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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과 12·12

유신체제의 종말과 신군부의 대두

1979년

10·26과 12·12 대표 이미지

현장에서 사건을 재현하는 김재규와 12·12 사태 당시 중앙청에 집결해 있던 무장병력의 모습

연합뉴스, 국가기록원

1 개요

10·26은 1979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한 사건이다. 10·26 사건으로 1961년 5·16 이후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장기 집권은 끝을 맺었고, 유신체제도 해체되었다. 10·26 직후 발생한 권력 공백상태에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월 12일 서울 및 수도권 일대의 병력을 동원해 일으킨 군사반란이 12·12다. 12·12는 전두환과 신군부가 권력의 핵심으로 전면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1980년 전두환 정권 탄생의 기반이 되었다.

2 유신체제의 위기와 권력층 내부의 균열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며 영구집권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고, 1975년 5월에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하여 사회의 민주화 요구를 철저하게 억압했다. 긴급조치 9호 발표 이후 민주화운동은 한동안 침체되었으나, 1977년 가을 경부터 재야세력, 노동자·농민 등을 중심으로 반유신 저항운동이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반유신 재야세력의 연합조직인 ‘민주주의국민연합’이 결성되었고, 동일방직 사건과 함평 고구마 사건이 발생하며 유신체제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에 치러진 제10대 총선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32.8%를 득표하여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앞질렀다.

유신체제의 위기는 1979년 들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1979년 8월 YH사건이 발생했다. YH무역의 여공들은 회사의 횡포에 항의하기 위해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는데, 정부가 경찰을 투입해 이들을 강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신민당은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정부는 9월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총재 직무 수행을 정지시키는 것으로 대응했고, 10월에는 김영삼을 국회의원 직에서 제명하는 조치를 취했다.

박정희 정부의 이러한 행태로 그간 쌓여온 국민들의 분노와 불만이 폭발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는데, 이것이 부마항쟁이다.

10월 16일 부산 지역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시위는 곧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대규모 참여에 힘입어 더욱 격렬한 형태로 발전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과 위수령 선포로 대응하는 한편, 공수부대 등의 군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대를 진압했다. 부마항쟁은 일단 정권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이처럼 1970년대 말부터 격화된 반유신투쟁은 박정희 정권 핵심부의 균열을 가속화했다. 특히 정권 반대 움직임에 대한 대응 방식을 두고 온건한 대응을 주장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강경 대응을 주장한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이 거칠게 대립했다. 1970년대 말 차지철은 대통령의 신변 보호라는 경호실장 본연의 임무를 넘어 국가 운영 전반에 광범위하게 개입하며 정권의 2인자로 행세했다. 차지철의 이러한 행태는 김재규를 비롯한 박정희 정권 상당수 인사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박정희의 비호 속에 차지철의 월권행위는 계속되었다. 중앙정보부와 경호실이라는 강력한 물리력을 갖춘 두 기구 수장 간의 갈등은 정권 내부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박정희 정권은 대외관계에서도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특히 1977년 출범한 미국의 카터 정부가 ‘인권 외교’를 내세우며 박정희 정권을 압박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면서 한미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또한 박정희 정부가 미국 의회를 대상으로 로비를 시도한 사실이 적발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3 10·26 사건의 전개

그러던 와중,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에서 김재규가 동석한 박정희와 차지철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연회에는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대통령 비서실장), 심수봉(가수), 신재순(모델)이 참석했고, 김재규의 초청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안가 별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연회장에서 박정희·차지철을 직접 살해하고 박흥주, 박선호 등 자신을 수행한 중앙정보부 직원들을 동원하여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을 제압했다.

김재규의 행동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흔히 다음과 같은 가설들이 거론된다. 첫째, 김재규와 박정희·차지철 간의 야당 및 재야세력을 비롯한 반유신세력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차이 때문이라는 설, 둘째,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김재규 본인의 신념 때문이라는 설, 셋째, 차지철에 대한 김재규의 개인적인 증오 때문에 우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설, 넷째,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설 등이 있다.

