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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대통령은 우리 손으로 뽑는다

1987년

1987년 6월 항쟁 대표 이미지

서울시청 앞에서 진행된 고 이한열의 노제

동아일보

1 개요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대시위는 격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전두환 대통령이 기존의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저항은 더욱 커져갔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여러 단체가 함께하여 결성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국민대회를 예고하였는데, 하루 전날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지면서 항쟁의 불길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6·10국민대회는 전국적이면서도 조직적인 시위로 전개되었고, 시위는 6월 내내 이어졌다. 결국 거센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였다. 일시적이거나 특정 지역에서만 시위가 전개된 것이 아니라, 6월 내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던 이 국민적 저항을 1987년 6월 항쟁이라고 부른다.

2 간선제 유지냐, 직선제 개헌이냐

1987년 6월 항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헌과 관련한 논의 및 민주화운동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2년 공포된 유신헌법은 대통령 선출 방식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뽑는 간선제로 바꾸었다. 1980년 10월에 헌법이 개정되기는 하였지만, 5,000명 이상으로 구성되는 대통령선거인단의 투표로 선출하는 간선제 방식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7년 단임제를 헌법으로 규정하였기에 1981년 2월 대통령에 선출된 전두환의 임기는 1988년 2월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이에 기존의 헌법에 따라 선거인단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느냐,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여 전국민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느냐의 갈림길에 놓인 시기가 1987년이다.

1985년 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제1야당이 된 신한민주당(신민당)은 총선 1주년을 맞이하는 1986년 2월 12일 1,000만 명 개헌서명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불이 붙은 개헌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4월 30일 전두환 대통령은 여야가 개헌에 합의하고 건의한다면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주장하는 내각제 개헌과 김영삼·김대중이 요구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타협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재야민주세력과 학생세력 등의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가운데, 신민당 이민우 총재가 12월 24일 내각제 개헌에 대한 협상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발표하면서 개헌 논의는 더욱 혼란한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3 박종철 고문사망사건으로 촉발된 전국적인 시위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극적으로 전환시키며 민주화운동을 폭발시킨 사건이 바로 ‘박종철 고문사망사건’이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던 박종철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은 이튿날 『중앙일보』 기자가 우연히 한 학생이 경찰에서 조사받다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회면 기사로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검찰과 경찰 관계자들은 사건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치며 추궁하자 ‘억’하며 쓰러졌다’고 발표하며 고문으로 인한 사망이 아니라 쇼크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사건의 사실을 숨김없이 밝힐 것을 요구하며 박종철 사망에 대한 상세보도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외부인으로서는 처음 박종철의 시신을 본 의사 오연상의 검안소견서가 17일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쇼크사가 아니라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시사하고 있었다. 더 이상 쇼크사로 위장할 수 없게 되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19일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1월 20일 전두환 대통령은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을 경질하였다. 이는 사건의 여파가 정권을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박종철 사망에 대한 항의시위는 『중앙일보』 보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1월 17일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고문공대위)에서는 박종철 고문사망사건과 관련하여 고문폭로대회를 갖기로 했다. 이 대회가 당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박종철 고문사망사건과 관련하여 야당과 재야세력이 고문공대위를 중심으로 공동투쟁을 전개하고, 여기에 학생들이 가담한 것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세력들의 연합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종교계 또한 박종철 고문사망사건에 많은 관심을 보였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여러 세력들이 모여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2월 7일을 박종철 국민추도일로 선포하였다. 이날 오후 2시에 명동성당에서 추도회를 개최함과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 추도식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대규모 경찰 병력이 동원되어 이를 막으려 하였지만 시위는 서울시내 곳곳에서, 그리고 지방 여러 곳에서도 일어났다. 이날 시위는 단순히 민주화운동을 활발히 벌여나가던 사람들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형태의 시위였다.

