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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

식민지 일상의 감시, 권력의 손에 ‘회초리’를 허락하다

1912년

1 개요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이란, 1912년 3월 18일에 공포된 법률로 조선인에게 한해 일상의 경범죄 처벌 방식으로 태형(笞刑)을 가할 수 있도록 공인한 법률이다. 식민지 무단통치의 상징적 사례이자, 식민지에 적용된 차별적 형사 법규의 대표 사례이기도 하다. 다만, 신체에 직접 체벌을 가하는 신체형인 태형은 조선시대부터 존재한 형벌이었던 만큼, 그 이전 형벌제도와의 연속성에서 고찰해 본다면 식민지 태형제도의 특수성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조선시대의 형벌제도, 그 속의 태형

조선 왕조는 유교적 통치이념으로서 인정(人政)과 덕치(德治)를 표방했다. 형벌이나 법률은 이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보조 수단 정도였다. 이상적으로는 형벌 자체가 필요 없도록 만들어서 존재하되 쓰이지는 않는 예방과 계몽을 위한 형법이 되어야 함을 추구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사람들의 생활을 세세하게 법률로 규제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까지의 소송은 재지사족이 주도하던 향약 내에서 군현 내부의 이해관계 대립이나 범죄행위 등이 자율적으로 통제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토지 혹은 노비 등 소유 재산의 분화가 활발히 이루어지며 양반층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양반층 사이에서 점차 이를 확보하기 위한 소송이 활발해졌다. 노비층의 도망 현상이 확산되고, 전세·군역·환곡 등 부세 압박으로 농민층의 유리가 확대되는 등 기존 신분제 질서가 동요하였다.

조선 왕조의 형사 법규는 중국의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급격한 사회변동에 따라 기존의 법을 개정 또는 폐지하거나 새로운 법을 창설할 필요성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속대전(續大典)』(1746), 『대전통편(大典通編)』(1785), 『대전회통(大典會通)』(1865), 『육전조례(六典條例)』(1866)이 차례로 편찬되었다. 이러한 새 법전 편찬의 방향은 대체로 기존의 유교 윤리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부분적으로 백성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보장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법체계의 변동 흐름 속에서 조선시대의 형벌제도와 태형은 어떻게 변화해나갔을까.

태형은 인간의 신체에 직접 물리적 고통을 가하는 형벌의 일종이다. 이러한 신체형은 전근대시기 어느 지역에서나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시행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주로 태장형(笞杖刑)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조선시대의 형벌은 기본적으로는 다섯 개의 종류로 나뉜다. 태형, 장형(杖刑), 유형(流刑), 도형(徒刑), 사형(死刑)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태형과 장형은 물리적 고통으로 범죄에 응징을 가하는 신체형이라고 할 수 있다. 태형은 오형 중 가장 약한 형벌로, 가는 막대로 죄인의 등짝이나 볼기를 때리는 방식이었다. 장형은 태형보다 처벌 수위가 높았다. 이른바 치도곤(治盜棍)이라고 하는 곤장으로 죄인을 십자 형틀에 묶어놓은 후에 볼기를 치거나 의자에 묶어놓고 정강이를 쳤다. 이렇듯 태장형은 직접적으로 신체에 수치화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항상 남형(濫刑)과 혹형(酷刑)을 시행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정조대에는 형벌 제도를 손보면서 신체형의 성격을 갖는 태장형보다 자유형의 성격을 갖는 도류형(徒流刑)의 비중이 증가하였고, 각종 형구의 사용범위와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여 형벌권의 남용을 억제하고자 하고자 하였다. 공적 형벌권을 엄정하게 사용하여 기존 질서를 안정화할 목적으로 형벌제도를 개선한 것이다.

