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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부정선거

대대적인 부정선거, 이승만 정권 붕괴의 불씨가 되다

1960년

3‧15부정선거 대표 이미지

3‧15 부정선거 당시 선거 포스터

국가기록원

1 개요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일컬어 3‧15부정선거라 부른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내무부 조직, 정치깡패, 외곽단체 등을 동원해 총체적인 대규모 선거 부정행위를 기획‧실시했다. 이는 4‧19혁명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2 부정선거의 배경

이승만 정권의 권력 강화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자에 대한 지지로 표출되었다.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조봉암 후보의 득표율은 30%에 육박했고, 같은 날 치러진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 민주당 후보가 이기붕 자유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더불어 1958년 5월 2일 치러진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서울 지역 16개 의석 중 단 한 석을 획득하는 데 그쳐, 자유당에 대한 민심의 이반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정권 유지에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1960년 예정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의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3 부정선거의 준비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선거 대책을 세워나갔다. 3월 20일 이승만은 내무부장관에 최인규를 임명하고, 같은 달 대통령의 특명 사항과 공무원 선거 대책 등을 담당하는 내무부·외무부·재무부·법무부·교통부·체신부 장관으로 구성된 6인위원회를 조직했다.

최인규는 1958년 5월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정부의 요직을 맡아왔으며 오로지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치는 인물로 유명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공무원들은 대통령선거에 있어 선거운동을 해도 관계없’으며, ‘이것이 나의 시정방침의 기본’임을 천명함으로써 공무원들의 선거개입 계획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3월 26일 치안국장을 이강학으로 교체하고 각 도 경찰국장 및 총경급 인사를 대폭 물갈이했다. 또한 5월 중 경북‧강원‧전북‧전남‧제주 지역의 도지사도 새롭게 임명해 선거체제에 돌입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유당은 6월 29일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며 빠른 선거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1959년 6월 5일 경북 영덕과 강원 인제에서, 6월 23일에는 경남 울산 을구와 경북 월성군에서 재선거 또는 일부 재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들은 일종의 부정선거 예행 연습으로 자유당 후보는 어느 지역에서나 압승할 수 있었다.

1959년 11월이 되면 최인규는 각 시도 경찰국장, 사찰과장 및 경찰서장, 시장, 군수, 구청장 등을 내무부로 수시로 소환해 공공연하게 선거부정을 독려했다. 그는 12월 5일 국회 예결산위에서 “대통령에 충성하지 않는 공무원은 정부에 둘 수 없다”고 강하게 발언했다. 12월 22일 자유당 중앙위원회는 ‘명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기붕 양씨를 기필코 정·부통령에 당선되도록 노력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자유당은 경찰뿐만 아니라 외곽단체들과 여러 비공식적인 폭력조직들까지 동원했다. 대표적인 단체는 ‘대한반공청년단’으로, 1959년 8월 12일 대한반공청년단 단장을 제4대 민의원 신도환으로 교체하고 9개의 반공 청년단체를 흡수‧통합시켰다. 이들은 정부와 자유당의 비호를 받으며 선거 과정에서 폭력파괴 활동을 벌였다. 문화예술계도 동원되었는데, 1959년 3월 임화수가 조직한 반공예술인단은 선거 과정에서 선전을 담당하며 명백한 사전 선거운동을 펼쳤다.

자유당은 엄청난 선거자금도 조성했다. 자유당은 1959년 9월부터 기획위원회를 구성해 위원장에 한희석이 취임했고, 선거자금 조달 및 부정선거 관련 대책 확립을 위해 1960년 1월 초부터 매일 1~2회씩 회합했다. 혁명재판 기록에 따르면, 1960년 2월 24일 자유당 기획위원회 소속 한희석, 자유당 총무위원장 박용익은 선거운동 본부인 반도호텔 809호실에서 최인규 내무부장관과 이강학 치안국장을 만나, 11억 1천만환을 내무부 치안국에 교부하기로 합의했다. 이 금액은 25~26일 산업은행, 제일은행, 서울은행의 융자를 통해 조달되었다. 또한 2월 28일에는 한희석, 박용익, 내무부 지방국장 최병환이 회합해 내무부 지방국에 2억 4천만환을 교부하기로 합의했고, 이 금액은 이튿날인 2월 29일 제일은행의 융자를 통해 조달되었다. 이 엄청난 선거자금은 정부와 결탁해 혜택을 본 재벌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유권자를 매수하거나 동원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 1월 23일에는 경북 영일‧영주 재선거를 통해 부정선거 예행 연습이 또 한 차례 진행되었다. 투표 개시 이전 자유당에 기표한 투표용지 40%를 투표함에 미리 넣어두는 ‘4할 사전투표’, 3명·9명이 짝을 지어 조장이 기표 사실을 확인한 후 자유당 선거위원의 검수 끝에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는 ‘3인조·9인조 공개투표’가 실시되었고, 이러한 수법은 이후 3.15부정선거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이와 같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계획적인 부정선거 방법은 1960년 3월 3일 민주당에 의해 폭로되었다. 민주당은 자유당의 경찰‧공무원 선거대책 비밀공문 자료를 공개했고 이는 주요 언론에 그대로 기사화되었다. 그럼에도 자유당은 즉각 반박 담화를 발표하고 부정선거 방침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정부와 자유당이 상상 이상의 부정선거를 계획하는 동안에도 야당인 민주당은 아무런 대책도 수립하지 못했다. 민주당에서는 정·부통령 후보 결정 문제를 둘러싸고 조병옥을 지지하는 구파와 장면을 지지하는 신파 간에 치열한 갈등이 지속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은 비로소 당대회를 열고 구파의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신파의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각각 지명했다. 그럼에도 당의 내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렇게 야권의 선거 대비가 내부 사정으로 늦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12월 기자회견에서 조기 선거 실시를 언명했다. 민주당 내의 불신과 갈등을 이용하려는 이승만의 속내가 반영된 것이었다. 또한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의 병세도 이승만에게 좋은 기회였다. 조병옥은 1960년 1월 29일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면서 조기 선거를 반대했다. 그러나 정부는 2월 3일, 기존 5월보다 이른 3월 15일을 선거일로 공고했다. 결국 2월 15일 치료 중이던 조병옥이 사망하고 야권의 대통령 후보가 사라지면서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 되었다. 이제 선거의 초점은 부통령선거로 이동하게 되었다. 정부와 자유당, 그리고 경찰은 이기붕의 확실한 부통령 당선을 위해 선거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정부와 자유당은 선거운동 기간 내내 노골적으로 야당을 탄압하고, 후보자 및 유권자에 대한 테러를 묵인했다. 2월 29일,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3월 2일 서울시 소재 한강백사장 선거연설회 장소 사용 허가가 자유당 기획위원회의 압력에 의해 취소되었다. 3월 9일에는 민주당 여수시당 재정부장 김용호가 깡패의 구타로 사망했고, 3월 10일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서 공개투표에 반대하던 민주당원 이상근이 그 지역 반공청년 단장에게 살해되었다. 민주당 중앙당이 3월 14일 발표한, 자유당 및 정치깡패의 테러에 의한 민주당원 부상자는 56명에 달했다.

