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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丁未義兵]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인과 함께 전국적 의병이 일어나다

1907년(순종 1)

정미의병 대표 이미지

정미의병 당시의 의병들 모습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정미의병(丁未義兵)은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후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의병항쟁이다. 을미의병(乙未義兵), 을사의병(乙巳義兵)과 달리 해산된 군인들이 참가하여 더욱 강력한 의병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들은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결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시도했다. 그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평민 출신 의병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항쟁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인해 의병활동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정미의병은 일본의 식민화 정책을 지연시키는데 기여했으며 국내외에 항일운동기지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2 1907년 정미칠조약과 군대해산

1907년은 복잡했다. 그해 6월에는 고종(高宗)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을 특사로 파견했다. 그 목적은 조선을 식민화하려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동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거부당했다. 고종이 일본 몰래 정부 대표단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했다는 소식이 일본 정부와 통감부에 전달됐다. 이에 일본은 고종이 특사를 파견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켰다.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킨 것에 그치지 않았다. 1907년 7월 24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외무대신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정미7조약 협약안을 총리대신(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달했다.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 정부의 법령 제정, 행정 처분, 고등관리 임면 등을 통감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대한제국 관리에 임명하고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즉, 정미7조약은 대한제국의 행정권과 인사권을 박탈함으로써 사실상 대한제국 정부의 기능을 정지시킨 것이다. 러일전쟁 이후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이제 내정까지 일본의 통감에 장악되었고, 사실상 식민지와 마찬가지였다.

내정에 대한 권리를 빼앗아 간 협약안만이 아니라, 협약안에 딸린 「부수각서(附隨覺書)」도 문제가 되었다. 문제가 된 내용은 협약을 실행할 구체적 방법으로 군대해산이 포함된 것이었다. 군대해산이 불러올 만일의 소요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정부에 군대를 추가로 요청했다.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7월 31일 일본은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의 이름으로 군대를 해산시킨다는 조칙을 발표했다. 그 명목은 ‘군제를 쇄신하여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황실의 시위에 필요한 군을 선별하여 배치되었고 나머지 군대는 일시에 해산되었다.

3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과 서울진공작전

군대해산은 의병항쟁을 확산시켰다. 서울의 시위대는 숭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원주와 강화의 진위대도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군대해산에 반발한 병사들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각기 고립적으로 투쟁해온 방법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졌다. 정규군에서 훈련받은 군인들이 의병 대열에 합류하여 의병의 질적 개선과 함께 양적 확대가 이루어졌다. 군대해산 이후부터는 도(道)의 경계를 넘어서 연합하는 전략이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장들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합항쟁을 모색했다. 이렇게 연락망이 구축되어 전국적으로 통일된 대규모의 의진인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陳所)를 결성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즉 전국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의병부대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갖춘 이른바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의 양반 유생인 이인영(李麟榮)은 경상북도 문경(聞慶)에서 강원도 원주(原州)로 이동하여 지휘부인 의병원수부를 설치하고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을 표방했다. 이인영은 사방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글을 보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몰려들었다. 이로써 이인영은 관동창의군의 규모를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이 의병의 목적은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친일 대신(大臣)을 타도하여 새로운 내각을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국 영사들에게 일본의 국제법 위반을 호소하였고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내 연합하고자 하였다.

이인영의 관동창의군은 전국적 규모의 연합의진을 결성하기 위해 원주에서 경기도 지평(砥平)으로 이동했다. 이때 의병의 규모는 1만 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각도의 의병장들은 연합의진 결성에 힘쓴 이인영을 13도창의대진소의 대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처음에 부친의 간병을 이유로 의병장 추대를 거절하였으나 거병의 당위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추대를 수락했다. 13도창의대진소는 강원도 기반의 이인영 계열, 경기도 황해도를 배경으로 한 허위(許蔿)계열, 충청도의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가 핵심전력을 구성했다. 따라서 13도창의대진소는 강원도와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중부지방의 연합의병부대라 할 수 있다.

13도 연합의진은 11월부터 서울로 진격했다. 13도 창의군의 본진은 서울을 향해 천천히 진격했다. 군사장 허위는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다. 이들은 전군이 집결한 뒤 일거에 서울을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군이 모이기 전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격전 끝에 퇴각했다. 더욱이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서울진공작전을 더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인영은 군사장 허위에 뒷일을 위임하고 의병을 중지하라는 통문을 발송했다. 이로써 서울진공작전이 중지되었다. 이후 군사장 허위는 경기도 임진강 유역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제2차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했으나 증강된 일본 군경의 화력을 당하기 어려웠고 제2차 서울진공작전은 계획에 머물고 말았다.

