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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원조경제체제

누가 무엇을 위해 ‘원조경제’를 운영했던 것일까?

미상

1950년대 원조경제체제 대표 이미지

1953년 미국 구호물자의 부산 인수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국가기록원

1 개요

1945년 해방 이후, 그리고 1948년의 분단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 특히 미국이 중심이 되어 제공하는 원조 물자를 수여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의 발발로 한국은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고, 이에 대응한 국제사회의 원조 물자는 양적인 수준에서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와 함께 유엔과 미군 주도의 유엔군이 원조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6·25전쟁 이후 원조의 운영 구조와 성격은 질적으로 달라졌다. 특히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는 상호안전보장계획(Mutual Security Program, MSP) 원조로 변화했고, 군사원조를 중심으로 한 원조의 ‘상호성’은 한미관계의 틀마저 새롭게 구성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1950년대의 경제를 흔히 ‘원조경제’라고 칭하지만, 그것만으로는 1950년대 원조경제체제를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원조경제체제는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한국의 군사력, 권력구조, 국제관계 등 다양한 측면에서 강한 규정력을 발휘했다.

2 미국의 대외원조와 대한(對韓) 원조의 시작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선물처럼’ 해방을 맞이했지만 만주-한반도-일본으로 이어졌던 ‘식민지 경제권’의 붕괴와 미소의 38선 분할 점령, 수백만에 달하는 전재민의 귀환으로 식량, 주택, 의료 등 각종 문제에 직면했다. 한반도의 38선 이남에서 미군정을 통한 직접 통치를 선택했던 미국은 적어도 한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이러한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했는데, 이는 미국의 대외원조가 한반도에 적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세계적 전쟁을 수행하며 경제 규모는 두 배가 되었고, 전 세계 산업 생산량의 절반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생산량을 바탕으로 대외원조를 대외정책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소련이라는 새로운 적에 성공적으로 맞설 수 있는 대응 전략이기도 했다. 전후 미국 대외원조는 점령지역 구호원조로 시작되었다. 점령지역 구호원조는 연합국이 점령한 지역에 대한 긴급구호 원조로서, 연합국 구제부흥기관(United Nations Relief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 UNRRA) 원조와, 미 육군부 예산에서 공여되는 원조인 점령지역 행정구호(Government and Relief in Occupied Area, GARIOA) 원조, 점령지역 경제부흥(Economic Rehabilitation in Occupied Area, EROA) 원조 등을 말한다.

UNRRA 원조는 모두 증여 형식으로 공여되었는데, 종전 이후 대부분의 UNRRA 원조가 소련 영향력 하의 동유럽과 남유럽, 중유럽 지역에 공여되었기 때문에 1947년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폐지될 수밖에 없었다. GARIOA 및 EROA 원조는 독일, 오스트리아, 일본, 한국 등에 제공되었는데, 대부분은 일본과 독일에 공여되었다. 특히 일본은 1946년부터 1951년까지 GARIOA 원조로 15억 7,750만 달러를, EROA 원조로 2억 8,550만 달러를 제공받는 등 총 19억 5,530만 달러를 제공받았다. 한국도 미군이 진주한 1945년 9월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12월 10일 한미 간에 한미원조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GARIOA 원조로 약 4억 1,000만 달러를 제공받았다. 이는 해방 후 혼란과 악성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민생 안정에 기여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미국의 본격적인 대외 원조는 1947년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에 의해 경제원조의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마셜 플랜, 즉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 원조는 전후 긴급 구호 원조의 성격을 가졌던 GARIOA, UNRRA 원조 등과 달리 유럽의 경제 부흥을 목표로 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대외원조의 출발점이 되었다. ERP 원조의 운영기관이었던 경제협조처(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ECA)는 유럽의 경제부흥을 최우선 목표로 하면서도 그리스, 터키, 중국 등 내전 지역에 대한 군사원조와 구호원조의 성격을 갖는 국제아동긴급기금 등을 포괄했고, 이는 기본적으로 유럽을 대상으로 했던 ECA 원조가 중국을 거쳐 한국까지 확대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대한원조는 육군부가 주관했던 점령지역 구호원조의 성격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50~1951 회계연도(Fiscal Year, FY)의 ECA 대한원조 예산은 약 1억 2천만 달러 규모였는데, 이 중 구호와 부흥 원조의 비중은 여전히 2:1 정도로 구호원조 중심의 성격을 유지했다. 이는 이 시기 미국의 대한원조가 한국의 ‘산업화’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력 향상을 통한 무역수지 개선, 재정 균형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구호 중심의 미군정기 대한원조 프로그램은 6·25전쟁 시기까지 큰 틀에서 유지되었다.

