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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네바회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열리다

1954년

1954년 제네바회담 대표 이미지

제네바에서 열린 정치회담 당시 모습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1954년 제네바회담은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유엔군 측에서 한국과 참전 15개국(참전 16개국 중 남아공은 제외), 공산군 측에서 북한 및 소련·중국 등 총 19개국 외상들이 스위스 제네바 전 국제연맹회관에 모여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방안을 논의한 국제정치회담이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한국전쟁 정전협정 제4조 60항, 1953년 8월 28일 유엔총회 결의에 근거하여 개최되었다. 정전협정 정치회담의 두 가지 의제였던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통일방안과 외국군 철수 문제가 논의되었다.

2 정전협정의 정치회담 관련 규정과 제네바회담 개최

정전협정의 정치회담 관련 조항과 그에 대한 규정력을 갖는 조항은 제4조 60항과 제5조(부칙) 61항과 62항이다.

제4조 60항
쌍방은 각 해당국 정부에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및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
제5조(부칙) 61항 : 정전협정에 대한 수정과 증보는 반드시 적대 쌍방 사령관들의 상호 합의를 거쳐야 한다.
제5조(부칙) 62항 : 정전협정의 각 조항은 쌍방이 공동으로 접수하는 수정 및 증보 또는 쌍방의 정치적 수준에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당한 협정 중의 규정에 의하여 명확히 교체될 때까지는 계속 효력을 가진다.

궁극적으로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해 정치회담을 개최하도록 ‘건의’하며, 정전협정이 타 협정으로 교체될 때까지 계속 효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정이 정전협정문에 포함된 것은 양측이 회담에서 ‘군사적 정전’만을 다루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정전회담을 시작하기 전 미국과 소련은 막후에서 만나 정전회담에서 ‘군사 문제’만을 다루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막상 회담이 시작되자 양측은 어디까지가 군사 문제이고, 무엇이 정치적 문제인가를 두고 판단이 달랐다. 공산군 측은 외국군 철수 문제를 두고 이것이 정전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이자 군사 문제라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이는 정치문제로 정전 성립 이후 토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측은 논쟁을 피하려고 이 문제를 정전 이후 논의하기로 합의했고, 그 과정에서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대한 건의사항’으로 처리하였다. 다른 의제에 비해 협상 기간도 짧았고 타협도 쉽게 이뤄졌다. 하지만 논쟁을 정전 이후로 미룬 것일 뿐, 방점은 마지막 문구인 ‘건의’한다는 데 있었다. 타협은 쉬웠지만 그것이 정전 이후 정치회담의 전망을 더 어둡게 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유엔군사령부는 정전회담의 경위와 전망에 대한 특별보고서를 유엔총회에 제출했다. 1953년 8월 17일 유엔 임시총회에서는 한국정전협정을 승인했다. 이어서 열린 1953년 8월 28일 유엔총회에서는 정전협정 제4조 60항의 “실행”을 위한 정치회담 개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때 유엔이 설정한 목표는 “대의제 형태의 정부 하에서 통일·독립·민주적인 한국을 평화적 수단을 통해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회담을 개최하기 위한 준비 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다. 정전협정에서 합의한 정치회담 개최 시한 3개월을 하루 앞둔 1953년 10월 26일에야 판문점에서 정치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열렸다. 실무자급에서 정치회담을 준비하고 양측의 의견을 조율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판문점 예비회담은 당시 대립하고 있던 송환거부포로 처리 문제가 빌미가 되어 1953년 12월 12일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이에 소련과 중국, 북한은 유엔에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강구할 것을 촉구했다.

그 후 제네바회담 개최가 결정된 것은 1954년 1월 25일 베를린에서 소집된 독일과 오스트리아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미·영·불·소 4개국 외상회의였다. 여기서 4개국 외상은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 독립된 한국을 수립하는 것이 국제적 긴장 완화와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의 평화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요소임을 고려하여,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회의를 1954년 4월 26일 제네바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에 따라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제네바에서 정치회담이 개최되어 한국 문제가 토의되었고, 한국과 유엔 참전 15개국(참전 16개국 중 남아공은 제외), 북한과 중국·소련 등 총 19개국이 회담에 참가하였다.

3 제네바회담에서 제기된 다양한 통일방안과 쟁점

한국은 정치회담에 대한 기대치가 가장 낮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회담이 공산국가들의 재남침을 위한 군사력 증강의 시간만 줄 뿐이라고 지적하며, 참가를 결정하지 않았다. 이에 1953년 8월 5일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 국무장관이 방한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회담,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제 등을 논의한 결과, 한국은 정치회담에 참가하기로 동의하고,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약속하였다.

