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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유교 지식인들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다

1919년

파리장서사건 대표 이미지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파리장서(巴里長書)’란 1919년 유교 지식인 137명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독립청원서’이다. 1919년 3월 27일 중국 상해(上海)에 도착한 김창숙(金昌淑)은 유림의 대표들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에게 보내어 회의에 참석하는 각 국가의 대표들에게 제출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영문번역본과 국문번역본을 수천 부 인쇄하여 각국 대표와 공관, 국내 각 향교 등에 보냈다. 이것을 ‘파리장서사건’ 또는 ‘제1차 유림단사건’이라고 부른다. 결국 ‘파리장서사건’은 일제에 의해 발각되었고 국내에 있던 곽종석(郭鍾錫)을 비롯한 유림들은 투옥되어서 옥고를 겪었다.

2 ‘경중유림(京中儒林)’의 파리장서운동 계획

1919년 2월, 3·1 운동을 준비하던 최린(崔麟)을 비롯한 천도교 측은 최남선(崔南善),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 등과 논의하여 “독립운동을 알리고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명망 있는 인물들을 대표로 추대해야 한다”는데 합의하였다. 하지만 접촉 결과 윤용구, 한규설, 박영효, 윤치호 등은 모두 천도교 측의 제안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에 천도교 인사들은 종교계와 연합을 시도하였다. 기독교, 불교와의 연합이 시도되었다. 이와 함께 유림과도 연락을 취했다. 당시 명망 높은 유림이었던 김윤식(金允植)은 “독립청원은 생각해볼 수 있지만 독립선언서 발표는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다. 영남 유림을 대표하던 곽종석은 천도교 측의 제안에 대해 답변을 하였으나 시일이 늦어져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데 참여하지 못하였다.

1919년 3월 3~4일경 서울(당시 명칭은 ‘경성’)에서는 유교 지식인들의 모임이 개최되었다. 참여자는 김창숙(金昌淑), 이중업(李中儼), 유준근(柳濬根), 성태영(成台榮) 등이었다. 이들을 ‘경중유림(京中儒林)’이라고 흔히 부른다. 이들은 서울에 상주하는 고위 관료가 중심이 되는 유림 세력이 아니었다. ‘경중유림’은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한 각지 유생들이었으며, 그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40세 전후의 장년층이었으며 오래전부터 교분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경중유림’은 오래전부터 정치적ㆍ조직적으로 결속되어 있었고 활동력 있는 40대 유생층과 반일운동 경력을 가진 유림 원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중유림’은 제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것과 이 회의의 기본 방침으로 미국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제시한 14개조가 선택된다는 것에 주목했다. 윌슨은 “식민지 주권의 결정에서 주민들과 들어서게 될 정부 사이의 자결(self-determination)이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경중유림’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유림들의 서명이 담긴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날 회의에서 ‘경중유림’은 한국 유림의 독립 의지를 밝히는 제안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제안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명망 높은 유림 인사를 지도자로 삼고, 전국의 유림을 움직여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호남의 거유(巨儒) 전우(田愚)와 영남의 거유였던 곽종석을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우를 설득하는 것은 유준근이, 곽종석과의 연락은 김창숙이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전국 8도의 유림을 결속하기 위해 대표자들을 선정하고 각자 맡은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3 파리장서의 작성

김창숙은 곽종석에게 사람을 보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낼 예정인데 글을 작성해줄 것을 부탁했다. 곽종석은 이를 승낙하고, 경상북도 성주에 거주하던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에게 초안을 작성을 의뢰했다. 이와 함께 자신의 제자인 중재(重齋) 김황(金榥)에게도 초안을 작성하게 하였다.

1919년 3월 15일 김창숙은 곽종석의 거처인 경상남도 거창에 도착하였다. 김창숙과 곽종석은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전반적인 계획을 논의하고 문안 작성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장석영이 작성한 문안과 김황이 작성한 문안을 검토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김황이 작성한 문안을 바탕으로 외교 실무의 유용성을 고려한 새로운 문건이 작성되었다. 곽종석은 파리로 가게 될 유림 대표자인 김창숙에게 수정된 독립청원서와 이것에 서명한 사람들의 명단을 주었다. 또한 해외로 나가는데 필요한 여러 편의를 봐주었으며, 해외여행을 도와줄 인물을 알선하고 여비를 지원했다. 중국에서 도움을 줄만한 사람들도 소개했다. 곽종석은 파리에서 상해로 경유하여 돌아 올 때 이승만(李承晩), 안창호(安昌浩), 이동녕(李東寧) 등과 상의하라고 당부하였다. 김창숙은 ‘독립청원서’를 휴대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김창숙이 서울에 도착한 후 ‘경중유림’은 다시 회합했다. 전국 8도의 유림을 규합하기로 했던 사항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 중 호남 유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전우와의 교섭이 실패했음이 알려졌다. 전우는 나라를 회복하는 목표는 ‘이씨 종사’를 회복하고 전통적인 유교 문물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는 대통령제도가 논의되고 이것은 서양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또한 파리강화회의의 대표들은 ‘이적(夷狄)의 우두머리’인데 그들과 제휴하게 되면 간직하고 있던 ‘화맥(華脈)이 손상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파리장서’와 여비를 휴대하고 가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되었다. 김창숙이 지방을 돌 때 이미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았기 때문에 여비와 ‘독립청원서’를 직접 휴대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논의 끝에 중국 상점 동순태(同順泰) 서울 본점에서 일하는 점원에게 부탁하여 비밀리에 봉천에 있던 분점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경성유림’이 김창숙을 파리로 보내는 문제로 논의하던 즈음, 호서 지방의 유학자인 임석후가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는 호서지방의 유학자 1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 청원서의 수석 서명자는 1896년 홍주의병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이었다.