사건 직후 김재규는 사건의 전말을 숨긴 채 정승화를 대동하고 육군본부로 이동하여 사태를 통제하려 했지만 곧 범인임이 발각되어 몇 시간 후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사건 직후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한 주요 각료들은 비상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4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의 대두

박정희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권력 공백 상황을 야기했고, 이러한 과도기적 상황을 어떻게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관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총리는 11월 10일 기존의 유신헌법 절차에 따라 일단 대통령을 선출하되, 선출된 대통령은 잔여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최규하는 12월 기존의 유신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75년 이래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했던 긴급조치 9호를 폐지하는 등 유신체제 해체를 위한 절차를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권력 공백의 상황을 파고든 것이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에 취임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과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었다. 하나회는 전두환·노태우·최성택·김복동 등이른바 ‘정규 육사’의 첫번째 기수인 육사 11기 장교들로 구성된 ‘오성회’라는 모임에 기반을 둔 군 내부의 비밀 사조직이다. 육군사관학교는 개교 초기에는 수개월 정도의 단기 교육을 통해 장교를 양성했으나, 1951년에 1학년으로 입학한 생도들부터는 4년제 정규 교육을 실시했다. 육사 11기는 정규 교육을 수료한 첫 번째 기수로 스스로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기도 했다.

전두환 등을 통해 소규모로 시작된 하나회는 매 육사 기수마다 대략 10여명의 장교들을 회원으로 확보하며 세를 불려나갔다. 하나회는 대부분 영남 출신 장교들로 채워졌으며, 윤필용, 유학성, 황영시 등 육사 11기보다 윗 기수의 선배 장교들을 후원자로 확보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하나회는 박정희의 친위 조직을 자임했으며, 특전사,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보안사 등 군내 핵심 기구의 주요 보직을 독점하면서 군 내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나회는 1973년 4월에 발생한 ‘윤필용 사건’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하나회의 인맥은 그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군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일례로 1979년 당시 하나회 구성원들은 보안사를 비롯한 군 내 첩보기구, 청와대 외곽을 방어하는 수경사 30·33 경비단, 9사단 등 서울 근교의 전투부대, 공수여단 등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는 12·12 군사반란 성공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했다.

5 12·12 군사반란의 전개

12·12의 직접적 원인은 정승화 참모총장과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장교들의 갈등이었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경호실 등 주요 권력기관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광범위한 권력을 휘둘렀고, 정승화는 전두환 및 하나회의 전횡과 월권을 막기 위해 인사 조치를 통해 이들을 좌천시킬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회는 정승화의 이러한 움직임을 조기에 포착했고, 반란을 통해 정승화를 비롯한 군 수뇌부를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이들은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자신들의 지휘 하에 있는 서울·수도권의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개시했다. 반란군은 12월 12일 저녁 10·26 사건에 대한 조사를 빌미로 참모총장 관저에서 정승화를 체포했다. 체포의 표면적 명분은 정승화가 10월 26일 당시 김재규와 함께 있으면서 사건에 동조한 혐의가 있으므로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최규하에게 정승화 체포에 대한 사후 재가를 요청했지만 최규하는 국방부 장관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거부했다. 반란 사실이 알려지자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등이 반란군에 대한 대응 및 정승화 구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군 수뇌부는 지휘체계의 혼란 속에 반란군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는데 실패했다. 군 병력을 통제해야 할 국방부 장관 노재현은 사건 발생 직후 도피하였다가 몇 시간 후 발견되어 하나회의 수중에 들어갔고, 노재현의 권유에 따라 최규하가 정승화 체포를 재가함으로써 12·12는 반란군의 승리로 끝났다.

12·12는 군 내부의 반란으로서 최규하가 이끌던 민간 정부를 직접적으로 전복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이후 전두환 군사 정권 탄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2·12 이후 최규하 정부는 무력화되었고, 전두환을 비롯한 12·12의 주모자들이 정부와 군의 요직을 차지하며 국가 운영의 실권을 휘두르게 되었다. 12·12 반란 이후 몇 달 만에 전두환은 현역 군인 신분으로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을 차지하며 군과 정보 조직을 동시에 장악했으며, 노태우를 비롯한 기타 신군부 인사들도 군에서 고속 진급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전두환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국민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1980년 9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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