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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토지조사사업[朝鮮土地調査事業]

식민지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라!

1912년

조선토지조사사업 대표 이미지

1910년대 경기도 고양군 토지조사사업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조선토지조사사업(朝鮮土地調査事業)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가 총비용 2,040여만 원을 투자하여 진행한 사업이다. 사업을 주관한 기관은 조선총독부 산하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적’인 토지제도와 지세제도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에 형성되어 있던 권리들을 소유권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소유권과 충돌하는 중답주의 권리, 도지권 등은 소멸되었다. 그 결과 지주들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면서 지세를 부과하는 토지의 면적이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조세 수입은 두 배 정도 증가하였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이 결과 식민지 지주제의 기반은 확고해졌고, 식민지 통치를 위한 기반이 구축되었다.

2 ‘한국병합’ 이전에 시행된 정책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대한제국에 파견하고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게 하였다. 이후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외국인들이 토지를 매입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토지를 사들였다. 이토는 이러한 일본인들의 토지를 법적으로 인정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 ,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土地家屋典當執行規則) , 1908년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土地家屋所有權證明規則) 등이 발표되었다. 이 법령에 근거하여 일본인들은 그동안 획득했던 토지의 소유권을 증명 받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통감부는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역둔토(驛屯土)를 조사하고 정리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것을 ‘국유지조사’라고 한다. ‘국유지조사’의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왕실과 관청 등에 부여된 역토(驛土), 둔토(屯土), 궁장토(宮庄土) 등을 ‘역둔토’로 통합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국유지(國有地)로 간주하였다. 둘째 1909년 6월부터 1910년 9월까지 국유지로 확보한 토지에 대한 면적, 소작농, 소작료 등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을 적은 ‘국유지대장(國有地臺帳)’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통감부의 ‘국유지조사’ 기준은 대한제국이 가지고 있던 국유지처리기준과 달랐다. 대한제국은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경작권 등을 인정한 상태에서 국가에 낼 세금액수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통감부는 지주들에게 절대적인 소유권을 부여하고 농민들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통감부의 정책은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소유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분쟁이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통감부는 지세를 부과하기 위해 장부(帳簿)들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일환으로 「결수연명부(結數連名簿)」라는 징세대장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결수연명부」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시한 「과세지견취도(課稅地見取圖)」가 만들어졌다. 이 두 장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토지를 파악하기 위해 참고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가 되었다.

3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시행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주관한 기관은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기 전에 이미 대만, 일본, 오키나와에서 토지조사를 한 경험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조사사업을 계획대로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진행은 총독부의 예상과 다르게 진행되었다. 조선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사전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은 1912년 토지조사령(土地調査令) ,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 조선부동산증명령(朝鮮不動産證明令) , 조선부동산등기령(朝鮮不動産登記令) 등과 같은 법령이 발표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사지역은 처음계획과 달리 통치의 거점이 되는 시가지(市街地)를 먼저 선정하고, 다른 지역은 행정구역 개편작업이 마무리되면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진행 할 때 토지를 조사 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토지소유자의 신고에 의한 것이었다. 먼저 국유지의 경우 ‘국유지조사’의 결과 작성된 ‘국유지대장’을 보관하는 관청이 통지를 하는 것으로 하였다. 민유지의 경우는 국유지에 비하여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조사대상 지역과 시행 날짜를 공고하였다. 이후 공고된 지역에 조사를 담당할 ‘외업반(外業班)’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면·리·동장, 지주총대, 지주들을 소집하여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설명한 후 「토지신고서(土地申告書)」 용지를 배포하였다. 토지소유자가 신고서를 작성하면 지주총대는 이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신고가 되지 않은 토지는 지주총대가 직접 신고서를 작성하였다. 외업반원들은 「토지신고서」가 수합되면 「결수연명부」와 대조를 하였다. 두 장부의 대조가 종료된 후에는 「토지신고서」에 기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실제 토지의 지주, 경계, 지목, 지번 등을 조사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실지조사부(實地調査簿)」를 만들었다.

세 장부의 대조가 끝난 후에는 토지의 지번과 토지소유자를 확정하기 위해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가 만들어졌다. 「토지조사부」에서 토지소유자로 확정된 사람은 ‘사정(査定)’명의인이 되었다. ‘사정’은 토지소유자 및 토지의 경계를 확정하는 행정처분으로 토지조사사업의 사실상 최종단계였다. 임시토지조사국에서는 ‘사정’의 결과를 공시하고 확인하게 하였다.

‘사정’은 임시토지조사국이라는 행정기관이 주관해서 진행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였다. 조선총독부는 이것을 토지소유권이 새로 시작된다는 ‘원시취득’으로 간주하였다. 이것을 통해 조선총독부와 농민, 일본인 지주와 조선농민 사이에서 격심하게 진행되었던 토지분쟁을 일시에 강제적으로 차단하려고 하였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소유권이 확정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분쟁이 상당히 많이 일어났다. 임시토지조사국에서는 화해를 통해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하도록 권유하였다. 하지만 토지조사사업의 결과인 ‘사정’이 공시된 이후에도 소유권에 관한 이의제기는 계속되었다. 이것은 200필당 1필 꼴로 일어나는 것이었으며, 조선총독부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4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조선토지조사사업이 식민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총독부는 소유권을 절대적인 권리로 규정했던 일본민법을 식민지 조선에 적용하였다. 그 결과 중답주의 권리, 도지권과 같은 권리는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도지권은 매매, 상속, 전당이 가능한 권리였지만 조선총독부는 이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인 지주와 일본인 지주들의 권리가 더욱 강화되었다. 하나의 땅에 농민과 지주의 권리가 중첩되어 있을 경우 조선총독부는 대부분 지주들의 권리를 소유권으로 인정하였다.

둘째 ‘한국병합’전에 시행된 ‘국유지조사’의 결과 만들어진 국유지가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국내 최대지주가 된 것이다. 반면 옛 동, 리, 계 등은 법인에서 제외되어 법적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촌락공유지는 면이나 지방 유지들이 분할하여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향촌의 자치질서를 붕괴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셋째 미간지 등 관습적으로 농민의 소유지로 인정한 하천 변의 공지(空地), 포락지(浦落地), 니생지(泥生地) 등이 대부분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확정되었다. 그 결과 농민의 개간권이 소멸되었다. 과거 농민들은 미간지를 자유롭게 개간하여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유지로 확정된 미간지는 지주 및 자본가가 금융자본의 지원을 받아 개간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넷째 지가에 의한 지주납세제 원칙을 확립되었다. 조산총독부는 지세 납부자를 지주로 확정하여 지세수납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지주들의 지원을 받아 통치체제의 안정을 꾀하려고 하였다. 조선토지조사사업으로 결과 세금을 징수 할 수 있는 토지면적은 1910년에 비하여 80.7%가 증가했다.

다섯째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는 식민지 조선에서 부동산등기제도를 제도적으로 확립시키는데 기반이 되었다.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등은 소유권을 담보로 지주에게 자본을 대부하여 주었고, 이것은 조선 사회를 장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결국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조선총독부가 의도한 식민지 조선의 통치구조가 확립될 수 있었다. 또한 식민지 지주제가 확립되었고, ‘한국병합’ 전 불법적으로 확보했던 일본인들의 소유권은 법적으로 보장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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