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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일본, 한국 보호국화를 향한 첫걸음을 떼다

1904년(고종 41)

한일의정서 대표 이미지

한일의정서(국한문본)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규장각한국학연구원)

1 개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란, 러일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서리(外部大臣署理) 이지용(李址鎔)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조약이다. 겉으로는 황실의 안전과 대한제국의 독립, 영토 보전을 약속하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대한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자주권을 제약하는 조항을 담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대한제국과 일본의 공수동맹이라는 명분으로 추진된 의정서였지만, 실제로는 공수동맹 본래의 성격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한일의정서의 체결은 대한제국 식민지화의 서막을 알리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2 청일전쟁 이후 재편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불안정한 세력균형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조망해 볼 때, 청일전쟁(淸日戰爭) 이후 한국은 힘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힘의 공백 상태가 조성되자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등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지닌 주변 열강들은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에서 세력균형을 이루기 위해 경쟁과 협상을 벌였고, 의견을 협의하고 절충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중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친 나라는 단연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두 나라는 1896년 5월의 ‘베베르-고무라 각서’, 1896년 6월의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1898년 4월의 ‘로젠-니시 의정서’까지 세 차례의 조약을 체결하며 한국에 대한 의견을 상호 협의했다.

특히 ‘로젠-니시 의정서’는 삼국간섭 이후 가까워지는 영국과 일본의 동맹을 견제했던 러시아가 일본과 맺은 조약이었다. 이를 통해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에서 어느 한쪽의 정치적 영향력이 우세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의정서 체결을 통해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잠시간 균형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는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두 나라는 의정서 체결 이후에도 호시탐탐 한국에 진출할 기회를 엿보며 서로를 견제했다. 세 차례나 조약을 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주와 한국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대립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양국 사이의 갈등은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본격화된 계기는 1900년 청에서 반외세의 기치를 걸고 일어난 의화단 운동이었다. 베이징의 각국 공관과 거류민이 의화단에 포위되는 등 피해가 커지자 러시아는 만주 지역의 자국 철도 및 이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다.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도 군대를 철수하지 않은 채 만주에서 영향력을 유지·확대하고자 하였고, 이어 한국의 용암포를 강점하고 마산포까지 조차(租借)했다. 일본은 이러한 러시아의 적극적인 만주-한국 동시 진출 계획을 경계하며 대응책 마련에 고심했다. 1902년 1월 맺어진 제1차 영일동맹은 이 산물이었다.

이렇듯 20세기 초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싸고 발생한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었다. 양국 사이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세력 유지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다고 여겼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했다. 한국과의 비밀 협약 체결을 시도하는 것 역시 그 일환이었다.

3 한일의정서의 체결 배경과 한반도 전시중립선언

1903년 말부터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해 한일 간 비밀조약 체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본 내각회의에서는 청일전쟁 당시 맺었던 한일협약(韓日協約)처럼 한국과 공수동맹(攻守同盟)의 성격을 갖는 군사조약 혹은 다른 보호적 협약을 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의 방침을 결정했다. 그렇지 않고 한국이 먼저 전시 중립을 선언한다면, 이를 무시하고 일본군을 한반도에 진주(進駐)했을 때 쏟아질 국제적 비난 여론을 고려한 것이었다.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는 이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알리며, 비밀리에 공수동맹을 체결할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러일전쟁의 발발이 가시화되자 그동안 외교정책으로 추진해오던 중립화 정책의 일환으로 비밀리에 전시 국외 중립 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의 비밀협약 체결 제안에 동의할 리 만무했다. 하야시 공사 또한 고종의 성격상 한일동맹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고종의 구미를 당길 수 있을 만한 수단을 고민했다. 결국 하야시 공사는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최대 현안이었던 도일(渡日) 망명자 처리 문제의 해결을 제안함으로써, 고종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냈다.

도일(渡日) 망명자란, 을미사변, 독립협회 사건 등 사건으로 일본행을 택한 정치망명자를 의미한다. 고종의 사촌 이준용(李埈鎔), 박영효(朴泳孝), 유길준(俞吉濬), 장박(張博), 조희연(趙羲淵), 이두황(李斗璜), 권동진(權東鎭) 등이 대표적이다. 고종은 이들을 황실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동안 일본은 이들 망명자를 보호하며 대한제국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그러던 일본이 협약 체결의 조건으로 망명자 처분 문제에 관한 대한제국의 요구를 수용할 뜻을 밝혔던 것이다.

1904년 1월 19일 외부대신 이지용, 황실 측근 세력 이근택(李根澤), 민영철(閔泳喆)은 고종의 위임장을 받아 한일밀약을 체결하고자 하야시 공사를 방문하였다. 여기서 하야시 공사는 망명자 문제를 별도 조항으로 처리하고, 한일간 군사동맹적 성격을 강화한 수정 조약안을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한국정부를 협상에 응하게 하기 위해 망명자 처리 문제를 앞세웠다면, 한국 정부가 정식으로 조약 교섭에 응하자 본격적으로 군사동맹 체결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수정안에 대해 한국 정부는 망명자 처리를 우선시하고,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군사동맹보다는 유사시 상호 지원을 약속하는 정도의 조약안을 제안하였다. 양국 사이에 조약안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계속되었으나, 하야시 공사는 시일을 더 끌 수 없다고 판단하여 1월 22일경으로 비밀조약의 조인을 예정하였다.

