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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征韓論]

근대 일본의 대외정책에 내재하는 사상적 계기

1873년

정한론 대표 이미지

정한의론도(1877년, 鈴木年基 作)

Tokyo Keizai University Institutional Repository

1 개요

1873년 일본 정부는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는 문제로 대립하였고, 정쟁에서 밀린 사이고 다카모리와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사직하였다. 이 사건은 1873년 정변 또는 메이지 6년 정변이라고 불리는데, 정변의 배경에 조선 출병 논의가 있어서 정한론 정변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일본사 연구에서 정한론은 1873년 정변과 연관된 것으로 인식되지만, 그 배경에 에도 막부 시기의 조선 침략 주장이 있어서 폭넓게 19세기 후반 조선 침략론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2 정한론의 대두

왕정복고의 쿠데타 이후 일본 정부는 서둘러 해외 각국에 체제의 변화를 알렸다. 조선에는 17세기 이래 양국 간 외교 실무를 담당해 온 쓰시마번(對馬藩)을 통해 새로운 정부의 성립을 알렸고, 1868년 12월부터 이듬해 봄에 걸쳐 적극적으로 국교 교섭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의 외교 문서에 칙(勅)·황(皇) 문자가 사용되는 등 이전과 다른 양식인 점을 지적하며 외교 문서를 수리하지 않았다. 일본이 교린 관계를 무너뜨리고 조선보다 우위에 서려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외교적으로 서계(書契) 문제가 일어나자, 일본에서 조선의 태도를 비난하는 여론이 생겨났다. ‘조선이 황국(皇國)을 멸시해 문자가 불손하다는 이유로 황국에 치욕을 주었다’며 분노하였다. 일례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사절을 조선에 파견해 무례를 견책하고, 상대가 불복하면 그 죄를 물어야’ 한다고 일기에 썼다. 특히 사족(士族)의 불만이 거세었다. 폐번치현(廢藩置縣) 이후 막번체제의 기반이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이른바 사민평등(四民平等) 정책들이 연이어 실시되면서 구 지배층을 계승한 사족은 정부에 상당한 불만을 가졌다. 이에 정부는 사족의 불만을 외부로 향하도록 하는 동시에, 정치·경제·사회 여러 측면에서 서구 제국이 가한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 침략을 획책하였다. 그 계기는 조선에서 전개된 일본 배척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고 대외적으로 서구 제국에 강경히 대응하며, 일본도 양적(洋賊)으로 보고 배척하였다. 반면 일본 정부는 폐번치현을 통해 지방 행정을 정비하고, 이전 쓰시마번에 위임한 조선과의 외교 실무를 외무성에 귀속시키는 한편 부산 초량의 왜관을 접수해 공사관으로 개칭하려 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 외교관의 부임을 거부하고 1873년에는 양국 간 밀무역을 엄금하였다. 일본 외교관은 그 상황을 보고하며, 조선 정부의 포고문이 무례하다고 과장하였다. 그를 계기로 일본 정부는 본격적으로 조선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조선 거류의 일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고 이어서 사절을 파견해 교섭할 것을 주장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먼저 전권대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교섭 실패를 예상하고 그를 명분으로 출병하려 한 것이다.

3 정한론 정변의 전개

1873년 8월 일본 정부는 내부적으로 사이고의 의견을 수용해 그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다만 천황의 명에 따라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이끄는 사절단이 귀국한 후 다시 논의해 사신 파견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당시 일본은 조약을 맺은 나라들에 국서를 제출하고 서구 문명을 시찰·조사하는 한편,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타진하기 위해 해외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 규모는 관리와 유학생 등을 포함해 총 107명으로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고위 관리들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대규모 내정 개혁 및 조선 문제 등을 유예하는 조건으로 사절단에 참여하였다. 즉 대내외 정책과 관련해 첨예한 알력이 내재된 채, 실질적으로 정부가 사절단 세력과 국내 세력 즉 유수정부(留守政府)로 나뉜 것이다.

사절단은 2년여에 걸쳐 미국과 유럽 제국을 방문하며 서양 문명과 사상을 경험하고, 무엇보다 각국의 실정을 비교하였다. 그들은 서구의 경제 발전과 번영에 압도되고 적극적으로 서구 문명을 수용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또 돌아오는 길에는 아시아에 위치한 서구의 식민지를 방문하고 근대국가로서 자립해야 한다고 통감하였다. 드디어 9월에 사절단이 귀국하고 이와쿠라는 곧바로 ‘국정을 정비하고 민력(民力)을 키우는’ 내치(內治) 우선을 강조하였다. 그는 조선을 적으로 하면 종주국(宗主國)인 청도 적이 되므로, 당시 일본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오쿠보도 ‘만약 이긴다 해도 전쟁 비용에 상당하는 국익이 없다’며 반대하였다. 이와쿠라를 비롯해 기도, 오쿠보 등 모두가 사상적으로 조선 침략에 동조했지만, 전략적으로 내치를 우선하여 조선 침략을 유예한 것이다.