3 6·25전쟁 발발과 미국 대외원조 및 대한원조의 성격 변화

6·25전쟁 발발은 서유럽 경제원조와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에 많은 자원을 투여했던 미국 대외원조의 전면적 재검토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격감했던 미국의 국방비 지출을 다시 증대시켰고, 1950 회계연도에 13억 달러였던 전체 군사원조 규모도 한국전쟁 이후인 1951 회계연도에는 52억 달러로 급증했다. 특히 전쟁 이전 대한 군사원조는 1950 회계연도에 1,023만 달러, 1951 회계연도에 1,000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6·25전쟁 발발과 함께 미 국방부의 정규 작전 예산에 통합되며 크게 증가했다. 미 국방부는 6·25전쟁기간 중 자신들이 사용한 비용을 “적어도 100억 달러”라고 추정하면서, 한국군에 할당된 군용 물자의 비용을 대략 29억 달러로 추산했다.

6·25전쟁을 계기로 미국 대외원조의 중점이 군사 활동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종래에 개별적으로 실시하던 원조를 통합 조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1년 5월 24일 트루먼 대통령은 기존의 대외원조 계획을 통합하는 85억 달러 규모의 상호안전보장계획(MSP)의 승인을 요청했다. 이는 63억 달러의 군사원조와 22억 달러의 경제원조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미 의회는 장기간의 논의를 거쳐 1951년 10월 10일 총액 74억 8,340만 달러 규모의 대외원조를 승인한 ‘미 공법 165호’인 ‘1951년 상호안전보장법(Mutual Security Act of 1951)’을 제정했다. 상호안전보장법 제정에 따라 경제협조처(ECA)가 폐지되고 상호안전보장본부(Mutual Security Administration, MSA)가 창설되었으며, 이는 국무부와의 권한 설정 변화에 따라 1953년 대외활동본부(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 FOA), 1955년 국제협조처(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ICA) 등으로 변화했다. 그럼에도 상호안전보장법은 1961년 대외원조법(Foreign Assistance Act, FAA)으로 변화할 때까지 대외원조의 군사적 지향성이라는 기조를 유지하는 법적 기반으로 작동했다.

이러한 미국 대외원조의 성격 변화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지만 실제 전쟁이 일어나고 있던 한국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현지 원조 운영주체의 변화가 미국 대한원조의 특수성을 더욱 강화했다. 미국 외교사절단장으로서 현지 미국 대사관의 대사가 대외원조의 총 책임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구조였다면, 한국에서는 전쟁 발발과 함께 전시 긴급 구호원조와 완제품(end-item) 중심의 직접 군사지원이 원조의 주종을 이루면서 미 합참 지휘 하의 미 극동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이를 책임지고 지휘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미 제8군 산하의 주한유엔민사원조사령부(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in Korea, UNCACK)가 전시 긴급 구호원조를 실행하게 되면서 유엔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과 같이 유엔 총회 결의에 따라 한국의 경제 재건을 위해 등장한 유엔 기구의 권한은 전쟁 기간 내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고, 정전협정 이후에도 미국 주도의 원조가 대한원조의 주종을 이루면서 상징적 역할만 하게 되었다.

4 한국의 원조 운영 구조 변화와 그 효과

한국전쟁 발발 이후 대외원조 수원국으로서 한국의 위상은 전쟁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에 따라 한국과 미국은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를 규정한 1948년 12월 10일의 한미원조협정을 개정하기 위한 회담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2년 4월 13일, 마이어(Clarence E. Meyer)를 수반으로 하는 12명의 특별경제사절단을 한국에 파견했고, 5월 24일, 대한민국과 통합사령부간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 이른바 ‘한미경제조정협정’이 체결되었다.

‘한미경제조정협정’은 합동경제위원회(Combined Economic Board, CEB)를 설치하고 유엔군 대여금 상환 문제에 관한 규정을 마련한 것을 핵심 내용으로 했다. 한국과 유엔군사령부 간에는 경제조정을 위한 합동경제위원회를 설치하되 “위원회는 대한민국 대표 1인과 유엔군사령관 대표(Representative of the Commander-in-Chief, Unites Nations Command, CINCREP) 1인으로 구성”하며 “대한민국과 유엔군사령부의 효과적인 경제 조정을 촉진”하는 것을 주요 기능으로 천명했다. 이 협정은 ‘한미경제조정협정’이라고 통칭하지만 정식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한미 간의 협정이 아니라 한국 정부와 유엔군사령부 사이에 이루어진 협정이었다. 또한 상호 합의한 합동경제위원회의 일반원칙에서 ‘사령특권’으로서 유엔군사령관의 광범위한 권한을 인정했다.

