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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中日戰爭]

태평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다

1937년

중일전쟁 대표 이미지

1938년 우한전투의 중국군

中國抗戰畫史(曹聚仁, 1947)

1 개요

중일전쟁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과 일본 양국 간에 벌어진 전쟁을 가리킨다. 1937년 7월 현재 베이징 서남부에 위치한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총성이 울리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고 이어서 중국이 일본과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중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전개된 항일 투쟁과 서구 제국의 지원 등으로 중국과의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은 세계 정세를 직시하지 않고 전쟁을 확대하였다. 결국 일본은 패전하였고, 그와 함께 중일전쟁도 끝났다. 일본에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포함해 15년 전쟁이라 부르며,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걸친 전쟁인 점을 강조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고도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항일 전쟁, 7년 항전 또는 14년 항전이라고 부른다. 중일전쟁을 양국 간 전쟁이 아니라 중국 혁명 중 민족혁명전쟁으로 위치 짓는 것이다.

2 전쟁의 배경

1933년 5월 중국과 일본은 만주사변의 정전 협정을 체결하였고, 만리장성 이남에 비무장 지대를 설정하여 각각 군대를 철수하였다. 그로써 중국은 만주국과 함께 장성 라인을 국경으로 사실상 인정하고, 일본은 만주국을 지배하에 두는 동시에 화베이 지역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후 일본은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산시(山西), 차하얼(察哈爾), 쑤이위안(綏遠) 등 5개 성을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시켜 일본 지배하에 두려 하였다. 그리고 1935년 11월 허베이성의 동부에 일본의 괴뢰정권을 세웠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대외적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국내에서는 정당 중심의 의회 정치가 쇠퇴한 반면 군인 출신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었다. 특히 1936년 2.26 사건이라는 쿠데타 미수 사건이 일어나며 군부 세력이 확립되었다. 일본 정부는 쿠데타를 주도한 장교 등 18명을 처형하고 대규모 숙군(肅軍)을 실시했지만, 현역 무관에 한해 육·해군 대신을 임명하는 제도를 부활시키고, 군비 확장을 위한 예산을 승인하는 등 일본군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용하였다.

한편 중국에서 항일 운동이 거세어졌고, 시안 사건(西安事件)을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 간 교섭이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중국공산당과 계속 대립하며 제대로 일본에 대항하지 않았다. 반면 중국공산당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주장했고, 일본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생운동 세력은 당시 시안으로 쫓겨 온 동북군(장쉐량 군대)에게 내전 정지와 항일 태세를 요구하였다. 이에 1936년 12월 장제스가 중국공산당에 대한 총공격을 독촉하기 위해 시안을 방문하자,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고 내전 중지와 구국 운동을 요구하였다. 이후 제2차 국·공 합작이 논의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근처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발포가 어느 쪽에서 이루어졌는지 분명치 않지만, 근처에서 일본군이 야간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총격을 중국의 도발 행위로 간주하고 즉각 공격하였다. 사건 직후 일본군은 중국군과 정전을 논의하기도 했지만, 일본 정부는 만주와 조선에서 군대를 파견하였다. 루거우차오 사건을 중국이 계획적으로 무력을 행사한 것으로 단정하고, 자위권을 행사한다면서 선전 포고도 없이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북지사변(北支事變)이라고 불렀다.

3 전면 전쟁으로 확대

1937년 7월 말 일본은 베이핑(현재 베이징)과 톈진 일대를 제압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즉시 항전을 주장하였고, 애초 교섭에 기대를 걸었던 중국 정부도 ‘최후의 시점’에 이르렀다며 항전을 피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동년 8월 상하이에서 일본 해군중위가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중·일 양국 군대가 교전하며 전면전을 전개하였다. 일본은 ‘포학한 지나군(중국군)을 응징’하고 중국 정부의 반성을 촉구한다며 상하이 파견군을 편성하였다. 중국 정부 역시 전국총동원령을 발포하고, 중국공산당의 홍군을 중국군(팔로군)으로 편입하는 등 제2차 국·공 합작에 의한 항일 태세를 갖췄다. 다만 양국 모두 선전 포고는 없었으며, 일본은 북지사변이라는 호칭을 지나사변(支那事變)으로 바꾸었다. 이미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 즉 전쟁 포기에 관한 조약에 조인했고, 무엇보다 미국이 중립법(Neutrality Act)에 따라 교전국에 무기 및 군수품을 매매 혹은 수송하지 않을 것이므로, 일본은 중국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을 치를 수 없었다.