형벌 체계 자체를 수정하게 된 것은 갑오개혁(甲午改革)을 통해서였다. 개항 이후 일본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형벌제도의 근대적 전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이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6년 4월 제정된 「형률명례(刑律名例)」에서 완성되었다. 이 가운데 태형을 위주로 주요 변화를 살펴보자. 종래 오의 체계가 변화하면서, 장형은 태형으로 통합되었다. 개혁 이후의 태형 60대 이상은 장이 아닌 태로 집행하는 것이므로 고통 강도가 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단순히 두 신체형을 통합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집행방식이나 태의 규격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 태형제도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태형 집행 시의 신분적 차별이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갑오개혁 이전에는 양반층의 경우 특정한 몇몇 범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속전(贖錢)을 내고 태장형을 당하지 않는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에는, 윤리·풍속과 관련된 범죄를 제외하면 누구나 돈을 내고 태형을 면제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신체형에 있어서는 양반과 상민의 범죄 처벌이 동일하게 처리되었던 것이다. 당시 속전의 액수는 태 1대당 1냥 4전으로 규정되었다. 개혁 이전 태 10대의 속전이 7전, 태 1대의 속전이 7푼인 것에 비해 20배로 증액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생활이 어려운 빈민들은 여전히 태형을 받았다.

그렇다면 당시 태형은 얼마나 빈번하게 이루어졌을까. 1903~1908년간 편찬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형고(刑考)」를 보면, 조선시대에 태형과 장형에 처해야 할 범죄 종목은 832개, 유형과 도형에 처해야 할 범죄 종목이 841개였다. 갑오개혁 이후 태형과 장형은 태형으로 통합되었고, 유형과 도형은 역형(役刑, 징역형)으로 통합되었으며, 역형 1년 이상에는 태형을 병과했다. 따라서 갑오개혁 이후에는 그 이전의 태형, 장형, 유형, 도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모두 태형을 부과했다고 할 수 있다. 즉, 태형을 부과할 수 있는 범죄 종목은 총 1,673개에 달했던 것이다.

이후 1905년 5월 시행된 『형법대전(刑法大全)』에서는 역형 1년 이상에 부가하던 태형은 삭제되었다. 그러나 태형으로 처벌되는 범죄 항목은 200여 개였으며, 1908년 개정된 『형법대전』에도 100여 개에 달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제국기에는 민사 혹은 형사재판에서 신문할 때 사실을 진술하지 않는 피고에게 작은 태와 가죽 채찍으로 고신을 가할 수 있었다. 피고들 또한 이러한 신체형에 자주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기의 태형제도 역시 이러한 대한제국기 태형의 남형 현상과 연속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3 식민지 태형제도, 조선태형령의 시행과 내용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이후 조선인을 일본 국민으로 편입하였으나, 전면적인 동화정책을 실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 법령을 ‘제령’이라고 하는 위임 입법 형식을 통해 의용하거나,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일본 법령을 부분적으로 변용한 형태로 실시했다.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되도록 식민 본국의 제도를 식민지에서도 그대로 시행한다는 ‘내지연장주의’의 방침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본국과 입장을 달리하여 식민지 특유의 제도 집행을 필요로 하는 ‘조선격리주의’를 통치 방침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일본 본국과 조선총독부의 입장 차이는 〈조선태형령(이하 태형령)〉의 상위 법규인 〈조선 형사령(이하 형사령)〉의 제정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1912년에 제정된 〈형사령〉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형사에 관한 사항은 기본적으로 일본 형법에 따른다는 이른바 의용형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다만 『형법대전』의 몇몇 조항들의 효력을 살려두거나, 사법관의 자의적 판단 또한 가능하게 했다. 데라우치식 무단통치의 법적 근거를 기존 조선의 법률에서 끌어온 것이었다. 1910년대 무단통치를 상징하는 제도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바로 조선인에 대한 특례의 형벌인 태형제도였다.

일제는 조선에 앞서 대만(1904)과 관동주(1908) 등에서 이미 태형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조선의 태형령은 식민지 태형제도의 연장선에서 형사령, 〈조선 감옥령〉 등 다른 식민지 형사 법규들과 함께 내각회의를 통과하였다. “조선인에 한하여 적용할 것”을 명시한 태형령은 형사령과 같은 날인 1912년 3월 18일에 발포되었다. 이튿날 「조선태형령시행규칙」, 3월 30일 「태형집행심득」이 발포됨으로써 법규 정비 또한 완료되었다.

