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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創氏改名]

‘황국신민화’의 절정

1940년

창씨개명 대표 이미지

경성부민들이 창씨 개명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서있는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사전적 의미로는 “‘씨(氏)’를 창설하고 ‘이름(名)’을 고친다”라는 뜻이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2월 11일부터 개정 조선민사령을 시행하면서 조선의 관습에 없었던 씨(氏 : 家의 칭호)를 일본풍으로 만들고 신고할 것을 의무로 규정하였고, 이름도 개명하도록 하였다. 이는 중일전쟁 이후 철저한 ‘내선일체’ 기조에서 조선인들의 일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천황 중심체제로 흡수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일한 형태의 씨나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차이화’도 존재했다. 또한 창씨개명으로 인하여 강제동원 등으로 노역에 종사하다 사망한 사람들을 해방 후 찾을 수 없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2 창씨개명의 배경

일제는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조선의 관습을 조사하고, 이를 구별 내지는 차별, 그리고 규제하거나 활용하고자 하였다. 조선 고유의 제도들이 그 대상이 되었는데 이름과 관련된 내용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는 강제병합 이전이던 1909년 한국의 법률로 민적법을 시행하고 조선인 민적을 편제하였다. 민적의 양식은 당시 일본의 호적을 거의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는데, 조선인의 민적과 일본인의 호적 사이에 상호 교차가 이루어질 수 없도록 함으로써 민족을 완전히 구별하는 근거로 삼았다.

이어 1912년 조선민사령에서는 조선인의 친족·상속제도를 관습, 즉 조선인의 전통적인 규범에 따르도록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문중(門中)이라는 부계 혈연집단과 가족질서는 부계 혈통을 나타내는 성(姓)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 다만 조선인들에게는 이름에 대한 제한이 붙었다. 조선인들은 한글로만 이루어진 성명은 등록이 제한되었고 한자라 하더라도 조선 고유의 어휘를 나타내는 말은 이름으로 쓸 수 없었다. 또한 조선인이 일본풍의 이름을 짓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는 겉모습, 말투 등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구별’에 따른 ‘차별’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러한 내용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에 대한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이 가속화되면서 변화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시기 조선인이 일제에 완전히 동화되어 전쟁에 동원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황국신민의 서사 시행, 조선교육령 개정 등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흐름에서 ‘창씨개명’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일본의 국가사회체제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여 그 아래 신민인 가장이 이끄는 각 가(家)가 존재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조선의 문중을 중심으로 한 혈족 집단은 천황을 최정점으로 하는 식민지 지배체제의 불안요소였던 것이다. 따라서 집안의 이름(家名)을 칭하는 ‘씨(氏)’를 창설하여 조선인을 일본의 고유 사회제도로 흡수하고, 조선인들의 조상중심주의, 부계혈통에 기초한 혈연집단의 힘을 약화시켜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개개인이 정신적, 물질적으로 철저히 전쟁 수행에 동원되는 체제에서 조선인의 혈족 중심 전통을 약화시키고 그 자리에 일본 천황을 중심으로 한 ‘황실중심주의’를 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들에게는 혈연집단의 칭호인 성은 근대적 생활에 어울리지 않으며, 조선인의 성(姓) 전통은 중국을 본뜬 것으로 중국문화의 영향을 ‘창씨’를 통해 불식시켜야 한다고 선전했다.