일본은 타이완과 나가사키 및 제주도에서 폭격기를 보내 난창(南昌), 광더(廣德), 난징(南京) 등을 공격하고 상하이에 상륙했으며, 이후 중국 각지의 주요 지점을 점령하였다. 먼저 관동군은 몽강(蒙疆) 즉 차하얼과 쑤이위안 지방으로 들어가, 11월 장자커우(張家口)에 괴뢰 조직인 몽강연합위원회를 만들었다. 화베이 지역에서 북지나방면군이 베이핑과 톈진으로부터 남하해 주요 지방을 점령하고, 12월 베이핑에 괴뢰정권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일본군은 항저우에 상륙해 중지나방면군을 편성하고 11월 상하이·쑤저우(蘇州) 등을 점령하였다. 화중 지역에서는 중국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했을 때 일본군의 전사 및 부상자가 4만 명에 이르렀다.

12월에 이르러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였다. 중국 정부가 이미 충칭으로 옮겨, 난징 점령으로 중국을 굴복시키려 한 일본의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약 2개월 동안 5만여 명의 일본군이 난징에서 잔인한 학살과 강간 등을 자행하였고, 당시 일본 신문에 일본군 장교들이 참수한 중국인의 숫자를 경쟁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당시 희생자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에 따르면 최소 13만여 명 이상이며, 일설에 2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쟁 범죄는 국제적으로 상당한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중국의 항일 의식을 고양시켰다.

일본 정부는 1938년 1월 ‘이후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교섭 즉 정치적 해결을 스스로 차단한 뒤, 같은 해 3월 난징에 괴뢰정권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세웠다. 당시 일본은 선전 포고도 없이 전쟁을 치르며 도쿄에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고, 국가총동원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의회의 동의 없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치를 즉각 취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정부가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할 수 있는 전시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 및 타이완 등에도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였다.

4 전쟁의 예상외 장기화

1938년 10월 일본군은 우한, 광저우, 한커우 등을 공략하고 양쯔장 중류와 화난(華南) 지역으로 전선을 확대하여 중국의 주요 도시와 교통로를 거의 점령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광대한 중국에서 점과 선에 불과하였고, 일본군은 중국 농촌 및 내륙 지역을 점령할 수 없었다. 이에 전쟁은 예상외로 장기화하였다.

일본은 전선을 확대하는 이면에 비밀 교섭도 시도하며, 1938년 11월에는 이른바 ‘동아 신질서’를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국민정부는 이미 지방정부에 불과하고, 그들이 항일 태세를 지속하면 일본은 끝까지 싸울 것이다. 다만 일본은 “영원한 동아의 안정을 확립하는 신질서”를 건설하려 하며, 국민정부가 항일 정책을 포기하면 신질서에 참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1940년 3월 일본은 중국국민당 내 대일 주화론자 왕징웨이(汪精衛)을 내세워 난징에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세웠다. 하지만 대다수 중국인은 왕징웨이 정권을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인식하고, 한간(漢奸) 즉 매국노라고 멸시하였다. 동년 11월 일본은 왕징웨이 정권과 조약을 체결하여 중국의 유일 정부로 인정하고,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일본·만주국·중국 3국의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동아시아 신질서의 확립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왕징웨이 정권은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었고 일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중일전쟁은 인적·물적 소모전으로 변질되고, 그로 인해 일본 국민의 희생은 심각하였다. 1939년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국민징용이 이루어졌고, 특히 경제 상태가 악화하며 기초 물자조차 결핍되었다. 특히 농업 생산이 감소해 식량 문제가 생겨나자, 일본 정부는 부족한 식량을 메우기 위해 타이완과 조선의 쌀을 공출했고 식민지에 식량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식민지 정책으로서 황민화 정책을 강화하고, 조선에서 내선 융화를 강조하였다. 구체적으로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해 내선 일체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황국신민서사 제창과 신사 참배를 강요하며, 1940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실시하였다. 그러한 일본의 수탈과 지배에 대해 식민지의 저항은 한층 거세어졌고 조선인은 중국에서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와 광복군 등을 중심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중국은 일본에 대항해 전면적으로 반격할 만큼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충칭으로 거점을 옮겨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에 대항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주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곳곳에 해방구를 건설하였고, 팔로군과 항일 유격대가 중국 농촌을 통제하였다. 항일 투쟁을 통해 중국공산당은 정치적 정당성을 얻은 것이다. 거대한 중국의 토지와 인구 그리고 계속되는 항일 투쟁으로 인해 일본의 ‘장기 지구’ 태세는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5 태평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다

