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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석유파동

2차례 경제 위기와 경제개발 전략의 수정

미상

1970년대 석유파동 대표 이미지

에너지 10%절약 궐기대회(1977)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국가기록원)

1 개요

1973∼1974년 제4차 중동 전쟁 시기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 정책과 1978∼1980년의 이란 혁명으로 인한 석유 공급의 부족으로 국제 석유 가격이 급등하여 전 세계가 경제적 위기와 혼란을 겪은 사건이다. 각각 제1차 석유파동, 제2차 석유파동으로 칭하며 자원파동, 오일쇼크라고도 부른다. 두 차례의 석유파동 모두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불황 국면은 세계경제의 회복과 중동 붐 등으로 경기 상승으로 전환되었으나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장기 침체로 이어졌다.

2 제1차 석유파동과 경제 불황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는 세계의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서방 국가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인 원조를 공여했고 이는 아랍 국가들의 단결로 이어졌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를 만들어 여기에 가입한 국가들이 석유를 무기화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석유의 가격을 70% 인상했고, 그 해 12월 23일에 다시 석유의 가격을 128%나 인상했다. 그 결과 채 1년이 안 되어 원유가가 4배나 뛰어올랐고, 이러한 원유가의 폭등으로 완만하던 세계 시장의 물가들이 상승하였다.

이러한 석유파동에 대한 한국정부는 1973년 1월 선언한 중화학공업화 기조를 유지하면서 “경제자립기반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적정성장과 경제안정을 통하여 중장기 개발과제를 효율적으로 성취하는데 중점이 두어졌다. “주요 자원재를 수입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빈약성을” 극복하여 자립경제체제를 구축하고 그 위에서 “수출증대를 통한 적정 성장”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세계적 인플레이션에 의한 부담이 공평하게 지워지도록” 물가, 조세, 임금, 금리 및 소득정책을 조정하고 “범국민적 소비절약의 풍토를 조성하고 저축을 극대화시켜야” 하고자 하였다. 또한 경제자립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우선 주식인 쌀과 보리만이라도 최단시일 내 자급”을 이룩하고 “중간재의 자급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중화학공업의 추진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마지막으로 서민 생활의 안정에 역점을 두고 “같이 고생하여 난국을 타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단기 조정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물가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동시에 내자동원의 극대화, 대외 경제 협력 확대 등에 주력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에너지 절약정책을 전개하였다. 구급차, 취재차, 외국인차를 제외한 8기통 이상의 고급 승용차의 운행을 금지했고, 승용차의 공휴일 운행도 전면 금지했다. 초·중·고등학교는 긴 겨울방학에 들어갔고 보일러 가동을 단축한 공공건물과 병원 등에서는 석유나 연탄난로를 설치했다. 이외에도 석유 소비를 줄이려는 여러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3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의 시행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14일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긴급조치 3호)를 발표하였다. 그 취지는 “국제 인플레이션 현상이 앙진함에 따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하여 정부, 기업, 소비자의 공동노력을 조직화하고 저소득층의 부담경감과 국민생활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강력한 소비절약을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요 내용으로는 ‘근로소득세, 사업소득세, 주민세의 1년간 면제 또는 대폭 경감’, ‘국민복지연금 및 사립학교교원연금제도 시행의 1년 연기’, ‘영세민의 취업기회를 위한 긴급 취로 대책비 1백억 원의 확보’, “재산세 면세점의 인상과 고소득층에 대한 중과세” 등이 있었다.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불황은 ‘격차’ 문제를 부각시켰고 사회복지와 사회개발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석유파동 이후 고도성장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고도성장의 부작용 해소를 위해 사회개발과 복지증진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갔다. 이에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기준 연도인 1976년의 예산안에 대해서 여전히 사회개발 및 복지예산의 비중이 낮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대한상공회의소는 경제개발의 결과 격차가 심화되어 사회적 불균형이 확대되었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분배 국민경제의 구성에서 피고용자의 보수가 1962년 36.6%에서 1974년에는 36.8%로 크게 변화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경제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노동자 몫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이외에도 대한상공회의소는 농가와 비농가의 격차 및 지역 간 격차 등을 문제로 제시하였다.

