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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

민주주의의 암흑기, ‘겨울 공화국’이 도래하다

1972년

10월 유신 대표 이미지

유신 헌법 공포식

e영상역사관(한국정책방송원)

1 개요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어 10월 27일,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새 헌법개정안을 공고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1972.12.27)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의거한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는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다. 이후 1979년 10월까지 근 7년간 이어진 유신체제는 민주주의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한국 민주주의의 최대 암흑기’로 평가된다.

2 유신의 성립과정

박정희가 “장기집권에 의한 독재는 (…)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던 1969년 3선 개헌 당시부터 역설적으로 그가 3선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의혹은 특히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기간에 짙어졌다. 김대중 신민당 후보는 전주 유세에서 정권이 종신총통제를 획책하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고, 서울대 총장을 지낸 법대 교수 유기천이 강의 중 그가 대만에 갔을 때 한국에서 총통제를 연구하러 온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는 말을 한 것도 같은 시기였다.

정권이 풍년사업이란 이름의 개헌작업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했던 1972년 5월 전후로 여겨진다. 이후락과 대통령비서실장 김정렴, 청와대 비서관 홍성철·유혁인·김성진 등이 중심이 되어 신(新)헌법의 골격을 짜는 한편, 헌법의 제정·개헌방법, 발표 시기·방법 등을 논의했다. 헌법 초안은 신직수가 장관이던 법무부로 넘어가 김기춘 등 검사들이 보다 구체화했고, 한태연·갈봉근 등 일부 헌법학자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준비과정은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조차도 발표 며칠 전에야 통보 받았을 만큼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마침내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국회 해산과 정당·정치활동의 중지, 헌법 효력 정지, 이후 새 헌법개정안을 공고하고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면 헌정질서를 정당화하겠다는 것이 선언의 골자였다. 이어 10월 27일,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새 헌법개정안이 공고되었다. 11월 21일의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1972.12.27)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1972.11.25, 법률 제2352호)이 제정되었고, 12월 23일에 치러진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는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다.

3 유신의 배경 : 국제정세

박정희는 긴급선언에서 남북대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체제의 시급한 정비를 유신의 중요한 명분으로 내세웠다. 냉전 시기에 만들어진 기존 헌법과 체제는 남북대화 나아가 평화통일을 추진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이유였다. 실제 1969년 미국 닉슨(Richard Milhous Nixon) 정부의 등장 이후 국제 사회는 데탕트 국면에 접어들었고, 그 연장에서 남북한 역시 1971년부터 남북적십자회담과 이후락·박성철의 상호 방문 등 수면 위아래를 오가는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와 관련해 정작 유신헌법은 전문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하여”란 구절이 추가된 것 외에는 영토조항 등 남북관계에 직결된 부분은 수정되지 않았다.

긴급선언 발표 직전, 미국과 문구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대폭 빠지긴 했지만 기실 박정희가 유신의 명분으로 가장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긴장완화 또는 냉전의 이완을 의미하는 데탕트란 국제 정세였다. 미소의 군축과 미중 화해, 서독의 동방정책 등으로 상징되는 데탕트는 기본적으로 닉슨 정부의 현실주의 외교에서 비롯했다. 우방이자 전 세계 자유진영의 지도자 격인 미국이 북한을 도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적국(敵國)인 ‘중공’과 대화하고 관계개선을 모색한다는 것은 그전까지 박정희 정부의 국제정세 인식이나 대외정책과 크게 상충하는 것이었고, 자연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더하여 한국으로부터 발표 하루 전에 개헌을 통보 받은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유신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다. 주한미국대사 하비브(Philip Charles Habib))가 그것을 권고했고, 미국정부도 수용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미국은 불관여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한국의 긴급선언 초안에서 자국의 대외정책 비판 부분을 수정하도록 개입하고 압력을 넣어야 했다.

4 유신의 배경 : 국내 정치·경제·사회적 혼란

데탕트는 단지 유신의 명분에 불과했다는 지적이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박정희가 일관되게 데탕트 위기론을 주장했고 그 자신도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는 평가가 보다 우세하다. 다만 그 같은 국제환경의 변화와 유동성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위기가 아닌, 기회일 수 있었고 실제 좀 더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대응을 강조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아가 설령 위기였다 하더라도 그에 대처하는 방식이 반드시 유신과 같은 억압적·통제적이고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방향이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추진한 실질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970년 전후 국내의 혼란과 재집권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1968년 일련의 안보위기 국면에서 시작된 한국과 미국 사이의 이견과 갈등은 미국이 1970년 주한미군 감축을 일방적으로 한국에 통보하면서 보다 심화되었다.

더욱 이 시기 국내에서는 전태일의 분신(1970.11), 광주대단지 사건(1971.8), 파월노동자들의 KAL빌딩 점거·방화사건(1971.9) 등이 이어지며 소외된 노동자·빈민들의 생존권 문제가 터져나왔다. 이 같은 사회적 동요와 민심의 이반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40대 기수론을 등에 업은 김대중 후보는 ‘대중경제론’, ‘남북교류론’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공약을 잇달아 발표하며 소위 선거바람을 일으켰다. 직접적으로는 대학생들의 교련반대시위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해 대통령에게 내정·외교·국방상의 비상대권을 부여하고, 이어 1972년 8월 사채 동결을 골자로 하는 긴급명령(8·3조치)을 발동한 것은 정권의 위기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유신의 전조였다고 볼 수 있다.

5 유신헌법의 주요 내용

기존 헌법을 전면 개정한 유신헌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대통령선거제도: 직선제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간선제
② 국회의원선거제도: 임기 4년의 소선거구제 → 임기 6년의 중선거구제
③ 대통령 선출, 유신정우회 후보자에 대한 찬반투표, 개헌안 의결권, 국가의 통일정책을 심의·결정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신설
④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 국회의원(국회의원 정수의 1/3인 유신정우회)·법관 임명권과 같이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 부여
⑤ 반대로 입법부의 경우 국정감사권이 박탈되고 연간회기가 제한(150일)되었으며 대통령 탄핵권이 부정되는 등 권한 약화
⑥ 사법부 독립 훼손
⑦ 기본권 유보(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법률에 의해 제약가능) 또는 제한(구속적부심제 폐지, 고문 등 자백에 근거한 처벌 불가조항 삭제)

요컨대 유신헌법은 삼권분립 및 견제와 균형이라는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전면 부정한 헌법이었다.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고, 반대 세력의 비판은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했다. 특히 유신의 상징과도 같은 긴급조치는 대통령이 국정 전반에 걸쳐 발동할 수 있는 권한으로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아니었고 국민의 기본권을 자의적으로 제한할 수 있었다.

6 민주주의의 궤도를 벗어난 유신체제

유신체제는 형식적·절차적 측면에서도 민주주의의 궤도를 완전히 벗어난 폭압적·권위적·전체주의적 정치체제였다. 긴급조치가 잘 보여주듯 유신은 일체의 비판은 물론 찬반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 초법적이고 극도로 경직된 체제였다. 때문에 이 기간 개인의 인권과 사회적 자율성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정권이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를 앞세워 유신을 정당화하고, 새마을운동에서 보듯 경제성장·근대화 욕망과 결합된 광범한 대중동원을 통해 체제를 지탱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대증요법 이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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