그런데 딱 하루 전인 1월 21일, 중국에서 난데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즈푸(之罘)에서 한국 정부의 전시중립선언(戰時中立宣言)이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고종은 이지용에게 하야시 공사와 교섭하게 하면서, 비밀리에 중립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일본 측의 교섭에 응한 것은 중립선언을 추진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하야시 공사나 외부대신 이지용의 낙관적 기대와는 달리 고종은 결국 일본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국의 전시중립선언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은 한일군사동맹을 계속 추진하고자 했다. 외무대신 고무라는 속히 조약을 체결하라고 하야시 공사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당시의 경복궁 점거, 친일정권 수립과 같은 사태의 재발을 염려하고 있었던 고종은 이지용을 시켜 일본 측에 전쟁 발발 시 안전보장을 요구하도록 했다. 일본이 한국에 출병할 경우 경성(京城) 내에 다수의 병정을 들이지 않고, 또 경성과 정부는 감히 해치지 않을 것을 보증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목표로 전쟁을 벌이려던 일본은 한국의 안전을 결코 보장할 수 없었다. 고종은 일본이 한국의 엄정 중립을 승인하는 조건 아래에서만 조약 교섭에 응하도록 명을 내렸다. 조약 체결은 계속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결국 고무라 외무대신은 하야시 공사에게 훈령을 내려 동맹조약 체결의 좌절을 기정사실화하고 당분간 적당한 때를 기다리라고 지시하였다.

4 한일의정서의 체결과 그 영향

1904년 2월, 러일 간의 최후협상이 결렬되고 일본군이 여순의 러시아함대를 기습하며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인천 팔미도(八尾島) 앞바다에서는 이른바 ‘제물포해전’이 벌어졌다. 러일 개전과 동시에 일본군이 인천에 파병되었음을 알리는 전보가 궁내부에 도착하자, 고종은 크게 동요했다. 파천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측근 세력의 주장이 춘천, 프랑스공사관, 평양 등으로 엇갈리는 바람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청일전쟁의 사례를 볼 때, 일본의 안전보장은 의미 없는 문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고종과 측근 세력은 서울만이라도 중립지대로 보장받고자 러시아 및 프랑스공사관과 협의하기도 했다.

마침내 2월 9일, 일본군은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하여 수도 서울로 속속 진입하였다. 이러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하야시 공사는 고종을 알현하고, 한일동맹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대한제국에 군사기지 제공과 협력을 골자로 하는 동맹조약 체결을 제안하였다. 다음 날인 2월 10일, 러시아와 일본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하자 주한러시아공사 파블로프(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Павлов)는 즉각 한국에서 철수를 결정하였다. 러시아공사가 철수하자 일본측은 더욱 강력하게 고종을 압박하며 한일동맹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결국 하야시 공사와 외부대신서리 이지용 사이에 조약 체결 교섭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러일전쟁 이전 양국이 조율하던 조약안과는 달리 일본의 강경한 요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조약안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지용은 맨 처음 하야시 공사가 제시했던 망명자 처리 문제를 골자로 하는 조약안으로 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야시 공사는 그 조약안은 이미 취소되었다고 하며 군사동맹적 성격이 크게 강화된 조약안을 제시하고, 1904년 2월 23일 그 체결을 성사시켰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지 보름만의 일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일의정서는 원래 러시아에 대한 대한제국과 일본의 공수동맹이라는 명분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영토 내에서 일본군의 군사적 행동을 허용하는 등 공수동맹 본래의 성격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한일의정서를 계기로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국내에 들어와 있던 일본군의 주둔은 합법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의정서 제1조에 한국은 일본의 조력 및 조언을 받아 시정의 개선을 도모한다는 등의 시정개선 권고 조항이 부가된 점은, 일본이 군사동맹에서 나아가 한국의 내정 장악까지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이 조항을 근거로 이후 일본은 한국에 외교, 재정 고문을 비롯해 많은 고문관과 교관을 파견하여 내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5조에 따르면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 승인을 거치지 않고는 앞으로 본 협정의 취지를 위반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라는 점이 명기되어 있다. 외국과의 협약 체결에서 양국의 상호 승인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이는 대한제국과 열강 사이의 외교를 단절시키기 위한 일방적 조치였다. 일본은 이후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 등 열강들과 일련의 조약을 맺어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보호의 권리를 명문화하였다. 일본 스스로 의정서의 내용을 위반한 셈이었다. 이러한 한일의정서의 체결로 일본은 조선 보호국화의 구상을 실현하는 첫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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