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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동족끼리 겨눈 총구, 한인 무장부대의 통합이 비극으로 끝나다

1921년

자유시사변 대표 이미지

자유시참변지

국외독립운동사적지(독립기념관)

1 개요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은 1921년 6월 28일에 발생한 한인 무장부대의 충돌사건이다. 간도와 연해주 각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부대들이 자유시에 집결하여 무장부대를 통합하고자 했으나, 통합을 둘러싼 한인 무장부대 간의 견해 차이와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비일관적인 정책으로 인해 한인 무장부대의 통합이 좌절된 비극적 사건이다.

2 간도와 연해주 한인 무장부대의 자유시 이동 배경

자유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가는 아무르주에 위치한 자그마한 소도시다. 이 도시는 알렉세예프스크(Alekseyevsk)로 불리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 자유라는 뜻의 스바보드니(Svobodny)로 개칭되었다.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집결하고자 했다. 한인 무장부대들이 이곳에 모이고자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 이후 이어진 일본의 파상공세를 일시적으로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접경지대보다 더 안정한 지역에 무장부대의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 교섭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무장부대의 이러한 움직임에는 이동휘(李東輝)가 중심에 있었다. 한인 무장부대들은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 전투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으나, 일제가 이후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자 이전처럼 활동하기 어려워졌다. 따라서 내적으로는 무장부대를 통합할 필요가 있었고, 외적으로는 통합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의 협상이 필요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였던 이동휘는 무장투쟁에 기반한 대한민국임시정부 통합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의 교섭을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전권대사(全權大使)로 한형권(韓馨權)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1920년 8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 시베리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부대를 설치한다는 내용의 대일한로공수동맹(對日韓露攻守同盟)을 체결했다. 이는 외교독립론을 넘어 더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기회로 여겨졌다.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일본군의 추적과 무장부대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한인 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모였다.

특히 만주에서 온 무장부대는 이동휘와 관련이 깊었다. 북간도의 무장단체 중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의 홍범도(洪範圖)는 1910년대 연해주에서 의병투쟁을 할 때부터 이동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연해주에서 자유시로 이동한 부대는 니항(尼港)부대, 이만부대, 다반군대, 독립단군대(獨立團軍隊)였다. 이들은 자유시에서 연합하여 사할린부대를 조직하였다. 한편 연해주에서 온 한인 무장부대 가운데에서도 이동휘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자유시로 향하지 않았다.

3 한인 무장부대 통합 논의와 충돌

간도와 연해주에서 한인 무장부대가 자유시로 오기 전, 이미 자유시에는 자유대대(自由大隊)라는 한인 무장부대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은 1920년 4월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완충국가로서 설립된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의 제2군단의 특립대대(特立大隊)로 편입되어 있었다. 자유대대의 주선과 극동공화국의 후원으로 한인 무장부대들은 자유시 부근에서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를 조직하고 2천여 명 규모의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결성했다.

대한의용군의 내부 구성은 이질적이었다. 일제에 반대한다는 점은 공통적이었지만, 서로 다른 부대였던 장교에게 지휘를 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부대를 단일한 체계로 강력하게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사할린부대라 불린 니항부대와 자유대대가 대립했다. 연해주 지역에서 이동해 온 사할린부대는 자유시로 이동해온 최초의 한인 무장부대였다. 이들은 연해주에서 러시아 백위파(白衛派) 및 일본군과의 전투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강력한 전투력과 체계적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자유대대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했다. 자유대대는 아무르주 지역에서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한인들을 모집했다. 또한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를 양성했다. 이들은 자유시에 근거를 두며 한인 무장부대 통합의 주도권을 주장했다.

1921년 6월 19일 고려혁명군정의회는 한인 무장부대 군간부 전체회의를 소집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 중심으로 무장부대를 통합하는 결정안을 채택했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요청으로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이 된 칼란다라쉬빌리(Nestor Kalandarishvili)는 “6월 19일이야말로 한국혁명 역사에 가장 빛나는 기념일이 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는 군사통일이 달성되었으며, 과거의 모든 죄는 사면한다고 선언했다. 장교회의의 결의는 이튿날 모든 병사들에게 발표되었다. 병사대중은 환호를 터트렸다. 그러나 상황은 원만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사할린부대 측의 장교들은 이 결정에 반발했다. 사할린부대와 자유대대의 지도자들은 다시 갈등을 겪었다. 이에 칼란다라쉬빌리는 몇 차례의 권고와 타협을 시도했으나 해결되지 않자, 결국 사할린부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1921년 6월 28일 극동공화국의 군대는 사할린군대를 포위했다. 사할린부대 책임자는 극동공화국의 군대에 자유대대의 오하묵(吳夏默), 최고려(崔高麗) 등의 인물을 축출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극동공화국의 군대는 사할린부대 내에서 의견을 정리할 수 있도록 7시간을 주었다. 이 시간 동안 고려혁명군정의회와 사할린부대는 충돌을 피하기 위한 교섭과 회의를 계속했다. 그러나 결국 극동공화국의 군대는 작전의 실행을 미룰 수 없다는 이유로 사할린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6월 28일 오후 2시부터 시작됐다. 극동공화국의 기병대는 후방으로 진격했고, 기갑부대는 교량에서 포격을 실시했다. 결국 오후 5시경 사할린부대는 무장해제되어 생포되었다. 나머지 300여 명의 병사도 백병전 끝에 포로로 붙잡혔다.