태형령에 따르면, 태형의 집행 대상은 16~60세의 남자로서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에 처해야 할 자, 100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태료에 처해야 할 자 중 조선 내에 일정한 주소를 갖고 있지 않거나 무자산으로 인정되는 자, 5일 이내에 완납하지 않은 자로 규정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태형령의 ‘근대적’, ‘문명적’ 면모를 강조하며,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했다. 집행방식의 측면에서, 집행자와 수형자 외 관계자의 집행장 출입을 금지시키거나, 2인 이상 집행 시에는 1인씩 입장하게 하는 등 비밀주의 원칙을 내세웠다. 비밀주의를 강조하거나 혹은 일출 전, 일몰 후의 집행을 금지한 것은 태형이 근대적 사법시스템 속에서 시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무엇보다 집행 전에 수형자에게 의사의 진찰을 받게 했다. 건강상 태형을 받기에 어렵다고 인정될 시에는 집행을 유예 혹은 면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대 전국에 배치된 공의(公醫)의 숫자가 200명을 넘지 않았다는 점, 이들이 박봉과 격무에 시달려 임무에 충실할 만한 여건이 조성되지 못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규정은 실효가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수형자의 건강 상태를 진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시가 계속 하달되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태형 집행 전에 이러한 진단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형 집행을 통해 신체에 많은 상해가 생겼음을 시사한다.

이렇듯 조선총독부는 지배의 편의를 위해 태형과 같은 전근대적 형벌을 근대적 형법 체계의 예외로 설정하여 식민지배에 이용했다. 이러한 의도로 창출된 식민지 조선의 태형에는 이상과 같이 기계적 혹은 형식적 합리성의 외피가 덧입혀져 있었다.

4 태형제도의 시행 논리와 그 폐지

그렇다면 당시 조선인에게만 태형령령을 시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총독부는 그 이유에 대해서 조선인 죄수 대부분이 영예심이나 수치 관념이 없는 열등한 인물들이라 구류와 같은 자유형으로는 형벌 집행 효과를 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들 범인에 대해 효과가 있는 형벌을 찾으려면 오로지 본 제도(태형제도-필자 주)의 채용이 있을 뿐이다. 왜냐? 정신적 고통을 늦게 느끼는 자에 대해서는 신속히 고통을 실감할 수 있는 체형을 과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라고 하며 민도(民度)의 차이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시행 논리는 ‘감옥에서의 행형비 절약 및 구금 밀도의 완화’였다. 예컨대, 징역 3개월의 경우 태 90대로 환형(換刑)하면 이틀만 구금하면 되므로 88일의 행형비가 절약된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취약했던 1910년대 총독부의 재정구조 속에서 감옥 증설이 어려웠음을 감안할 때 이는 태형제도 유지의 현실적인 이유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데라우치 총독은 재정 관계상 옥사를 증축·신설할 수 없으므로 가능한 한 금고나 징역형 같은 단기 자유형보다 태형을 실시할 것을 훈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행형비의 절약과 형벌의 효과를 노린 태형제도는 1910년대 제반 경범죄 사안에 대한 ‘경찰사법’에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그들이 목표로 하는 통치 질서를 최대한 저비용으로 신속하게 수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총독부 당국은 1917년 말~1918년 초에는 태형 집행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구상도 하고 있었다. 이는 1918년 9월 성립한 하라(原敬) 내각의 강한 내지연장주의 방침과 충돌하며 여전히 일본 본국과 마찰을 빚고 있었던 것이었다. 태형제도 폐지의 직접적 계기는 이듬해 발발한 3·1운동이었다. 하라 다카시는 1919년 9월 부임하는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 錬太郎)에게 조선에서 긴급하게 시행해야 할 내지연장의 방침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에 태형령 폐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시급하게 문명적인 일본의 형법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을 미루어볼 때, 태형제도의 폐지는 하라 내각의 내지연장주의 방침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이토 총독은 총독부 사법관료들에게 태형령 폐지에 대한 의견서 제출을 명령했으나, 불과 얼마 전까지 태형확장론이 있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태형 폐지에 대한 반대론이 적지 않았다. ‘조선의 실정’과 ‘민도의 실제’에 비해 너무 이르다는 논리였다. 현실적 이유로는 감옥비의 격증이 거론되었다. 사법관료 입장에서는 태형령 폐지를 위해서 최소한 감옥 증설이 전제되어야 했다. 3·1운동으로 수감자가 대거 증가했음에도 예산상의 이유로 감옥 증설이 이루어지지 않던 상황을 반영한 지적이었다. 사이토 총독은 반대론을 일축하고, 직권으로 태형 폐지를 결정하였다. 태형제도의 폐지 과정을 통해 교체된 총독부 수뇌부가 이것을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알리는 중요한 상징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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