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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

대한민국 경제의 중추를 형성하다

1973년

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 대표 이미지

포항 제철소의 제1고로

포스코

1 개요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중화학공업 정책 육성을 선언했다.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 육성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라고 밝혔다. 이후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별도의 전담기구를 대통령 직속으로 두고, 정책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중화학공업은 산업부문간 상호의존성이 높고, 막대한 기술 인력과 고도의 장치가 필요한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수출 공업을 통한 경제개발이 지상목표였던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는 수출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수출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은 1970년 12.8%에서 1980년 41.5%로 급증하였다.

2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한 꿈과 좌절

‘철은 산업의 쌀’이라고도 불린다. 공업은 산업혁명 이후 농업, 임업, 수산업에 비해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냈고, 전쟁으로 점철되었던 20세기 인류 역사에서 ‘철의 생산력’은 부강한 국가의 척도였다. 이승만 정부는 전후복구 및 경제부흥계획을 세우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을 공업화하고 한국을 농업 생산지로 연결하는 수직적·차별적인 동아시아 지역통합의 냉전전략을 취했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중화학공업화를 승인하지 않았다. 1950년대 미국 원조로 지탱되었던 한국의 경제 상황에서 미국의 반대는 중화학공업화의 중단을 의미했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부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며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기반 구축’을 기본 목표로 삼았다. ‘자립경제’의 구상 속에서 발전 산업 외에도 비료, 정유, 시멘트, 종합제철소, 종합기계, 조선소, 자동차 등 중화학 전분야에 걸친 공장건설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화는 막대한 투자를 필요로 했고, 군정은 통화개혁 및 일반은행 국유화를 단행했지만 부족한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결국 5개년계획이 수정되며 공업 투자액이 감소했고, 정유공장과 비료공장 건설을 제외한 중화학분야 공장 건설계획은 백지화되었다.

1965년 수출진흥종합시책이 본격화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방미(訪美) 길에 대한국제제철차관단(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을 만들었고, 장기영 경제기획원장 겸 부총리에게 종합제철소 건설 추진을 맡겼다. 1967년 경제기획원과 KISA는 종합제철공장 건설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자금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국제부흥개발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으로부터 차관을 받고자 했지만 은행은 지속적으로 한국 종합제철 사업에 부정적인 의견을 제출했다. 결국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 대일청구권 자금이 국내로 유입되면서 포항종합제철 건설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3 1960년대 안보위기와 종합제철소 건립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는 일명 1․21사건이 발생했다. 북한 무장군인들은 세검정 일대에서 모두 사살되거나 체포되었지만 안보위기는 커져갔다.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미 해군 소속 푸에블로호가 동해 공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되는 이른바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이 북한에 사과한 뒤에야 승무원 송환이 이뤄졌다. 1969년 7월 닉슨(Richard Milhous Nixon) 미 대통령은 괌에서 ‘핵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1차적 방위책임을 져야한다’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아시아에서 미군의 개입 축소를 의미했기에 박정희 정부에 안보위기로 다가왔다.

이러한 1960년대 후반 격화하는 국내외의 안보위기 속에서 중화학공업화, 특히 철의 생산은 경제의 문제를 넘어 국방의 문제로 이해되었다. 1969년 8월 김학렬 경제기획원장은 일본 정부와 포항종합제철 건립협력각서에 서명을 했고, 1970년 4월 포항종합제철 공장 착공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철강공업이라는 것은 우리의 공업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분야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기계공업 육성이라든지 또는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조선공업, 자동차공업 또는 여러가지 건설업에 있어서 철강공업이라는 것은 가장 근간이 되는 기간산업이 되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앞으로 우리 국방상에 있어서 군수산업을 육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 철강공업이란 것을 우선적으로 개발을 해야 됩니다.

1971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상공부 차관보를 경제2수석에 임명하여 방위산업 육성임무를 맡겼다. 12월에는 야당의 반대에도 일방적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대통령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경제 동원령을 내릴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박정희 정부가 말하는 안보위기는 국방 위기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북한을 이기기 위한 경제적 동원, 정신적 단결, 사회적 국민총화를 의미했다. 중화학공업화 추진에 핵심 인물이었던 오원철은 ‘국가전략사업은 1971년 방위산업, 1973년 중화학공업육성이었다’고 회고했다. 1973년 7월 포항종합제철 1기 설비가 완성되었다. 드디어 이승만 정부 이래 꿈꾸었던 종합제철 설비가 안보위기의 바람을 타고 완성되었다.