3 창씨개명의 내용과 시행과정

조선인을 침략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해 일본에 동화시키고자 했던 의도에서 나온 창씨개명은 1939년 11월 10일 조선민사령의 개정을 공포하면서 현실화되었다. 이후 1940년 2월 11일부터 시행되었다. 그 골자는 첫째, 2월 11일부터 6개월, 즉 8월 10일까지 씨(氏)를 설정하여 신고할 것을 의무로 하고, 둘째, 신고가 없는 경우는 호주의 성을 씨로 하고, 셋째, 이름을 일본풍으로 바꿀 경우에는 재판소의 허가를 받은 후 신고하고 호적상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이었다. 첫째 사항은 ‘씨’를 호주가 설정하여 신고한다는 의미에서 ‘설정창씨(設定創氏)’였으며, 둘째 사항은 설정된 씨의 신고가 없을 경우 호주의 성을 ‘씨’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법정창씨(法定創氏)’라고 하였다. 이렇듯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창씨(創氏)’에 관한 것이며, 세 번째는 ‘개명(改名)’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씨’의 설정이 의무인 동시에 신고해야 하는 사항이었던 반면, 이름을 바꾸는 ‘개명’은 선택사항이자 허가만 받으면 되는 사항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법령 상의 변화에 따라 조선호적령도 개정되었다. 종래 조선 호적에는 ‘성명’이 존재하였지만 이것이 ‘씨명’으로 변경되었고, 호적양식 중 ‘본관’을 기재하는 란도 ‘성 및 본관’ 란으로 바뀌었다. 법률상·호적상의 본명은 ‘씨명’이 되었으며, 이전의 성은 ‘성 및 본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호적에 본래의 성이 남기는 하지만 이것은 조선인의 본명으로 기능할 수 없었다.

창씨개명이 시행된다고 해서 씨나 이름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총독부는 창씨개명의 본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단지 ‘씨’를 붙이는 것은 의미가 없고, ‘일본인스러운’ 씨를 창설하도록 유도하였다. 예를 들어 부부의 성을 합하여 두 글자의 씨로 만드는 것, 즉 김(金)씨와 이(李)씨를 합쳐 김이(金李)라는 씨를 창설하려는 것은 접수하지 않았다. 또한 예를 들어 ‘田中朴(田中+朴)’과 같이 일본인스러운 씨에 본인의 성을 붙인 창씨도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인 혈연집단의 힘을 약화시키고, 이름에서부터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심으려 했던 창씨개명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렇게 ‘일본인스러운’ 씨를 창설하도록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인스러운’ 씨로 유도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실제 일본인의 이름과 조선인의 이름이 완전히 같아지는 상황을 경계했던 것인데, 이는 창씨개명 실시 준비 단계에서부터 일본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반대의 태도를 견지했던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들이 창씨개명에 반대 혹은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이름만으로 조선인을 일본인과 구별할 수 없게 되면 단속에 어려움이 생기며, 무엇보다도 일본인들 스스로의 우월적 지위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총독부는 조선인이 호적 상 ‘성 및 본관’ 란에 성이 적혀 있기 때문에 구별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조선인들로 하여금 오히려 ‘조선인스러운’ 이름을 유지하게끔 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인의 본래 성에 지명 또는 본관의 글자를 따서 새로운 씨를 만드는 방법 등을 홍보하였다.

그렇다면 창씨개명은 실제로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까. 조선총독부도 초창기에는 씨설정 신고율을 그리 높게 보지 않았다. 혈연집단의 전통이 강하고 문중을 중요시 여기는 조선인들의 관념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 창씨개명의 무리함을 지적하거나, 혹은 위의 설명처럼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할 수 없게 되는 점에 대한 비판 등이 일어나자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창씨개명의 실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40년 2월 11일부터 씨 설정 신고가 접수된 이래 2개월이 넘게 지난 4월까지 실제 창씨 신고율은 5퍼센트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저조했다. 친일적인 태도를 가진 조선인 유력자들조차 성을 바꾸는 일에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총독부는 3, 4월쯤부터는 각종 강연회, 팸플릿 등을 만들고, 지방 관청 및 관공서들까지 나서서 창씨개명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권고했다. 각 지방에서는 ‘창씨 철저’ 활동이라는 이름 아래 경쟁을 붙일 정도였다. 창씨 신고 상황에 관해 총독부는 지속적으로 보고를 받았으며, 이 내용은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이 신고율이 각 지역의 ‘황국신민화’ 정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각 지역들에서는 더욱더 창씨개명을 ‘독려’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1940년 8월 10일 씨설정 신고가 마감된 이후 총 신고율은 약 80% 정도였다. 상당한 실적이었지만 이 숫자는 창씨개명을 위해 그야말로 전 조선이 총동원된 결과였다.