4 3‧15부정선거 당일

3월 15일 선거 당일의 모습은 최인규가 기획한 그대로였다. 전국적으로 대리투표, 사전투표, 무더기 투표, 3인조 공개투표가 진행되었으며, 민주당 참관인의 투표소 입장 및 참관 방해, 유권자와 취재기자 폭행, 번호표 미교부 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자유당 완장부대와 경찰, 반공청년단은 곳곳에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또한 민주당 경남도당은 오후 1시 30분에, 민주당 중앙당은 오후 4시 30분에 선거 무효 성명을 발표했다. ‘3.15선거 불법·무효 선언문’에 명시된 부정선거 해당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헌법정신에 위반되는 조속(早速) 선거
2. 야당계 인사 입후보등록의 폭력 방해
3. 무수한 유령유권자의 조작
4. 야당 선거운동원의 살상 자행
5. 대다수 참관인 신고의 접수거부
6. 신고된 소수 참관인의 입장 거부 또는 축출
7. 헌병, 경찰, 폭한(暴漢)에 의한 공포분위기의 조성
8. 기권 강요
9. 투표 개시 전에 4할 무더기표 기입
10. 투표함 검사 거부
11.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12. 3인조 강제편성 투표
13. 4할 공개투표의 강요
14. 공개투표 불응자에 대한 상해
15. 집단 대리투표

당일 오후 광주에서의 시위를 시작으로, 이튿날부터 4·19혁명일 전야에 이르는 시기까지 민주당 서울 중앙당부 및 지역 당원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유효투표 수의 88.7%에 해당하는 960여만 표를, 이기붕은 79%에 해당하는 830만여 표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은 3월 18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선거 무효 선언문을 낭독했고, 야당 의원이 총퇴장한 후 자유당 단독으로 정·부통령 당선자를 공표했다. 그러나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은 이미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선거 당일 마산지역에서 발생한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4·19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5 부정선거 관계자 처벌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된 후, 최인규는 5월 3일 부정선거를 총지휘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5월 4일 치안국장 이강학, 5월 7일 자유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한희석이 구속되었다. 1960년 7월부터 3·15부정선거 관계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재판이 착수되어 선거 실행 관계자로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 전 내무부차관 이성우, 전 치안국장 이강학, 전 내무부 지방국장 최병환이 기소되었다. 부정선거 자금 관계자로는 전 재무부장관 송인상, 전 자유당 총무위원장 박용익, 전 한국은행 총재 김진형, 전 산업은행 총재 김영찬, 전 한국은행 부총재 김영휘, 배제인이 기소되었다. 이밖에 기타 자유당 관계자 및 국무위원, 전 서울시장 임흥순 등이 구속되었다.

그러나 1960년 10월 8일, 4월 19일 경무대 앞 발포사건 관련자 2명을 제외한 부정선거 관련자에게 가벼운 형벌이 선고되자 여론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60년 12월 13일 반민주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12월 31일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이 공포되었다. 1961년 4월 17일 특별재판소에 의한 3·15부정선거 내무부 관련자 1심 판결을 통해, 최인규에게는 사형을, 이강학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이후 자유당 관련자 1심 공판이 진행되던 도중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다.

이후 군사정권은 7월 1일 「특별법의제에 관한 법률」에서 제2공화국 시기 부정선거 관련 처벌법을 이어받는다고 천명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7월 21일 「특별법운영에 관한 규칙」을 통해 부정선거 관련자 중 범죄의 구체적인 사실이 무거운 인사만 처벌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9월 20일 혁명재판소는 최인규, 이강학, 한희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중 최인규에 대한 사형은 당일 서울형무소에서 집행되었다. 다른 관련자들도 실형을 받았으나 일부는 1963년 5.16 2주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기소되었던 다른 인원들도 1963년 11월 25일 정치범 석방 대상자”로 분류되어 대부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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