한 가지 더 지적해 둘 것은 대한원조에 대한 UNKRA와 UNCACK의 권한 문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엔과 미 군부 사이의 권한 문제가 ‘한미경제조정협정’을 통해 더욱 분명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엔의 대한원조를 “미국 지휘 하의 통합사령부”를 통해 제공할 것을 권고했던 1950년 7월 7일자 유엔 안보리 제84호 결의를 한국정부와의 협정을 통해 유엔군사령관의 ‘사령특권’으로서 재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휴전이 가까워지자 한국 정부는 향후의 군사, 경제 원조에 대한 미국 측의 확답을 듣기 위해 사절단 파견을 제의했고, 이는 이후 타스카(Henry Joseph Tasca) 사절단의 방한을 통한 한미 상호간의 의사 조정으로 현실화되었다. 1953년 4월 17일 한국에 도착한 타스카 사절단은 휴전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 방향을 고려하면서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켜야 한다는 목표와 한국의 경제적 현실 간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대한원조의 규모와 유형을 확정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953년 6월 15일 ‘한국경제 강화’라는 제목으로 완성된 보고서는 미국의 상호안전보장계획(MSP) 원조의 한국적 적용이라는 관점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독자적 개입이 가져올 정치적, 경제적 부담을 유엔 원조라는 집단적 대응 방식으로 분담시키면서, 동시에 UNKRA 사업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아 유엔 원조도 상호안전보장계획에 통합하여 진행함으로써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타스카 사절단의 건의와 이를 바탕으로 한 1953년 7월 17일자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NSC) 문서 156/1에 따라 NSC 소위원회는 대한 경제원조를 위한 새로운 조직적 틀을 구상했고, 한국 현지 원조집행기관으로서 유엔군사령부 관할 하에 경제조정관실(Office of the Economic Coordinator, OEC)을 설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1953년 8월 1일 상호안전보장본부(MSA)를 계승하여 등장한 워싱턴의 대외활동본부(FOA)는 합동경제위원회 유엔군사령관 대표(CINCREP)인 경제조정관을 통해 한국의 구호와 재건 프로그램 운영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처럼 대한원조 집행기구 문제는 휴전(休戰)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경제문제에 대한 제반 책임이 유엔군사령부에 집중되는 구조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원조의 운영에서 미 군부의 영향력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초대 경제조정관으로 임명된 타일러 우드(Clinton Tyler Wood)는 유엔군사령관을 대리하여 합동경제위원회(CEB)의 유엔군 대표로도 참여했다. 이제 미국의 대한원조는 유엔군을 대신해 한국의 방위를 책임져야 했던 대규모 한국군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는 한국에 대규모 미군을 유지하는 것보다 경제적으로도 훨씬 ‘저렴한’ 방법이었다.

경제조정관의 주요 임무는 유엔한국재건단(UNKRA)과 1953년 7월 1일 주한유엔민사원조사령부(UNCACK)를 이어받은 한국민사원조사령부(Korea Civil Assistance Command, KCAC)를 포함한 유엔과 미국의 모든 원조 기구 및 프로그램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경제조정관에게 UNKRA에 대한 공식적 통제권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우드는 1953년 5월 12일부로 UNKRA의 신임 단장에 임명된 콜터(John Breitling Coulter) 장군과 함께 효과적인 조정을 모색했다. 이러한 원조 구조는 한국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주한미대사를 권력의 핵심에서 효과적으로 배제시켰고 이 구조는 1959년까지 유지되었다. 1959년 7월이 되어서야 군부의 지속적인 반대를 극복하고 대사관 통제 하의 컨트리팀(country team)이 창설되었고 미 원조사절단(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USOM)이 경제조정관실(OEC)을 대체할 수 있었다.

이상의 원조경제체제를 바탕으로 한국의 군사력은 1955년 한미합의의사록 체결 당시에는 최대 72만 명, 1958년 11월 부록 B의 수정 이후에도 최대 63만 명 수준으로, 한국의 경제력을 뛰어넘는 과도한 수준에서 유지되었다. 이는 한정된 자원을 군부에 집중시켰고 군부의 영향력을 팽창시켜 5·16 군사정변과 이후 장기 군사 독재 시대의 배경으로 작동했다. 또한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된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와 주한미군 주둔은 한미 간의 정치적 협력과 갈등 관계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 벗어나기 힘든 수직적 위계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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