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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언론 통폐합

권력 장악을 위한 신군부의 언론 탄압

1980년

1 개요

1980년 언론 통폐합 사건은 신군부 세력이 언론을 통제하고 장악하기 위해 자행한 일련의 공작을 가리킨다. 이른바 ‘K-공작계획’으로도 알려져 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유고 후 12·12사태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언론을 통제해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1980년 초 보안사령부 정보처에 이상재를 반장으로 하는 언론대책반을 신설해 신문·방송·통신 주요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이에 저항하는 비판적 언론인을 대거 강제 해직시켰다. 2009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가(신군부)가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해 헌법상 언론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을 침해한 것에 대한 책임 인정과 관련 피해자 및 국민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2 10·26과 12·12

1979년 10월 26일, 청와대 인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측근들과 함께 만찬을 즐기던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의 권력 다툼 및 부마항쟁 대처방안을 둘러싼 갈등이 직접적인 동인이었다. 그렇지만 계엄령과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을 동원해야 할 만큼 부산과 마산 지역의 시위 양상이 격렬했던 데서 알 수 있듯, 일련의 긴급조치로도 미처 다 억누를 수 없었던 유신체제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반감과 민주화 열망,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과 중화학공업 과잉 중복투자 등으로 인한 일련의 경제 혼란과 침체, 그에 대한 위기의식이 10·26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다만 10·26이 곧 유신체제의 종결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최상위 권력층을 무너뜨렸을 뿐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출된 최규하가 대선을 조기에 실시하겠다고 하면서도 개헌 문제는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는 가운데 12월 12일,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 전두환과 9사단장 노태우,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등 군부 일부가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고 요직을 장악하는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소위 신군부의 등장이었다.

3 ‘서울의 봄’과 신군부의 쿠데타 준비, ‘K-공작계획’

12·12를 주도한 신군부의 주요 세력은 4년제 정규육사 1기라 일컫는 육사 11기 영남 출신 사관생도들로 구성된 오성회라는 군 내 사조직에서 출발해 1970년대 초 선후배 장교 200~300여 명을 아우르는 거대 모임 하나회에서 발원했다. 하나회는 특히 이들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육성하고자 했던 박정희의 후원 아래 특전사·수경사·보안사·대통령경호실 등 군 핵심기구의 요직을 독차지하며 일종의 군부 내 특권 집단으로 기능했다. 이들이 12·12를 일으킨 것은 정승화 등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지하는 온건파 체제에서 그들이 기존 특권을 상실하고 권력에서 배제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단 12·12의 성공으로 그들이 군 권력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 나아가 박정희 장기집권체제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민주주의 이행 소망을 무턱대고 거스르긴 어려웠다. 해가 바뀐 1980년의 봄은 정치권은 물론 학생·노동자 등 각계각층이 저마다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말 그대로의 ‘봄날’이었다. 정치권에서는 정부를 비롯해 공화당, 야당, 재야세력 등이 각각 개헌 문제를 논의했고, 학원가에서는 학원자율화운동(또는 학원민주운동)이, 노동자들은 사북항쟁을 비롯해 대대적인 노동쟁의를 벌였다.

이 같은 ‘서울의 봄’ 기간 중 신군부는 권력야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비밀리에 일련의 쿠데타 준비에 매진했다. 1980년 2월경부터 주요 부대에서 폭동진압훈련인 ‘충정훈련’에 몰두한 것이 대표적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K-공작계획’이었다.

‘K-공작계획’은 신군부가 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1980년 3월에 등장한 언론통제 계획이었다. 신군부는 집권을 위한 일차적 공작대상으로 언론을 지목하고 1980년 2월부터 보안사에 정보처를 부활시켜 민간정보를 수집했다. 이어 ‘K-공작계획’에 따라 7대 중앙일간지, 5대 방송사, 2대 통신사의 사장 이하 주요 간부들을 일차적 포섭대상으로 삼고 이들에 대한 회유 공작을 실시했다. 또 언론인·언론기관에 대한 동정을 파악하는 한편 언론인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 등을 계획했다. 언론을 통제해 사회적 혼란을 부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군부 집권의 명분과 정당성을 얻고자 한 것이 언론공작의 목적이었다. 7월 말, 창작과비평 등 172종의 정기간행물이 등록 취소된 것도 이 같은 언론 통제 또는 ‘정화’계획의 일환이었다.