중·일 양국이 상하이에서 교전하자 영국·프랑스·미국 등은 양국에 군대 철수와 다국적군에 의한 치안 유지를 주장하였다. 소련은 1937년 8월 중국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무기 및 군수를 원조하였다. 국제연맹도 일본의 군사 행동을 불법이라고 비난하였고, 1938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중국 정부에 물자와 인원을 원조하였다. 그와 관련해 육군대신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는 소련과 영국의 원조로 인해 중국과의 전쟁을 끝낼 수 없으니, 독일·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때 1939년 8월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점령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전쟁을 선언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1940년 6월 독일군이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함락시키고 연이어 승리하자, 동년 9월 일본은 중국 정부에 대한 프랑스의 원조를 차단한다는 이유로 인도차이나 북부로 진군하는 한편 독일·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유럽 각국이 전쟁으로 인해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를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을 노려,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마련해 전쟁에 필요한 자원을 획득하려 했다. 예상외로 길어진 전쟁의 늪에서 탈출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의 중국 침략에 항의해 미·일 통상항해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철강 수출을 금지한 데 이어 영국, 네덜란드와 함께 석유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의 석유 수입량 중 90퍼센트가 감소하였다. 전쟁 수행과 점령지 경영을 위해 미국에서 물자와 원료 등을 많이 수입하고 있었기에, 일본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제 일본은 미국, 영국과 직접적인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1941년 12월 하와이에 위치한 미국 해군기지를 급습하였다. 미국·영국과 일본은 상호 선전 포고를 하고, 중국도 일본과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중일전쟁은 태평양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일본은 ‘미·영과의 전쟁을 비롯해 이후 전개되는 전쟁에 대해, 지나사변을 포함해 대동아전쟁’이라고 불렀다.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을 꿈꾸며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전개한 것이다. 참고로 일본의 패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대동아전쟁이라는 호칭을 금지하였다.

태평양전쟁 초기에는 일본의 승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1942년 6월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었고, 미·영과 싸우기 위해 중국 전선에서 병력 일부를 빼내 남쪽으로 보내야 했다. 그사이 중국에서도 충칭 공격 등 주요 작전을 실시하고 해방구를 전면적으로 공격했지만 끝내 중국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고, 소련이 선전 포고와 함께 만주로 진격해 극동의 500km 전선에 걸쳐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동년 9월 일본은 항복 문서에 조인하였고, 난징 등에서 일본군이 투항함으로써 중일전쟁은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중일전쟁이 종결되면서,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이래 근대국가의 확립과 함께 추구된 제국주의와 파시즘 체제가 붕괴되었고 동아시아 정세도 커다란 변혁을 맞았다. 먼저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 격화하였다. 사실 1938년 10월 중국 정부가 우한을 상실한 후부터 국·공 합작의 모순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중일전쟁 직후 국민당이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1947년경 전세는 공산당 쪽으로 기울었다. 1949년 1월 공산당이 국민당의 정예부대를 격파하며 베이징에 입성하고, 4월 중국 정부가 있던 난징을 점령하였으며,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한편 국민당은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타이완으로 철수해 중화민국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독립이 논의된 조선 역시 해방을 준비하였다. 이미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건국 강령을 발표하고, 연합군에 가담하여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을 공표하였다. 광복군은 국내 진공 작전을 위해 특수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의용군 역시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 투쟁을 하며 만주를 거쳐 조선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조선 국내에서는 1944년 일본의 패망에 대비해 건국동맹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독립은 불완전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38도선을 경계로 남측과 북측에 각각 군정을 실시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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