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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식민지 교육의 나침반을 정하다

1911년

조선교육령 대표 이미지

1911년 8월 23일 칙령으로 제정된 조선교육령이 실린 관보(1911년 9월 1일자)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일제 강점기 교육 연구에서 조선교육령 제·개정을 시기구분의 준거로 사용할 만큼 조선교육령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방침을 표현하고 있으며, 초·중·고를 불문하고 교육의 모든 영역에서 교육 실제를 규정하는 강력한 법적 기반이었다. 따라서 시기별로 조선교육령의 변화와 각급 학교 규정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교육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조선교육령은 일제 통치 36년 동안 몇 차례 수시 부분 개정이 이루어졌으나 제정 및 제정 수준의 전면적인 개정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크게 4차례 개정되었다. 1911년 8월 23일 조선교육령이 제정 공포되었고, 1922년 2월 6일 다시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는데 이를 보통 제2차 조선교육령이라 부른다. 1938년 3월 4일 공포된 제3차 조선교육령과 1943년 3월 8일 공포된 제4차 조선교육령이 있다. 이외에도 1945년 7월 1일자로 공포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한 전시교육령이 있다.

2 조선교육령 칙령으로 제정하다

조선보다 먼저 식민지가 된 대만의 경우 교육령을 제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 병탄 직후부터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기본적으로 조선은 보통의 식민지와는 다르게 운영해야 한다며 조선교육령을 제정하려고 했다. 조선총독부 내무부 학무국장 구마모토 시게키치(隈本繁吉)도 류구(琉球), 대만과는 다른 조선민족 동화정책을 사용해야 한다며, 조선은 문교가 발전해 있고 동화가 쉽지 않아 조선교육에 대한 근본 훈령이 필요하고, 그 내용은 일본 본국 및 여타의 식민지와 달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선민족을 충량화하기는 어려우니, 동화정책은 조선민족을 일본민족에 종속적인 지위로 두고 순량화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 교육계에서는 조선민족의 특수성으로 인해 동화교육의 목적에 차이를 두어야 한다며, 일본 민족에 적용되는 충군애국적 교육을 조선에도 적용할 것인지 즉 일본 민족에 대한 교육법을 어디까지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새로 편입한 조선의 영토에 일본 민족의 교육법을 적용하기보다, 조선에만 적용되는, 민도에 상응하는 간단하고 실제적인 교육을 내용으로 하는 별도의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였다. 그래서 대만이나 류구 혹은 서구의 식민교육 정책과 다른 조선의 교육정책을 만들되, 특수한 식민지 조선에만 적용되는 교육에 관한 근본 훈령을 만들고자 하여, 조선교육령을 칙령으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제정 절차를 보면 우선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교육령 초안을 성안하고 이 초안을 바탕으로 우선 일본 본국의 식민지 관련 담당 부서인 척식국과 협의 조정하여 수정한다. 일단 협의가 끝나면 법제국으로 넘겨 법리적 타당성을 검토 받은 뒤 내각회의를 통과해야 한다. 내각회의에서 통과된 법령 초안은 다시 천황의 자문기구인 추밀원에서 심의하여 천황의 칙재를 받아 칙령으로 공포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척식국 및 법제국과의 협의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에서 성안된 초안은 많이 변경되며 내각회의에서도 조정된다. 이후 추밀원 자문과정에서 주요 쟁점 사항 등이 다시 한번 정리되고 또 수정되어 공포될 초안이 만들어 지면 행정적 절차를 거쳐 칙령으로 최종적으로 공포된다. 조선교육령 제‧개정에 따른 학교규정과 학교 관제 등의 제‧개정은 조선총독부령으로 거의 동시에 공포하였다.

하지만 제1차 조선교육령은 이후의 조선교육령 제정과는 달리, “조선통치를 위해서는 무단통치와 함께 일본신민화를 꾀하기 위해 조선민족에 일본어 교수의 강제, 일본역사, 문화를 주입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각의에서 “긴급히 발포를 요하는 사항”으로 결정하여 추밀원의 자문을 거치지 않고 칙령으로 공포되었다.

제1차 조선교육령은 교육칙어를 조선인에 적용하고, 학교제도는 시세와 민도에 따라 간이하고 실용적으로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조선의 학교 수업연한을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 4년, 여자고등보통학교 3년으로 하여 일본의 학교제도와는 수업연한부터 다르게 하여 차별적이고 이동이 불가능한 학교제도가 만들어졌다.

3 조선교육령 개정 내용과 쟁점

제2차 조선교육령은 1922년 2월 6일 공포되지만 3·1 운동 발발 이후부터 교육령 개정이 이 논의되고 있었다. 조선교육령의 개정 배경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첫째 일본 본국에 내지연장주의를 주장하는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이 수립되고 조선총독으로 사이토가 부임하면서 통치방침을 바꾸고 제도개혁을 단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둘째 관제 개혁의 일환으로 교육 학사업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내무국 학무과에서 학무국으로 분리 격상되면서 조선교육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3·1 운동을 전후하여 조선인들의 교육적 요구가 분출되어 학무국으로서는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수렴해야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2차 조선교육령 제정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재임기에 학무국장 시바타 젠자부로(柴田善三郞), 학무과장 유게 고타로(弓削幸太郞)가 추진하였다.

