 제3부를 두어 도사무관으로 하여금 제3부장으로 삼고 지방 경찰·위생사무 등에 관해 지사의 명을 받아 부하를 지휘감독하게 했다. 그리고 1921년 2월 지방관 관제 중 제1부를 내무부로, 제2부를 재무부로, 제3부를 경찰부로 고쳤다. 둘째, 지방에 경찰서를 두고, 과거 헌병분대 또는 헌병분견소를 두어 경찰서를 두지 않은 지방에도 이를 보급하게 했다. 셋째, 경찰서 확충에 따라 다수의 경찰관을 필요로 하게 되어 새롭게 경찰관강습소를 두어 신진 경찰관리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도지사에게 경찰권이 부여됨에 따라 도지사는 일반행정과 경찰행정을 통일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문관경찰제도가 확립하여 일반행정기관과 경찰행정기관이 일체화됨에 따라 총독부와 도의 지배력이 크게 강화되게 되었다. 그리고 1부·군 1경찰서, 1면 1주재소를 원칙으로(필요한 곳은 2개 이상의 경찰서 또는 주재소를 설치) 전국에 경찰기관을 확장하는 한편, 경찰서장은 경시 또는 경부가 맡고 경부 밑에 경부보와 순사를 두었다. 특히 종래 조선인에 한해 임명했던 순사보를 ‘내선차별의 철폐’라는 이름 아래 폐지하는 대신 조선인 순사보를 모두 순사로 진급시켰다.

그렇지만 군이 치안유지 기능에서 손을 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대를 증파하는 한편, “헌병은 군사경찰 및 국경의 감시에 관한 것은 조선군사령관, 행정경찰·사법경찰에 관한 것은 조선총독의 지도를 받는다.”(1919년 8월 19일, 칙령 397호 제2조)고 하여 헌병이 일반 행정경찰과 사법경찰에 관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20년대와 1930년대 전반에 걸친 식민지 조선의 치안은 ‘경찰과 헌병을 주체로 하고 군은 그 후거(後據 : 일종의 차선책)임을 원칙으로 삼고, 각 위술지(衛戌地)에서 오로지 교육·훈련에 임하며, 상황에 따라 지방관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는 것을 본칙(本則)’(『조선군사개요사(朝鮮軍槪要史))으로 하는 기본 틀로 유지되었다.

보통경찰체제가 수립됨에 따라 군이 치안유지의 전면에서 물러나 그 역할을 문관경찰에 위임하게 되자 경찰 자체의 힘을 증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번져나가자 경찰의 기능 강화와 인적 보충을 강요받았다. 이에 따라 ‘문화정치’를 강조한 사이토의 통치 하에서 식민지 조선의 경찰력은 오히려 그 전에 비해 현저한 증가를 보였다.

먼저 경찰관서와 경찰관의 변화를 보자. 경찰관서의 경우 1919년에는 736개소이던 것이 1920년에는 6,387개소로 3.6배로 증가했고, 경찰관의 경우, 헌병과 경찰을 합쳐 14,501명이던 것이 1919년 8월 제도 개정 이후에는 16,897명으로 약 2,400명이 증원되었고, 1920년 1월 이후 제2차 경무기관 확장으로 약 4,250명이 추가 증원되었다. 다소의 변동은 있지만 중일전쟁 전까지 2만 명을 전후하여 경찰력을 유지하다가, 1939년부터 23,000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물리적 수단으로서 경찰이 식민지배 기간 내내 주요한 역할을 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른바 ‘보통경찰체제’ 하의 2만 명에 이르는 경찰관은 전체 식민지 관리 10만 명(면리원 포함)에서 약 20% 이상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치안기구가 양적으로도 통치기구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어 이른바 ‘경찰국가’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문화정치’에 의한 보통경찰제 수립은 물리력에 의존한 식민지배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경찰력을 강화시켜 조선민족에 대한 감시와 탄압의 강도는 더해 갔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을 하던 지바(千葉了)도 “사이토 총독이 새로 부임하자, 문명정치는 문약정치(文弱政治)라고 냉안시하고 보통경찰제는 백면서생의 탁상공론이라고 일소에 붙이면서 새 통치책의 실패를 예견했던 사람들도 점차 무단군헌(武斷軍憲) 이상의 위력을 새 경찰력에서 발견하게 되었다.”(『조선독립운동비화(朝鮮獨立運動秘話)』)고 하여 ‘문화정치’가 ‘무단통치’ 이상으로 조선을 지배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인정했다.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1920년대의 이러한 변화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10년대는 식민지배 구축기로서 군사적 통치를 통해 행정의 전반을 관장할 수밖에 없었다. 헌병경찰의 행정 관여는 중앙의 식민권력이 지방에 이르게 하는 데는 효율성을 가져다주고 일단은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가능하게 했으나, 동시에 그것은 3·1 운동에서 나타나듯이 노골적인 무력 지배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에 대처하기 위해 일제는 군을 통치의 1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공간을 문관관리(문관경찰)로 대체함으로써 조선인의 불만을 무마한다는 소극적인 정책과 더불어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畵) 등을 통해 그 수익의 일부를 조선인 자산가들에게 분배하여 식민지 체제내로 끌어들임으로써 안정된 기반하에 식민지 수탈을 추진한다는 적극적인 정책을 계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920년대는 1910년대에 비해 군이 굳이 통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식민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고, 식민체제가 상대적인 안정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4 일제의 유화정책

사이토 총독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몇 가지 유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총독부 산하 소속 관서 직원의 제복을 폐지함으로써 3.1운동 이후 격렬해진 조선인의 항일의식과 민심을 회유·무마하고자 했다. 총독부 직원의 제복 착용은 대만총독부 제복을 모방하여 통감부 시절부터 착용해 왔으나, 강점과 더불어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제복 착용을 극도로 권장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초등학교 교사도 옷소매에 금줄이 하나 있는 제복을 착용하고 칼을 허리에 찬 채 교실에 들어갔을 정도였다. 이러한 제복 폐지와 착검 금지는 형식상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생긴 상징적인 조치였다.