제네바회담 한국 대표 변영태(卞榮泰) 외무장관은 처음에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이므로 유엔 결의의 취지에 맞추어 북한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하고 비어 있는 국회 내 100석의 의석을 채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이를 수정하여 남북한이 동시에 총선거를 실시하며 선거는 대한민국 헌법 절차를 따르고 중국군은 선거실시일 1개월 전에 철수를 완료해야 한다는 등의 14개 항의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정치회담에 임하는 자세는 남과 북은 물론 미국과 중국, 그 외 참전국들마다 차이가 있었다. 교전 양측이 대립했던 정전회담과 달리 다자간 회의였던 이 회담에서 참가국 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할 여지가 있고, 유엔 참전국 내부에서 각국 대표들은 미리 조율되지 않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은 통일방안이나 외국군 철수 문제에서 한국 안과 미국 안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기보다는 공산군 측 제안과 조율할 수 있는 타협안이나 절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호주는 한국 문제의 최종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면 한국 정부가 ‘전(全) 한반도 선거’에 찬성하기를 희망한다고 발언했으며, 뉴질랜드도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북한과의 차이를 한국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필리핀은 남북 대표로 ‘헌법제정회의’를 만들어 통일방안을 연구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외국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도 호주와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은 총선거 이전에 중국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한국 입장을 외면하고 유엔군과 중국군 동시 철수 원칙으로 기울었다.

반면에 공산군 측은 유엔 참전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일한 주장을 내세웠다. 중국은 중립국 감시위원단이 남북한 총선거를 감시할 것을 제안했다. 북한 대표 남일(南日)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남측의 국회의원들, 그리고 민주주의적 사회단체 대표들을 포함하여 ‘전조선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기구가 주관하여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유엔을 배제하고 남북한이 대등한 비율로 연립하자는 방안이었다. 그리고 단시일 내에 외국 군대를 철거하고 1년 이내에 남북이 병력을 10만 명 이내로 감군하며, 평화체제로의 전환 문제와 해당 협정 체결을 논의하기 위해 남북 대표로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산군 측이 유엔의 역할과 지위 문제를 제기하면서 유엔의 권위 인정 여부가 첨예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중국은 한국에서 유엔의 역할은 불법적이라고 주장했으며, 북한은 유엔이 완전히 미국의 지배 아래 있고 교전국의 일방이기 때문에 한국문제에서 유엔이 공정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유엔 참전국 내부에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유엔군 측 주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어렵게 되고, 공산군 측이 유엔의 지위 문제를 적극 제기하자 미국은 서둘러 회담을 마무리했다. 1954년 6월 15일 유엔 참전국들은 유엔의 권한을 인정하고 한국의 통일방안을 지지하며 한국문제를 유엔총회로 이관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일방적으로 발표함으로써 회담은 종결되었다. 이후 유엔에서는 매년 한반도 문제를 다루고 필요할 경우 한국 관련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4 제네바회담의 의의와 평가

1954년 제네바회담은 전쟁 시기 판문점에서 열렸던 군사 정전회담의 한계를 넘어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향한 정치회담이었다. 당시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곧 한반도 통일문제로 인식되었고, 회담에서는 한반도 통일방안이 주로 논의되었다. 이 때문에 제네바회담은 전후 정전체제의 출발점이자 한반도 통일방안을 공식적으로 다룬 처음이자 마지막 국제회의로 평가된다. 그러나 회담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과제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정치회담에서 외국군 철수 문제가 논의되는 같은 시기에 한미동맹이 형성되어 한반도 정전체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북한은 정치회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군 주둔을 비판하면서 외국군 철수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미군 주둔의 근거를 마련하였고, 1957년까지 다른 유엔 참전국들이 순차적으로 철수를 마친 후에도 계속 남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중국군 역시 전후 병력 규모를 줄이기는 했지만, 1958년까지 북한에 잔류했다.

정치회담의 과정과 결과를 보면, 참가국들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실질적으로 타협하기보다는 회담장을 일종의 ‘선전장’으로 활용한 측면이 강했다. 양측 모두 타협을 통한 한국 문제 해결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회의 개최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회담이 개최된 이유는 회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회담은 명목상의 개최 목적인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의미 있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장이라기보다는 이미 결정된 분단을 정착시키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한반도 문제는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유엔으로 이관되었고, 한반도 정전체제는 팽팽한 군사적 대치와 긴장관계인 분단구조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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