준비위원회는 2월 9일부터 박종철의 49재가 있는 3월 3일까지를 ‘고문추방 및 민주화를 위한 국민결의기간’으로 정하고, 3월 3일에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2·7추도대회와 3·3평화대행진 사이에도 추도집회와 시위는 계속되었다. 3월 3일에도 전국에 많은 경찰 병력이 배치되었고, 도심의 5층 이상 건물의 옥상은 봉쇄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펼쳐졌으며, 교도소에서는 양심수들이 호응투쟁을 벌여 단식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4 뜨겁게 타오르는 저항의 불길

김영삼과 김대중은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4월 8일 신당 창당을 선언했고, 4월 13일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를 개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가 열린 4월 13일에 맞춰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특별담화는 본인의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기존의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으로서 이 특별담화의 발표를 ‘4·13호헌조치’라고 부른다. 4·13호헌조치는 개헌을 바라고 있던 사람들의 열망에 완벽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호헌발표 당일부터 4·13호헌조치에 대한 반대투쟁이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4·13호헌조치는 박종철 고문사망사건으로 인하여 타오르고 있던 저항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1987년 5월 18일은 5·18추모집회와 시위가 대규모로 전개되었던 날이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이날 오후 6시 30분, 명동성당에서 ‘광주민중항쟁 제7주기 미사’가 열렸다. 제2부 행사가 시작되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대표하여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사망사건의 진실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원고를 읽었다. 박종철을 고문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진짜 범인들은 현재 경찰 신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 등이 사건은폐 및 범인조작에 개입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정권 차원의 적극적인 사건은폐 및 축소 시도가 밝혀지면서 반정부 투쟁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5월 27일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국본은 4·13호헌조치는 건국정신과 민주화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각종 악법의 민주적 개정과 무효화를 위한 범국민적 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국본은 5·18 등 각종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민주인사 석방 및 복권 실현을 위해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국본은 단순히 헌법만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전반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국본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고 여러 부문의 인사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향후 6월 항쟁이 전국적이면서도 조직적인 항쟁으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5 6월 항쟁의 전개와 직선제 쟁취

국본은 6월 10일 전국적인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계획하였다. 오전 10시 이후 각 부문별, 단체별로 고문살인 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한 후, 오후 6시를 기하여 성공회대성당에 집결하여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6월 8일에 6·10국민대회는 불법이므로 원천 봉쇄하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고, 경찰을 투입하여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이런 와중에 또 한 명의 학생이 공권력에 의해 희생되면서 거센 저항을 만들어냈다. 6·10국민대회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는 ‘구출학우 환영 및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총궐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궐기대회가 끝난 뒤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 나섰고, 이를 막고자 하는 경찰과의 공방이 벌어졌다. 오후 5시 경, 학생 50여 명이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가 경찰의 최루탄에 쫓겨 학교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는 순간, 최루탄이 직격으로 날아들면서 경영학과 2학년인 이한열의 뒷머리를 강타했다. 이한열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이 사건은 학생과 시민들이 ‘독재타도’를 외치며 격렬히 저항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6월 10일 오후 1시경부터는 서울시내 여러 곳에서 가두시위가 벌어졌으며, 6시 성공회대성당의 종소리가 울리자 도로 위의 차량들은 경적을 울리며 호응했고, 시민들이 박수를 치면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날 서울시내에서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이 6·10국민대회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22개 도시가 같은 시간에 동일한 행동방침으로 시위를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6·10국민대회는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 경찰 병력으로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6·10국민대회가 6월 항쟁으로 발전하기까지 6월 10일부터 15일까지 이어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큰 역할을 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경찰에 쫓긴 시위대와 명동성당 앞마당에서 천막생활을 하던 상계동 철거민 등이 농성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사전에 계획되어 있지 않은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농성에 대한 여러 의견이 충돌하는 가운데서도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농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계속되자 이를 지원이라도 하듯이 전국적인 시위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6월 18일에는 국본의 결정대로 ‘최루탄 추방대회’가 전국 16개 도시, 247개소에서 진행되었다. 최루탄 문제는 시위가 있을 때마다 제기되었는데,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중태에 빠지면서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 시점에 이르자 국본도 전국적인 시위를 통제하기 힘들 정도였다. 시위는 사그라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국본에서는 6월 26일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을 실시하기로 했고, 6·26국민평화대행진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전국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전두환 정권도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6월 29일 오전 민정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노태우 대표는 민주화 일정을 발표하였다. ‘6·29선언’이라 불리는 이 선언에서 첫째로 밝힌 것은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한다’는 내용이었다. 국본은 6·29선언이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으로 이해하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로써 대통령을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민주화를 위한 다른 과제들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가장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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