그리고 무단통치하에서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던 언론, 집회 및 출판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등 한글신문사의 설립과 함께 정치·사회단체의 설립과 활동도 허가했다. 그러나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은 총독부의 허가주의 방침에 따라 금지되거나 제한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민의창달(民意暢達)이란 명목으로 지방유지의 소집 및 개정의 취지전달, 민정시찰원의 파견, 중추원의 회의 회합, 도참여관 소집 등을 시행하여 조선인 엘리트를 통한 민심 수습책을 펼쳤다.

3·1 운동 이후의 이러한 변화양상은 『구례유씨가의 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청결검사’를 나온 헌병의 태도가 “전에 비하여 백성에게 너그러운 모양”(1919. 8. 5)이라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찰의 고압적인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정책 변화가 통치의 말단에도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3·1 운동은 식민지 조선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각종 사회단체가 설립되고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주장을 제한된 공간이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 1924년 5월 13일자 일기에는 “주사 재종속이 근년에 스스로 소작회장이 되었는데, 몰래 부자의 촉탁을 당하여 본서에 갇혀 있다고 하여 면회차 신문사에 가서 탐문을 하니 방금 풀려났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소작회장, 신문사 등 1910년대에는 등장하지 않던 단어들이 일기 속에 나타난 것이다.

5 민족분열정책으로서의 문화정치

일제는 민족운동에 대해 무력으로 탄압하는 한편, 친일파를 육성하고 민족부르주아의 상층부 및 동요분자를 체제내의 개량으로 끌어들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는 정책에 전력을 기울였다.

사이토는 먼저 사회의 다방면에 걸쳐 친일파를 육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1920)에서 그는 ‘친일파(親日派)’와 ‘배일파(排日派)’를 구분하고 ‘배일파’는 탄압하되 ‘친일파’에겐 사정이 허락하는 한 ‘편의와 원조’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1920년대 초부터 친일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활동하게 되는데, 이러한 정책은 친일과 배일 할 것 없이 일체의 결사를 금지했던 1910년대의 지배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친일파를 이용하여 민족운동의 열기를 약화시키려던 일제의 정책이 친일파에 대한 민중의 증오와 반대투쟁으로 실효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키자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민족부르주아지에게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한편 1919년 말 이후 정치단체를 제외한 결사의 자유가 인정되자 전국 각지에서 수천에 이르는 각종 단체가 결성되어 한국 민중에게 반일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이토는 “생각컨대 앞으로의 운동은 작년 봄에 일어났던 만세소요같이 어린아이 장난 같은 것이 아니라 근저로부터 실력 있는 조직적 운동이 될 것임을 미리 각오해야 할 것”이라 판단한 뒤 이 배일기운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사상(事象 : 배일기운을 뜻함)에 대해 압박을 주어 없앤다는 따위는 도저히 바라서는 안된다. …… 다른 방책이란 없고 위력을 동반하는 문화운동뿐이다. …… 기운은 이 운동을 위해 안성맞춤으로 옮겨가고 있다. 따라서 문화운동도 오늘만이 충분한 효과를 올릴 수 있는 전망이 확실한데 만약 이 기회를 놓쳐서 그들이 목적하는 바에 상당한 기틀을 잡은 뒤에야 갑자기 추세를 돌리려고 하더라도 일조일석(一朝一夕 : 짧은 시간)에 해낼 수는 없다. 이것이 우리가 특히 오늘날 문화운동을 촉진해야 한다고 힘주는 까닭이다.

‘위력을 동반하는 문화운동’이란 식민지 통치권력을 배경으로 위압과 회유로 실력양성을 지향하는 민족감정을 역이용해서 독립 부정의 방향으로 그 칼끝을 돌리게 한다는 뜻이다. ‘문화운동’이라는 이름아래 총독부가 이러한 배일기운을 본격적으로 이용한 것은 1921년 5월 이광수를 중국으로부터 회유 및 귀국시키고, 같은 해 6월 복역 중인 최린과 최남선을 형기 만료 전에 조건부로 석방하는 가출옥(假出獄)을 시키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 강령으로 실력양성, 참정권 획득청원(또는 자치청원), 민족성 개조(改造)라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민족주의 우파에 대한 선전공작에 들어갔다.

요컨대 일제가 내세운 ‘문화정치’란 3·1 운동으로 성장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고양에 대처하면서 식민지 수탈체제의 강화로 나타난 민심의 악화를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이라는 말로 은폐하는 한편, 민족부르주아의 일부를 실력양성주의, 문화주의라는 체제 내 개량주의로 끌어들여 조선 사회를 분열시키려는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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