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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회 선언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다

1926년

1 개요

‘정우회 선언’은 정우회(正友會)가 1926년 11월 15일 발표한 성명서이다. 정우회는 운동의 통일을 목적으로 1926년 4월에 결성된 단체였다. 정우회는 조선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상단체였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6·10 만세운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대규모 검거 사건이 벌어졌다. 정우회도 이 과정에서 사실상 활동이 정지되었다. 이후 새롭게 정비된 정우회는 1926년 11월에 ‘정우회 선언’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다. ‘정우회 선언’은 운동의 ‘방향 전환’을 주장한 선언으로 사회주의 운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정치투쟁을 강조하고,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를 주장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 등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정우회 성립의 배경

정우회는 기존의 사상단체(思想團體)가 가진 분열적 대립을 극복하고 운동의 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1926년 4월 새롭게 결성된 사상단체였다. 사상단체의 통일이 적극적으로 추진된 것은 1925년부터였다. 1925년 4월 27일 서울 견지동(堅志洞)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화요회(火曜會), 북풍회(北風會),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 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의 4개 사상단체는 4단체의 합동을 위한 합동총회를 계획했지만, 일제 경찰의 집회 금지로 조직 통합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4단체는 공식적인 단체 통합은 아니더라도 사무를 공동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하고, ‘4단체합동위원회’를 만들었다. ‘4단체합동위원회’는 원래 북풍회 사무실이었던 재동(齋洞) 84번지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였다. 이후 4단체의 합동은 진전되지 못하다가 1926년 4월이 되어서야 다시 추진되었다.

1926년 4월 4일 기존 ‘4단체합동위원회’에 속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서울 돈의동(敦義洞)에 있는 중국음식점에서 새로운 사상단체 결성을 위한 발기총회와 창립총회가 연달아 열렸다. 창립총회에서 새로운 사상단체의 이름을 정우회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정우회의 실질적인 결성은 4월 10일 시천교당에서 열린 임시총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정우회 임시총회는 148명의 참석자와 50여 명의 방청객이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정우회가 출범하자 기존의 ‘4단체합동위원회’는 4월 15일 회의를 열고 4단체에 소속된 모든 회원들이 정우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사상단체의 합동과 운동의 통일을 상징하는 의미로 이 자리에서 기존 4단체의 간판을 모두 불태웠다. 운동의 통일을 위해 ‘4단체합동위원회’가 추진되고 1년여 만의 결실이었다.

그렇다면 정우회와 같은 사상단체란 무엇일까?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상단체는 말 그대로 사상이나 주의를 상호 토의하고, 대중에게 선전·교양하는 단체를 말한다. 사상단체가 선전하고 교양하는 사상과 주의는 식민지 조선의 사회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주로 사회주의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상단체는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단체로서 비공개 영역에서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는 정치결사의 표면단체(表面團體) 역할을 담당했다. 식민지에서 피(被)식민지인에게 주어지는 정치적 자유는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일제에 반대하는 목적을 가지고 비공개적이고 비합법적인 정치결사가 존재했다. 사상단체는 이러한 비밀 정치결사가 대중운동을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은 모두 서로 다른 사회주의 정치결사의 표면단체였다. 4단체가 해체하고 결합한 정우회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표면단체였다. 표면단체라고 해서 모든 구성원이 비밀 정치결사의 구성원은 아니었다. 비밀 정치결사의 구성원이 사상단체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3 사상단체 정우회의 조직 변화와 정우회 선언

조선공산당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1925년 4월 17일 결성되었다. 그러나 1925년 말 신의주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작은 폭력 사건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 공산당이 존재한다는 사살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 지도부를 비롯하여 관련자들이 일본 경찰에 속속 검거되기 시작했다. 이를 ‘신의주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아직 체포되지 않았던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金在鳳)은 조직의 유지를 위하여 중앙위원 김찬(金燦), 주종건(朱鍾建)과 함께 비밀리에 모여 후계조직 책임자를 결정하였다.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지도부로 책임비서 강달영(姜達永), 중앙위원에 이준태(李準泰), 홍남표(洪南杓), 김철수(金錣洙), 이봉수(李鳳秀)가 선정되었다.