‘경중유림’의 유진태와 이득년(李得秊)은 호서유림과 영남유림의 입장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두 갈래의 파리장서의 통합논의가 이루어졌다. 논의를 위한 회의에 호서유림의 대표자로 임석후가 영남유림의 대표자로 김창숙이 참석하였다. ‘경중유림’의 주요 인사들도 참여하였다. 그 결과 김황이 작성하고 곽종석과 김창숙이 작성했던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양측 독립청원서의 서명자를 통합하여 기재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학자들은 총 137명이 되었다. 이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파리로 갈 사람으로는 김창숙이 선정되었다. 임석후는 국내에 남아 국내외의 연락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4 상해에 도착한 김창숙과 파리장서

1923년 3월 23일 밤 10시 김창숙은 파리 행을 목표로 서울역(당시 경성역)을 떠났다. 3월 27일 압록강을 거쳐, 안동, 봉천, 천진, 제남, 남경을 경유하여 상해에 도착했다. 여행 중 봉천에서 동순태 분점에 맡겨둔 여비와 청원서를 찾았다.

당시 상해에는 3·1 운동의 영향으로 망명한 혁명가들이 모여 들고 있었다. 김창숙은 이시영, 조성환, 신채호, 조완구, 신규식 등을 만나 ‘독립청원서’ 제출 등에 대해 상의했다. 이 과정에서 김규식이 민족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이미 상해를 출발하여 파리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창숙은 이동녕 등을 매일 만나며 추후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자신이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가져온 ‘독립청원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후 인쇄하여 우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발송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독립청원서’를 각국 외교관, 중국의 정계요인, 해외동포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배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중국을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진행하기 위해 상해에 남아있기로 결정하였다. 최종적으로 김창숙은 작성해온 ‘독립청원서’를 약간 수정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김창숙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냈다는 사실은 성주지역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탄압했던 일본 경찰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파리장서사건’ 또는 ‘제1차 유림단사건’이라고 한다.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일본 경찰은 만세운동을 강하게 탄압하였다. 그리고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을 잡아들이고 취조했다. 이 과정에서 유림들이 파리에 ‘독립청원서’를 보낸다는 사실이 발각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성주지역에 있던 송준필, 장석영, 이덕후, 성대식 등을 잡아들였다. 이후 곽종석을 비롯한 여러 유림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청원서’작성에 앞장섰던 곽종석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경찰에 연행되었고, 이후 조선총독부 재판소로부터 징역 2년형은 언도받았다. 중국에 있던 김창숙은 ‘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를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했다. 이후 『사민일보(四民曰報)』 발간을 주도했으며, 신채호가 편찬했던 잡지 『천고(天鼓)』의 편집 등을 담당하였다.

5 파리장서의 내용과 의미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의 내용은 크게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함을 밝혔다. 한국은 “3천리 강토에 2천만의 인구, 4천여 년의 역사를 유지하고 보전한 국가이며 한 번도 나라를 잃은 적이 없는데, 최근 일본이 무력을 믿고 간악한 자를 끼고 임금을 협박하여 강제로 조약을 맺게 했다”라고 하였다. 특히 일본은 여러 번 전 세계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았는데, 이것은 “한국에 대한 공의(公義)를 해친 것이고 만국에 대해서는 신의를 잃은 것”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 파리강화회의를 신뢰하고, 이 회의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나타내고 싶다고 했다. 파리강화회의및 폴란드 등의 독립 소식을 듣고 “우리도 독립을 요구할 기회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종 황제의 국상을 기해 일어난 일본의 살육에 크게 분기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이 약소국이라고 하더라도 2천만 인구가 4천여 년의 역사를 지켜왔기 때문에 충분히 독립을 감당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각국의 풍습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자기 방식대로 한국을 통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파리장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공의 및 신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유림이 가지는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림들은 서양은 ‘이적(夷狄)’이라는 의식을 탈피하고 파리강화회의가 한국의 독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 각국을 교섭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과거 유림의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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