4 충돌의 원인에 관한 이면

한인 무장부대 통합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은 당시 상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는 두 개의 공산당과 관련이 있었다. 이동휘(李東輝) 등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세력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달리,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1919년 결성된 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과 대한국민의회 세력이 주축이 되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달리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의 지원 아래에 움직였다. 두 개의 공산당은 통일된 고려공산당으로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서로 경쟁했다.

사할린부대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통합된 무장부대의 통수권(統帥權)을 쥐는 일은 공산당 건설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기반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한인 무장부대를 통합하기 위한 준비기관으로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가 조직됐다. 이 기관은 1921년 3월에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로 조직되었다가 1921년 5월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창당된 후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정식 승인으로 고려혁명군정의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고려혁명군정의회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주도세력으로 있었다.

무장부대 통합은 코민테른과 극동공화국에 의해서도 좌우되었다. 한인 무장부대가 자유시에 모이는 데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극동공화국의 초대수상인 크라스노쇼코프(Alexander Krasnoshchyokov)의 지원이었다. 그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인사회당은 극동공화국 아래에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極東局) 한인부(韓人部)를 조직하여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를 통합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극동공화국은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 일본의 직접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국(緩衝國)의 역할을 맡고 있었고,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 일본 사이에는 휴전협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크라스노쇼코프는 결국 1921년 4월에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 한인 무장부대의 통합을 지원하던 입장을 변경했다.

공교롭게도 1921년 1월에 극동지역의 공산주의 사업을 담당하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한자병기)가 조직되었다. 극동비서부의 책임비서 슈먀츠키(Boris Zakharovich Shumyatsky)는 이르쿠츠크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극동공화국과는 달리, 세계혁명운동의 중심 기관이었기 때문에 한인 무장부대를 통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에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코민테른과 극동공화국의 일관적이지 못한 태도가 문제를 심화시켰다. 시기와 책임자의 입장에 따라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방침이 달라졌다. 이처럼 극동공화국과 코민테른이 보여준 비일관된 정책은 한인 무장부대의 통합이 난항에 빠지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5 자유시사변의 결과와 그 의미

무장해제로 인한 사망자수에 관해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은 36명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현장에서 확인된 시신의 수에 불과하며, 상당수는 그 주위를 흐르는 제야강에 빠져 익사했다. 피해자 측에서는 600여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시를 탈출한 병사들이 이후 다시 반일투쟁에 가담하고 생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아 이 역시 타당한 수치는 아니다. 행방불명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 숲속을 헤매다가 ‘애매한 죽음’을 당하는 자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할린부대 측의 사망자수에 비해 군정의회 측의 피해가 매우 적었다는 점이다. 사할린부대가 정예병력으로서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했었음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무장해제 과정에서 사할린부대 측의 무력대응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에서도 무장해제 과정에서 사할린부대를 살상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해제가 끝난 뒤에 사할린부대를 제외하고 고려혁명군에 의한 한인 무장부대 통합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1921년 8월에 개최될 극동공화국과 일본 간 대련회의(大連會議)를 앞두고 고려혁명군은 극동공화국의 영내에 주둔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921년 7월 5일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로부터 이르쿠츠크로 회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같은 해 8월 5일 이르쿠츠크로 출발했다. 회군 후에 고려혁명군은 전투가 아니라 군사와 정치교육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처럼 자유시사변은 1920년대 초 한인 무장부대의 통합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 군대 성격의 차이, 소련과 코민테른의 일관적이지 못한 정책 등이 결합 되어 나타난 사건이다. 또한 한인 무장부대의 통합을 통해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실현하려다 벌어진 비극적 사건이었다. 자유시사변이 남긴 영향은 독립운동에 큰 짐이 되었다. 한인 무장부대의 커다란 전력 손실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이로 말미암아 3·1 운동 직후 고조된 반일무장투쟁의 열기는 한풀 꺾이고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운동방침도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한인 암살단이 조직되어 자유시사변의 책임자를 암살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자유시사변을 피해 연해주로 돌아갔던 사할린부대의 일부는 연해주에 남아있던 백위파 러시아군과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에 전공(戰功)을 세우며 무장투쟁 활동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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