4 언론계의 저항

12·12 이후 신군부는 계엄 상황을 이유로 언론보도를 검열했다. 북한의 도전 봉쇄와 국가 보위, 국민생활 안정, 국민 총화로 조국근대화 발전 등 보도방침과 더 구체적인 검열기준을 적용했다. 언론인들은 언론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주로 사(社)별로 제작을 거부하거나 언론검열 철폐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검열에 저항했다. 또 동아일보, 동양통신, 한국일보 등에서는 언론자유 결의문을 채택했고, 5월 20일 기자협회는 검열 거부를 결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제작거부 투쟁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 더욱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5 언론인 해직과 언론 통폐합

신군부는 보안사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를 통해 1980년 5월, 언론 통폐합에 대한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이어 통폐합의 사전정지작업으로 보도검열 비협조자 등 약 300명 이상의 해직대상자 명단을 만들었다. 이 명단은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과 이광표 문교부장관을 거쳐 7월 말 각 언론사에 통보되었다. 언론사가 대상자들에게 사직을 종용하는 과정에서 해직자가 대폭 늘어나 10월 말까지 약 900명 이상의 언론인이 해직되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해직 사유·사례는 다양했다. 국시를 부정하거나 반정부 행위를 했다는 사유를 비롯해 제작거부에 참여했다는 것이 해직 사유가 되었다. 또 지방 주재 기자제도를 폐지하면서 해직된 경우도 있었고, 해직 인원을 할당받은 언론사가 무능·장기근무·고령 등을 이유로 자체적으로 해직시킨 인원도 적지 않았다. 특히 일부 언론인은 직장에서 해직된 데 그치지 않고 추가적인 피해를 입기도 했다. 가장 광범위한 경우는 취업 제한이었고, 그 외에 예컨대 충주문화방송 사장 등 30여 명은 재직 중 또는 해직된 후 삼청교육대에 입소해 순화교육을 받아야 했다. 경찰서 또는 합수본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가혹행위를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1월에는 언론 통폐합이 단행되었다. 통폐합은 허문도 등이 중심이 된 「언론창달계획」에 의한 것이었지만 언론사들의 자발적 의지에 따른 것으로 보이기 위해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각각 언론의 자율정화를 결의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따라 공영·민영 방송구조는 공영방송체제로, 지방지는 10개로 통합 개편되었다. 기존 신문 28사, 방송 29사, 통신 7사가 각각 14사, 3사, 1사, 총 18사로 대폭 통폐합되었다(1980.11, 언론 통폐합에 따른 언론기관의 통합·흡수·조정).

신군부는 방송을 공영화하고 재벌이 운영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을 통폐합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내부 문건들에 따르면 계엄 해제 이후의 상황에 대비해 신군부에 우호적 성향의 언론은 육성하고 반대로 야당 성향 또는 특정 정치인과 관련 있다고 판단되는 언론은 우호적 언론사로 통폐합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통폐합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신군부는 언론사 사주의 동향 및 약점 등을 조사해 협박했고, 보안사는 물론 중앙정보부·국세청·경찰·감사원 등 다양한 권력기관을 동원해 주식의 헌납 또는 경영권 포기 등을 유도했다. 거부 시 수사 등을 거쳐 법적으로 처리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실제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언론인도 있었기 때문에 언론사로서는 사실상 대처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더욱이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통폐합되는 언론사들은 적절한 감정평가에 따른 정당한 재산상의 보상조치를 받지 못한 경우가 보통이었다.

6 언론기본법(1980.12)의 제정

1980년 연말에 제정된 「언론기본법」(1980.12.31, 법률 제3347호)은 이 해 신군부가 추진한 일련의 언론공작의 마침표 역할을 했다.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1980.11.5, 법률 제3261호)과 함께 신군부의 대표적 악법으로 꼽히는 이 법은 언론의 공적 책임(제3조)과 주의의무(제9조)를 강조하고, 특히 공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반복하여 현저하게 위배한 때”) 정기간행물은 정부가 등록을 취소하거나 발행을 정지할 수 있도록 했다. 민주적 여론형성에 기여, 타인의 명예와 권리 또는 공중도덕·사회윤리 존중, 폭력 등 공공질서를 문란케 하는 위법행위에 대한 고무·찬양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적 책임은 기실 권력의 자의적인 언론 통제를 가능케 하는 법적 근거에 다름 아니었다.

신군부는 이 같은 언론 공작을 바탕으로 1980년대 ‘보도지침’ 등 입맛에 맞는 언론 통제를 일상적으로 자행했다. 이에 따라 한동안 사회 각 분야의 언로(言路)는 답답한 상태를 면치 못했다. 이러한 언론 통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시민언론운동의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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