4 세계 경제의 조기 회복과 국내 경기 과열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유발된 세계 경제의 불황은 1975년 하반기부터 미국, 일본, 유럽 각 국가들의 경제가 호전되면서 상승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1975년의 세계경제는 매우 완만하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3/4분기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의 수출도 기대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수출 증가세에 따라 산업 활동이 호조를 나타냈다. 또한 농업 생산 면에서도 풍작을 이루어 국내 경제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제는 다시 고도 성장의 궤도로 다시 진입한 것으로 보였다. 이와 같은 국내 경기의 상승세는 지속된 수출 증가와 함께 중동건설 붐을 타고 해외 건설이 증가하면서 1978년까지 이어졌다. 경제기획원은 이 기간 동안에 “우리의 경제개발과정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최저 실업상태를 시현하는 등 호경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가가 상승하는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수출 증가와 해외 건설 급증 등과 같은 해외 수요와 주택, 중화학공업 등에 대한 투자 수요 확대, 그리고 실질소득 향상에 따른 소비 수요 증대 등 국내요인이 겹쳤고 또한 통화 관리 면에서 이에 대한 대응책이 미비하여 총수요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공급 능력은 따라가지 못하여 초과 수요에 의한 인플레이션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인플레이션은 1977~1978년에 정점이었고 부동산 등에 대한 실물 투기가 확산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 시설 투자가 획기적으로 증대되었는데 그 투자가 중화학공업에 집중되면서 중화학공업에 투자가 편중되었고 이에 따라 산업간 불균형이라는 구조적인 면에서의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5 제2차 석유파동과 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의 시행

제l차 석유파동으로 OPEC는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했지만 실질 원유가격을 올리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1978년 12월 OPEC 회의는 1976년 배럴당 12.70달러에서 단계적으로 14.5% 인상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12월 말 이란은 국내의 정치 ·경제의 혼란을 이유로 석유 생산을 대폭 감축하고 수출을 중단했다. 그 결과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배럴당 10달러 선을 조금 넘어섰던 원유가격은 불과 6년 사이 20달러 선을 돌파하였고, 현물시장에서는 배럴당 40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제2차 석유파동이었다.

제2차 석유파동은 제1차 때와 마찬가지로 세계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1978년의 4.0%에서 1979년에는 2.9%로 낮아졌다. 물가 면에서는 선진국의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0.3%를 기록하였으며, 개발도상국의 경우 32.0%의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OECD 평균 실질성장률은 1978년 4.6%에서 3.2%로 저하되었고 인플레이션도 소비자 물가상승률로 볼 때 1968년 10.2%에서 1979년 13.2%로 높아졌다.

이렇게 되자 각국 정부는 인플레이션 수습을 위한 금융긴축을 강화하고 그 정책수단으로 고금리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국제금리도 상승세를 지속하였다. 이와 함께 선진국의 보호주의가 더욱 강화되었다. 1977~78년 2년간 좁아졌던 석유 수출국과 석유 수입국 사이의 경상 수지 격차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선진 각국이 수출 촉진책을 채택하고 수입규제조치를 강화하는 등 국제 수지 방어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면서 선진국 간에는 무역 마찰이 심화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에 대한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의 무역 환경은 매우 악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산유 개발도상국의 경우 대외 채무가 크게 증대되어 국제 금융 시장에서는 개도국에 대해 신용공여조건이 점차 경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와 같이 1979년 중 세계경제는 석유 가격의 급등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심화되어 국제교역 환경이 크게 악화되었다. 특히 비산유 개도국의 경우 선진국의 보호주의가 강화되면서 수출 부진과 함께 대외 채무 부담의 증대라는 악재를 맞게 되었다. 또한 석유 가격의 급격한 상승은 국제 통화 금융 시장을 교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1차 산품 시장에서도 영향을 미쳐 가격이 크게 상승하였다.

제2차 석유파동은 1차 때와 달리 한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9년 경제성장률은 상반기까지는 10%이상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으나 하반기부터 국내외 수요가 모두 급속히 둔화되어 6.4%로 낮아졌다. 그러한 석유 가격 등 원자재 가격의 상승과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 등이 요인이 되어 인플레이션의 압력이 상승하였다. 1979년 4월 17일 정부는 긴축조치를 골자로 하는 ‘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을 발표하였다. 이 시책에는 수출지원의 축소, 중화학 투자의 조정, 농촌주택개량사업의 축소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붕괴한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 때까지 한국경제는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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