이처럼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했다. 총대장 이인영은 1909년 6월 7일에 체포되어 동년 9월 20일에 처형되었다. 허위, 민긍호(閔肯鎬), 이강년 등 13도창의대진소의 핵심 지도부는 모두 1908년부터 1909년 사이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순국했다. 비록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했지만 그 의의는 적지 않다. 첫째, 13도창의대진소는 최초로 편성된 전국적 연합의병부대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는 전략상의 발전으로 개별적으로 전개되어 오던 의병운동이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13도창의대진소는 일본의 불법성을 해외의 다른 국가에 알리는 등 외교적 노력도 함께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4 각 지역, 각 계층이 활약하다

정미의병을 이끈 계층은 저명한 성리학자, 전·현직 관료, 농민·보부상·해산군인·머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계급과 신분을 초월하여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정미의병은 해산군인과 포수(砲手)들이 참여하면서 장기항전의 기반을 구축했다. 강원도와 경기도 의병투쟁에서는 해산군인들의 역할이 컸다. 민긍호, 김덕제(金德濟) 등의 해산군인은 강원도와 전국 각지 의병의 활성화와 전력 증강에 크게 기여했다. 1908년에만 일본 군경과 2천여 회 싸웠으며, 전투에 참여한 의병의 수는 83,000여 명이나 됐다. 1909년에도 이들은 1,700여 회의 전투를 벌였고 참여한 의병의 수는 약 4만 명이었다.

함경도에서는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 등 직업적 포수들이 활약했다. 특히 1907년 9월에 일본이 공포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 때문에 포수들의 생계가 어려워진 측면도 이들의 의병봉기에 한몫을 했다. 특히 홍범도의 부대는 1907년 11월에 함경남도 후치령(厚致嶺)에서 일본 군경을 기습하며 의병투쟁을 시작했다. 이때 일본군과 관계자 6명이 사망했고 홍범도 부대는 출동한 일본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점차 장기간 전투로 인한 탄약 부족으로 홍범도 부대의 전력은 약화되어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신돌석은 몰락한 향리의 후예로 평민이었다. 그의 의병부대는 1906년 4월에 일어나 1908년 12월까지 경상북도 영덕(盈德)과 영양(英陽郡)을 비롯하여 강원도, 충청북도 지역에 걸쳐 활동했다. 이들은 주로 소규모 단위 부대로 편성하여 유격전술을 구사했다. 따라서 일본 군경이 이들을 쉽게 추격할 수 없었고 신돌석 부대의 기습에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의 회유책에 귀순자가 많아졌다. 결국 신돌석의 부하가 일본의 회유에 넘어가 신돌석을 살해하면서, 경상도에서 대표적이라 할 수 있었던 신돌석 의병부대의 투쟁은 종식되었다.

5 호남지역 의병들의 항전과 일본의 ‘남한대토벌 작전’

전라도 의병은 1908~1909년 사이에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전라도의 의병투쟁은 전국적으로 가장 활발했다. 일본은 이들을 초토화하기 위해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을 전개했다. 여기서 ‘남한’이란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이 아니라 주로 전라남도 지역을 의미했다. 왜 일본은 유독 전라도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했을까? 일본은 전라도 도서 지역까지 확산된 의병에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은 비옥한 토지와 양질의 항구를 갖춘 전라도의 경제적 발전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 의병항쟁으로 인해 경제적 침탈이 쉽지 않아 가능하면 신속하게 의병을 진압해야 했던 것이다.

임시한국파견대의 보병 2개 연대는 1909년 5월 말 부산에 상륙해서 6월 초까지 목포와 군산으로 각각 이동하였고, 그 후 이들은 6월 10일까지 전라남도의 군사적 거점을 점령하여 분산배치 되었다. 6월 초순까지 임시한국파견대의 병력배치가 완료되자 7월에는 현지부대를 중심으로 전라도의병 진압에 나섰다. 일본은 대규모 군대를 일정 지역에 투입해 상대를 닥치는 대로 살상하고 방화하는 초토화전술을 전라도 의병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그 결과 전라도의병은 두 달 만에 붕괴되었다. 일본은 촌락마다 샅샅이 수색을 실시했고, 조금이라도 의병에 관련된 혐의자가 있으면 살해했다.

한편 일본은 ‘남한대토벌 작전’을 거치며 경제적 침투를 비롯한 병탄의 기반을 조성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체포 또는 자수한 의병을 도로공사에 강제로 동원하는 등 교통로 확보에 이용했다.

6 의병투쟁의 의의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일어난 의병에서 정신적·역사적 연원을 찾았다. 또한 이들의 강력한 반일투쟁은 일본의 식민화정책을 지연시키는데 기여했다. 일본은 1909년 후반 조선을 강점하려 했으나 의병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식민지화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병활동은 국내외에 항일운동기지 건설의 기초를 닦는데 공헌했다. 의병투쟁은 장기항전의 기반을 지리산 같은 산악지대만이 아니라 연해주와 간도에도 구축했다. 이는 그들의 활동목표와 지향성이 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의미한다. 임병찬의 독립의군부와 같이 비밀결사로 전환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의병투쟁의 성격은 반침략적 민족운동이라 볼 수 있다. 비록 국제적 고립과 지역별 투쟁으로 일본의 무력을 당해내기는 어려웠으나, 의병투쟁은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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