제2차 조선교육령 개정 과정에서 핵심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조선인과 일본인 동일의 교육, 일본어 교수 중시, 교육칙어 폐지 등이었다. 교육목적으로서의 교육칙어에 관한 조항은 일찍부터 폐지로 결정되었는데, 당시 일본 본국에서 교육칙어 조항은 내선차별 철폐와 일시동인의 성지(聖旨)에 비추어 부적합하므로 교육칙어의 조선적용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조선교육령은, 첫째 내지연장주의를 지향하지만 조선에서의 교육은 특례로 운영한다는 특례주의, 둘째 보통교육 단계는 별도 계통의 학교를 두고 교차 입학만 허락하는 비동일제도 별학제, 셋째 조선의 특수 사정을 고려한 교과 운영을 인정한다는 교육과정 독자주의 원칙으로 제정되었다. 이 가운데 내선공학(內鮮共學)에 대해서는 임시교육조사위원회의 위원이자 1차 조선교육령 제정시 일본제국교육회의 조선육조사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사와야나기 마사타로우(澤柳政太郞)가 “공학을 귀찮아하는 현실이 있는데, 생각건대 공학의 취의를 충분히 양해토록 하여 상당하는 적절한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공학의 효과를 이룰 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의견을 피력하며 내선공학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였으나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에서는 내선별학으로, 보통교육 이외의 실업학교와 전문학교 등에서는 내선공학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추밀원 자문 과정에서 조선에서 사립대학 건설을 허가할 것인가, 왜 내지인과 조선인 등의 명칭의 구별을 철폐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되었고, 이에 조선에 고등학교를 설치하지 않는 이유, 고등여학교보다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이 1년 적은 이유 등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자문 과정을 거치면서 “중요한 법제에서 민족의 종별에 따라 대우를 달리하는 것과 같은 조항을 만드는 것은 일시동인으로서 통치하고자 하는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에 의해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자”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로 구분하고 조선교육령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 즉 조선인에게만 적용되는 교육령으로 공포되었다. 결국 일본의 하라 내각과 사이토 조선총독의 내지 준거주의 방침은 명분에 머물고, 제2차 조선교육령 개정은 조선총독부 학무관료들의 현실론에 의해 일본인과 조선인 별도의 학교제도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제3차 조선교육령은 지원병 제도, 창씨개명과 함께 황민화 정책의 3대 기둥으로, 특히 조선교육령 개정과 지원병 제도는 “몸에 그림자가 동반하듯이” 시행된 것이라고 한다. 제2차 조선교육령이 3·1 운동 이후 조선 발 개정 추진이라면 제3차 조선교육령은 일본 군부 발 개정이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제정 과정 및 쟁점 논의는 조선 사정 보다는 일본 내지의 필요에 따라, 조선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는 큰 틀에서 이루어 졌다.

제3차 조선교육령은 “국어를 상용하는 자”와 “상용하지 않는 자”에 따라 구별하던 보통교육을 모두 일본 내지의 해당 제도를 적용한다는 방침에 따라 내선동일의 학교제도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추밀원의 심사보고 자료에 의하면 “조선교육령 전부 개정의 형식을 취하지만 실질은 현행 규정 중에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의 보통교육에 관한 부분과 이와 연계되어 있는 사범교육에 관한 부분에 개정을 가하는 것 뿐”이며, “내지인에 대한 것과 조선인에 대한 보통 교육기관에서의 구별은 이 개정으로 명의(名義)상으로는 완전히 해소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반드시 곧바로 내선 공학을 시행하는 것은 아님”을 당국자가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은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기 위한 명분상의 조치로 조선의 교육현실에서는 보통학교에서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에서 중학교로 학교 이름을 바꾼 것에 불과하였다. 그 조차도 소학교의 경우 1941년 3월 다시 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예를 들어 1937년 4월 광주 제2보통학교에 입학한 조선인 학생은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북정소학교로 명칭이 바뀐 학교에 다니고, 다시 5학년 진급 시에 북정국민학교로 개칭된 학교를 1943년 봄에 졸업하였다.

전시동원의 예비 조치로서 이루어진 제3차 조선교육령은 5년만인 1943년 3월 다시 개정되었다.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 제정은 내외지행정일원화 조치에 따라 일본의 교육관련 법령 개정과 보조를 맞추어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오오노 겐이치(大野謙一)가 “내지에서 우리나라 교학의 본의에 기초하고, 대동아전쟁 완수와 대동아 건설의 필성의 요청과 황국의 도에 따라 국민연성의 일관적인 체제를 완정하고, 교육내용의 쇄신 충실 및 수업연한의 단축을 실시하여 교육의 국방체제를 정비하는 학제 개혁을 단행하게 됨에 따라 조선에서도 결전 하 반도의 중대사명과 교육에 대한 국가 부단의 요청을 깊이 성찰하여 내지와 보조를 같이하여 학제의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게 되었다”고 공공연히 밝혔듯이, 국방체제로서의 학제 정비로 수업연한 단축과 전쟁 수행을 위한 인적 물적 동원의 법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전쟁 동원이 더욱 절박해지자 제4차 조선교육령 개정이라는 전면적 손질로도 부족하여 1943년 10월 12일 다시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 방책」을 발표하였다. 이제 법령이 아니라 방책이라는 정책 조치에 의해 학교제도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4 조선교육령의 제정의 의미

조선교육령이 칙령으로 공포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대만을 비롯하여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법률적 사항은 총독이 명령으로 규정할 수 있어 총독부령으로 제정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조선교육령은 조선총독부령이 아니라 칙령으로 공포되었다. 조선교육의 방침을 칙령으로 정함으로써 당시까지 일본 본토에서만 적용되던 교육칙령주의 원칙을 조선에도 적용시켰고, 개별적인 학교령 수준이 아니라 처음으로 종합적인 교육법규를 제정함으로써 조선 교육의 법적 위상을 높였다.

조선교육령은 조선 교육 제도 수립의 방향을 간이 실용으로 하고, 차별적인 학교제도 수립을 정당화하는 법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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