4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고 지원정책을 마련하다

1972년 10월 수립된 유신체제는 대통령에게 무제한적인 권력과 자원을 집중시켰다.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에게 중화학공업화 계획 초안을 보고 받았다. 이를 정리하고 보완하여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했다. 유신체제 하에서 경제개발계획, 특히 중화학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핵심 조직은 경제기획원이 아니었다. 상공부 관료, 테크노크라트로 구성된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위원회와 기획단은 국무총리 산하 기관으로 1973년 5월 공식 설치되었지만 기획단은 그 이전부터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하여 중화학공업화 정책 수립을 준비했다. 위원회는 1974년 8월 이후로 개최되지 않았고, 대신 산하 조직이었던 기획단이 사실상 위원회와 동일한 위상으로 활동하였다. 기획단장으로 김용환(1973.5.14.~1974.2.25.)과 오원철(1974.2.26.~1979.12.)이 임명되었다. 기획단은 중화학공업을 위한 재원동원 계획부터 입지, 에너지, 인력, 연구개발까지 모두 아우르는 역할을 수행했다. 위원회는 대통령의 의지를 구체화하여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하고, 6대 전략 분야로서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 등을 설정했다. 1981년까지 전체 공업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을 51%까지 늘린다는 청사진을 그렸다.

중화학공업 육성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정부는 1973년 12월 ‘국민투자기금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중화학공업 등 중요산업의 건설을 촉진하고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국민의 광범한 저축과 참여를 바탕으로 필요한 투융자 자금을 조달·공급하고자 국민투자기금을 설치’한다고 목적을 밝혔다. 국민투자채권, 정부 전입금 등을 재원으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1조 5,652억 원을 조성했고, 전체 대출자금 1조 4,385억 원 가운데 61%를 중화학공업에 지원했다.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78년에는 국민투자기금의 62.7%가 중화학공업화에 투여되었다. 해외에서 들여온 자금, 즉 차관도 중화학공업에 집중되었다. 1980년 해외 차관 가운데 무려 89.3%가 중화학공업에 투여되었다.

이처럼 정책자금은 마련되었지만 중화학공업화의 본격적인 성공에는 시간이 더 걸렸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이 발생하며 국내 경제가 위기에 처했다. 같은 해 박정희 대통령이 창원기계공업단지 건설의 조속한 시행을 지시하자 건설계획이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건설부지의 주민 이주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경기 불황으로 기계공업단지에 입주할 기업은 부족하였다. 결국 상공부는 1975년이 되어서야 창원기계공업단지의 건설을 고시할 수 있었다. 1976년 52개 기업을 시작으로 1978년 122개 기업까지 입주를 하였다. 1977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하나의 역점사업은 기계공업의 육성이다. 4차 5개년 계획기간 중에 기계공업을 하나의 핵심 산업으로 특별히 힘을 기울여 육성하려고 한다. 이 분야가 빨리 육성되어야만 공업구조가 빨리 고도화되고 선진국을 따라갈 수 있다.

중화학공업화는 제1차 석유파동을 극복하고 한국경제가 급성장했던 1970년대 중반에야 본격적으로 성과를 보였다. 1976~78년 연간 경제성장률이 10%를 넘겼고,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성취했다. 이는 목표치에서 4년이나 앞당겨진 것이었다. 수출 성과는 기계공업을 제외하고 모든 분야에서 초과목표를 달성한 중화학공업의 높은 기여도에 있었다. 1971년 국민총생산에서 21.5%에 불과하던 중화학공업의 비중은 1976년 35%까지 증가했다.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며 정부의 중점 지원을 받았던 기업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자동차 산업은 1960년대까지 외국 부품을 수입하여 단순 조립하였지만 1974년 기아산업이 1,000cc 승용차 ‘브리사’를 생산했다. 현대는 같은 해에 포니자동차를 개발하여 1976년부터 본격 생산하였다. 한국 정부는 조선업을 육성하기 위해 한국에 원유를 공급하던 미국 걸프사(GULF社) 소형 유조선 12척을 대한조선공사에 건조하도록 했다. 현대는 5천만 달러 차관을 얻어 울산에 조선소를 건립하고 초대형 유조선을 건조하였다.

5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의 명암(明暗)

정부의 집중적인 중화학공업 지원 정책은 단기간 급속도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성공했고, 실제로 1970년대 중반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2020년 국내총생산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2.2%로, 제조업 전체 비중이 27.2%였던 것을 감안하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는 여러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세계경제에서 중화학 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감하였다. 중화학공업의 과잉투자 및 과당경쟁 문제가 발생하며, 한국 경제는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새로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는 자동차, 발전 산업의 신규 진입을 금지했고, 기존 업체의 사업 부문 정리를 강제했다.

중화학공업에 집중된 투자는 다른 분야의 불균형을 야기하기도 했다. 1970년대 정책금융이 중화학공업에 투자되며 경공업은 생산 부족 현상을 겪었고, 농촌사회는 점차 붕괴했다. 공업 분야의 고강도 노동도 증가했다. 단순생산직 노동자 월평균 근로시간은 1975년 217시간에서 1980년 223시간으로 증가했다. 임금구조의 이중화 문제, 즉 학력별, 직종별, 기업별, 성별 등에 따른 임금 격차가 심화되며 양극화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었다. 한편, 현대, 삼성, 럭키금성, 선경, 쌍용, 한진 등 재벌기업은 정부의 도움으로 독과점 지위를 누리며 정경유착을 발생시켰다. 정부 용인 하에 재벌은 모회사에서 자회사로 순환 출자하는 구조를 고착화하여 적은 자금으로 전계열사를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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