강달영 책임비서를 중심으로 새롭게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1926년 2월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강달영의 조선공산당은 새로운 표면단체로 정우회를 조직하였다. 특히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 경제부장이었던 이봉수가 정우회 발기 때부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우회는 사상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과 대립하던 사회주의 세력이 존재했고, 그 세력의 표면단체인 사상단체 전진회(前進會)가 있었다. 비록 통합을 목적으로 했지만, 정우회는 전진회와 대립하며 경쟁하던 상황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정우회를 통해 사상단체의 통합에 노력하는 한편, 민족주의 세력과의 공동투쟁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조선공산당은 천도교 구파(天道敎 舊派)와 함께 순종(純宗)의 장례식에 맞춰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일본 경찰에 사전 발각되었다. 주도 인물들이 검거되면서, 시위운동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이 ‘6·10 만세운동’이었다. 일본 경찰은 ‘신의주 사건’으로 발본색원(拔本塞源)되었다고 생각했던 조선공산당이 여전히 건재할 뿐 아니라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또다시 공산당원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진행되었다. 체포된 조선공산당 관련자들 중 다수는 정우회 회원이기도 하였다. 정우회는 활동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정우회가 다시 조직을 재정비하기 시작한 것은 1926년 9월 말이 되어서였다. 9월 28일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공석인 집행위원을 선출하였고, 10월 말에는 사회운동단체연합장례식으로 진행된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상무집행위원이었던 강택진(姜宅鎭)의 장례식에 참가하면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정우회는 11월 3일 상무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임원 임명과 신정책을 수립한 후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정우회는 조직 정비를 통해 이전과 다른 인물들이 결합하였다. 일본 도쿄에서 활동하던 사상단체 일월회(一月會) 출신인 안광천(安光泉), 김영식(金泳植), 하필원(河弼源) 등이었다. 주로 일본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일월회는 맑스주의 선전과 교양 활동에 주력한 사상단체였다. 일월회 간부들이 정우회에 결합한 것도 정우회 결성 과정과 마찬가지로 조선공산당의 재편과 관련이 있다. 6·10 만세운동 이후 지도부가 붕괴된 조선공산당은 수배중이던 중앙위원 김철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이때 김철수가 새롭게 조선공산당의 지도부로 영입한 인물들이 일월회 출신들이었다. 안광천은 10월 중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정우회를 매개로 공개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안광천은 12월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6년 11월 15일 정우회는 집행위원회를 열고, 정우회의 주장을 담은 선언서를 통과시켰다. 이 선언서가 ‘정우회 선언’이었다. 새롭게 구성된 정우회 구성원들의 입장이 담긴 것이었다. 정우회는 ‘정우회 선언’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안광천 등을 연사로 선정하고 강연회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정우회 선언’은 전문(前文)과 4개항으로 구성되었다. 정우회는 ‘정우회 선언’에 이전과 다른 새로운 운동방침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4 ‘정우회 선언’의 내용과 의미

‘정우회 선언’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정우회 선언’은 전문에서 조선민중운동의 현상황을 세 가지 정도로 제시하였다. 첫째, 널리 확대된 파쟁과 분쟁으로 운동을 통한 의식화와 대중화가 어려운 상황이며, 둘째, 일본 경찰에 의해 유력한 단체 대부분이 집회금지를 당해서 무력한 상태이고, 셋째, 민족주의 경향의 정치운동이 대두하고 있다고 현실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정우회가 새로운 운동 방침을 제시한 것이 다음의 4개항이었다.

‘정우회 선언’ 제1항은 현실의 분열된 운동과 정신을 극복하기 위하여 공개적인 토론 등 대중적 방식으로 사상단체를 통일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열된 운동을 통합할 필요성과 함께 운동 통일의 방법으로 음모적이지 않은 공개적 방식을 강조하였다.

‘정우회 선언’ 제2항은 대중의 양적 확대와 질적 강화를 위해서 교육과 조직 활동을 강조하는 동시에, 대중의 조직과 교양은 구체적인 일상투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중의 조직과 교육이 관념적인 방식이 아니라 일상투쟁 속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정우회 선언’ 제3항은 기존의 경제적 투쟁에서 벗어나 정치적 투쟁으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해야 하며, 그러한 방법으로 민족운동과의 적극적 제휴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의 운동 방식을 버리고, 정치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운동으로 비약(飛躍)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정우회 선언’ 제4항은 운동을 대중화하고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운동의 근본목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론투쟁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운동 과정에서 타협과 개량은 불가피하지만, 이론투쟁은 타협과 개량이 저항과 혁명을 위한 수단임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상의 내용처럼, ‘정우회 선언’은 현실 운동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운동의 통일, 일상투쟁을 통한 대중운동, 정치운동으로의 방향 전환, 이론투쟁의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이 중에서 가장 논쟁이 되었던 부분은 제3항의 방향 전환과 관련한 것이었다. 주요한 논쟁점은 대략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정우회 선언이 주장한 정치운동의 의미와 그 구체적 방법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 방법과 대상에 관한 것이다. 즉, 정우회 선언이 주장한 방향 전환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정우회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의 일시적인 공동전선을 주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정우회 선언’에 영향을 끼친 요인으로 코민테른 혹은 일본 무산정당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한다.

‘정우회 선언’이 발표된 이후, 사회주의 세력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정우회와 대립하고 있던 전진회는 ‘정우회 선언’을 반박하는 〈전진회 검토문〉을 발표하였다. 이 글을 통해 전진회는 정우회의 주장이 전혀 새롭지 않으며, 오히려 대중운동을 우경화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일련의 논란이 있었지만, ‘정우회 선언’은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주의 세력과 적극적으로 제휴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27년 2월 결성된 신간회에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한 것도 ‘정우회 선언’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우회 선언’에서 주장한 방향 전환은 문학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런 영향으로 문학의 역할과 방법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정립을 가속화시켰다. 이처럼 ‘정우회 선언’은 운동의 방향을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소위 ‘방향 전환’을 주장한 것으로, 사회주의 경향의 운동과 문학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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