결국 10월 일본 정부는 사이고를 사신으로 보내는 것을 연기하였고, 이에 불복한 사이고와 이타가키,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등이 사직하였다. 정한론 정변 이후 일본은 내무성을 중심으로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1874년 타이완을 침략하였고, 이듬해에는 군함 운요호를 조선으로 보내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조선에 불리한 수호조규를 맺었다. 따라서 정한론 정변은 메이지 유신 이후 대외 관계의 변화와 사회 불만 그리고 정부 내 권력 대립이 연쇄하는 과정에서 조선 침략 논의를 계기로 전개되었으며, 19세기 후반 세계정세에서 일본이 근대 국가로 확립되는 과정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었다.

4 정한론, 대외정책의 사상적 기초가 되다

정한론이 대두한 상황에서 사이고와 이타가키 등이 물러나자, 많은 정치가와 관리 및 군인들이 동조해 사직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 정부를 주도하던 번벌(藩閥) 세력을 분열시키는 동시에, 반정부 성향의 세력이 활동하도록 조장하였다. 먼저 정부의 개명 정책에 불만을 가진 이른바 불평 사족(不平士族)이 정쟁의 결과에 반항하였다. 1874년에는 이와쿠라를 습격하였고, 이어서 에토 등을 중심으로 봉기하는 등 서일본 일대에서 사족 반란이 이어졌다. 마침내 1877년 사이고를 중심으로 사쓰마 출신의 사족이 주도해 대규모 내란을 일으켰다(세이난 전쟁). 한편 이타가키와 고토 등은 번벌 정치를 비판하며 1874년 민선 의원(民選議院) 설립을 요구하는 건백서(建白書)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듬해 그들은 지방에서 단체를 조직하며 국회 개설의 청원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자유민권(自由民權)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정한론 정변 이후 사족 반란과 자유민권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불평 사족을 진압해 정권을 안정시키는 한편 입헌군주제 논의를 앞당겼다.

주목할 것은 1880년대 조약 개정이 실패로 드러나자, 일본 사회가 정부를 비판하며 국권(國權)을 강조한 점이다.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를 침략하는 상황에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해 국가의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른바 국권론이 확산되었고, 자유민권 운동 역시 대외적으로 국권론에 동조하였다. 이후 사회 전체가 국가 독립을 위해 대외 팽창과 침략을 지지하였고, 우선적으로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利益線)으로 설정해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정한론 정변으로 조선 출병은 일단 유예되었지만, 운요호 사건 이래 정한(征韓), 즉 조선 침략은 일본 대외 정책의 중심 기조로 유지된 것이다.

5 정한론의 역사적 배경

사실 조선 침략의 주장은 19세기 전반부터 있었다. 이른 예로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의 주장이 있다. 그는 경세가로 알려진 인물로, 동향의 국학자(國學者)인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와 교류하며 『고사기』·『일본서기』 등 고전에 기초해 독자적인 국가관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우내혼동비책(宇内混同秘策)』(1823)에서 대륙 침략을 논하며 구체적으로 마쓰에(松江: 현재 시마네현 소재)와 하기(萩: 현재 야마구치현 소재)에서 조선의 동해안을 경략하고, 하카타(博多: 현재 후쿠오카)에서 조선의 남해안을 공략해야 한다고 했다. 해외 침략론의 일환으로 조선 침략을 구체화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실패로 끝난 후, 일본은 해금(海禁)을 원칙으로 내세우고 조선과 관계를 정립하였다. 18세기 고전과 유학에 대한 연구가 심화하고 국학(國學)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점차 일본에 조선을 멸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19세기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해 대외 침략을 통해 위기를 해결하자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일례로 『일본서기』에 기초해 고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사실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하자는 주장이 거세어졌다. 1858년 막부의 로주(老中)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도 수호통상조약의 칙허를 요구하며 ‘앞으로 해외 제국을 수중에 넣고 삼한(三韓) 즉 조선도 예전처럼 장악’할 것을 언급하였다.

1850~1860년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비롯해 무사 계층이 조선 침략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1867년에는 청 광저우에서 발행되는 『중외신문(中外新聞)』에 홍콩 거주 일본인 팔호순숙(八戶順叔)의 기사가 실렸다. 그것은 일본이 서양식 군비를 갖춰 조선을 정벌하려 한다는 내용으로, 청이 기사를 조선에 알려 진위를 파악하는 등 청·조선·일본 삼국 간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팔호사건). 즉 19세기 정한론이 외교 문제로 떠오른 시발점인 것이다. 이후 일본에서 조선 침략은 그저 주장이 아닌, 주요 정책이 되었다.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경제인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 역시 한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삼한 정벌 또는 조선 정벌 또는 정한론’ 등에 자극받았다고 고백하며, 조선 경제를 침탈하는 데 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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