4 창씨개명과 조선인들

조상과 그를 중심으로 한 혈연집단에 대한 전통이 강했던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은 쉬운 선택지가 아니었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물론이고, 친일 성향이 강했던 유력자 집단들도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씨 설정 신고율을 높이기 위해 당시 도회(道會)나 부회(府會)에 속해 있던 조선인 유력자 및 관공리들에게 ‘솔선수범’하여 창씨를 하게끔 하는 압력이 들어오자 마지못해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조선인 유력자들로 구성된 총독 자문기관이었던 중추원의 참의이자,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친일파인 윤덕영(尹悳榮)도 창씨에 부정적이었지만, 결국 중추원 참의들은 80% 이상 창씨를 하였다.

일반 조선 민중들에게도 ‘강제’ 아닌 ‘강제’가 이루어졌다. 관청이나 경찰서 등에 근무하는 조선인 직원들도 역시 ‘솔선수범’을 강요받으며 창씨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생활 및 직업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특히 학교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강제가 이루어졌다. 총독부는 각 학교 교원 및 교직원들의 창씨 상황을 조사하고 직접 권고하면서 이들이 창씨를 하게끔 압박하였다. 아이들에게도 창씨가 강제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통해 호주인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창씨를 하도록 압박하는 방식도 동원되었다. 어느 학교에서는 창씨를 한 아이들에게 명찰을 달게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창씨를 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창씨를 하지 않으면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다거나, 취업에 불이익이 있다거나 하는 식의 풍문이 돌기도 했다. 일본이나 만주에 있는 조선인들은 차별과 억압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스러운 이름을 갖게 되는 창씨에 동참하는 경우도 많았다.

창씨개명에 강하게 반발하며 비판하거나 풍자한 사례들도 있었다. 특히 총독부 당국은 창씨개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단속하였는데, ‘조선이 독립한다면 원래의 조선 성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사례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성을 바꾸면 개새끼, 소새끼라고 불리는데, 창씨는 성을 바꾸는 것이므로 개새끼(犬の子)라는 씨를 제출’하였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찬성하고 ‘솔선수범’을 보인 친일인사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광수(李光秀)는 창씨개명 신고 기일이 도래하기도 전에 이름을 바꾸었다. 이광수는 일본 신무천황이 직위했던 산의 이름을 따서 ‘향산(香山)’으로 창씨하고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광랑(光郞)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조선인이 쓰고 있는 세글자 성명은 중국식이며 약 7백 년가량 사용했던 것이지만 그 전에는 지금 일본인이 사용하는 씨명과 거의 같은 형태였다고 하면서, 창씨개명은 7백년 이전의 조상들을 다시 따라가는 셈이라고 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5 창씨개명 그 후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에서 높은 신고율을 달성하였다고 선전하였지만, 정작 일반 민중들은 창씨를 한 경우에도 이전의 조선식 이름을 여전히 사용하거나, 병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만든 새로운 씨명을 일본어로 읽을 수 없는 경우조차 있었으며, 문패에도 창씨명과 이전의 이름을 병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새로운 씨명을 서로에게 소개하는 ‘명함교환회’가 열리거나 『창씨명감』이 발행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그 무엇보다도 빠르게 회복된 것이 바로 이름이었다. 해방 후 다시 문을 연 학교에서 가장 처음으로 했던 일이 출석부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을 정도였다. 조선총독부는 권력과 강제를 통해 조선의 뿌리 깊은 관념을 통째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창씨개명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 병사 또는 군속, 탄광이나 군수공장 등에서 일했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명부는 대부분 당시의 ‘본명’인 일본식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많은 경우 이 명부만으로는 조선이름을 알 수 없었다. 명부에 본적지 등이 기재되어 일일이 대조해 확인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특히 본인이 사망한 경우는 신원을 밝히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생존자의 경우도 명부의 일본식 이름과 자신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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