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해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를 5·10총선거라고 말한다.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유엔은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최후 노력인 남북협상마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5·10총선거는 예정대로 치러졌다. 이로써 제주도 2개구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어 제헌국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외무장관이 모여 결정한 바에 따라(모스크바3상회의)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반탁투쟁을 벌인 정당·사회단체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상이한 태도 및 냉전의 격화로 인해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10월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한국에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통합정부를 수립한다는 당초의 목적이 무산된 것이었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정체 상태에 빠질 무렵부터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서 다루고자 준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9월 중순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미국의 행동은 소련뿐만 아니라 영국과 중국의 동의도 받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은 실질적으로 남과 북에 두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의미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유엔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권고했다. 유엔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The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이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되었다. 우크라이나도 지명되었으나 참여를 거부했다.
위원단은 1948년 1월 남한에 도착해 덕수궁에서 첫 회합을 갖고 남한 지도자들과 함께 선거 감시 및 관리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 측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출입을 거부하면서 유엔총회에서 결의한 전국 총선거는 불가능해졌다. 위원단은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인지 심의했지만 내부적으로 의견이 갈렸고, 결국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유엔총회에 자문을 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유엔소총회는 격론 끝에 1948년 2월 26일 선거 가능 지역, 즉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권고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통과시켰다. 캐나다와 호주는 남한만의 선거가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북한 지역의 선거를 유보하고 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유엔소총회의 결정은 남한 정계에 상당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면서 남한의 정치지형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진영은 유엔소총회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때부터 펼쳐오던 단독 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남조선노동당 등 좌익세력의 경우, 미소 양군의 철수와 유엔을 배제한 전국총선을 주장하면서 선거를 거부했고, 이를 무산시키기 위한 본격적인 단선 저지 투쟁에 들어갔다. 이에 선거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3월 이후 전국 각지에서 단선을 반대하는 시위와 공공 관서 피습이 잇달았으며, 선거 기간에는 선거사무소 파괴, 주택 방화, 철도노선 파괴 등의 무력투쟁이 벌어졌다.
한편, 김구·한국독립당과 김규식·민족자주연맹 세력은 남북지도자회담에 의한 통일국가수립 협상, 즉 납북협상을 제의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미 소총회 결정이 있기 전부터 단선 반대 국민운동의 전개를 협의 중이었다. 이후 유엔 소총회 결정이 국내에 전해지자 김구는 이에 대해 ‘조선 문제에 대한 유엔 결정에 위배되는 남조선 단선을 실시키로 한 것은 민주주의의 파산을 세계에 선고한 것’이라며 비판했다.
분단의 위기가 날로 깊어가는 가운데,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2월 16일 북조선노동당 위원장 김두봉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에게 남북 지도자 회담을 성취시키자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발송했다. 북측은 3월 25일 밤 평양방송을 통해 유엔 결정과 남조선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통일적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같은 날 김일성, 김두봉이 김구, 김규식에게 보낸 서한에는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별개로 남과 북의 소규모 지도자 연석회의를 4월 초에 평양에서 개최하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로써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최후 노력인 남북협상이 성사되었다.
남북대표자연석회의는 4월 19일의 예비회담, 4월 19일, 21~23일 4일간의 본회담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소련과 북한은 북한의 독자적인 정부수립을 이미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고 남북대표자연석회의를 북한의 정권 수립 명분을 확보하는 데 활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북에 이용당하지 않으려했던 김구와 김규식은 이 회의에는 형식적으로만 참석하거나 아예 불출석했고,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인 요인회담에 기대를 걸었다. 여러 형식의 회의 끝에 4월 30일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성명서의 핵심은 미소양군의 철수, 북한의 남침에 대한 우려 불식, 외군철거→전조선 정치회의 소집→임시정부 수립→보통선거에 의한 입법기관 설치→헌법제정→정식정부 수립, 남한의 단선 단정 반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형식적이었던 남북협상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막는 데에는 역부족이었고,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한 채 5·10총선거가 예정대로 치러지게 되었다.
1948년 3월 10일부터 선거에 관한 협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기존에 선거일을 5월 9일로 발표했으나 그날이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기독교인들이 반발하자 5월 10일로 선거일을 변경했다.
1948년 3월 17일 미 군정법령 제175호로 「국회의원선거법」이 공포되었다. 이 선거법은 미군정 하에서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기초·제정해 1947년 9월 3일에 공포한 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5호 「입법의원 선거법」을 골자로 했다. 이 선거법에 의하면, 선거권은 만 21세, 피선거권은 만 25세에 달한 자에게 부여되었고, 이때 친일행위가 뚜렷한 자들에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선거구는 한 선거구에서 의원 한 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를 채택했으며, 선거인명부는 선거인의 자진 등록으로 작성되었다. 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이었다. 선거법을 놓고 본다면 5·10총선거는 직접·평등·비밀·자유 원칙에 입각한 민주주의 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선거 관리를 위해 국회 선거위원회가 공포되었다. 위원으로는 장면, 김동성, 최규동, 이갑성, 백인제, 박승호, 이승복, 전규홍, 김지환, 노진설, 윤기섭, 현상윤, 김법린, 오상현, 최두선 15인이 임명되었다.
1948년 3월 30일부터 4월 9일까지 동사무소, 학교, 회사 등지에서 선거인 등록이 실시되었다. 등록한 유권자는 모두 784만 여명으로, 유권자 대비 등록률은 79.9%였다. 대체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선거가 치러진 결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등록자의 95.5%라는 높은 참가율을 보였다고 발표했다.
5·10총선거는 총 국회의원 수 300명 가운데, 북한 지역에 의석수 100명을 배당하고 남한 지역 의석수를 200명으로 할당해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이에 4·3사건으로 치안 문제가 있던 제주도 2개구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선거는 좌익과 대다수의 중간파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익의 독무대인 것처럼 보였다. 후보로 모두 948명이 출마해 평균 4.7:1의 경쟁률을 보였다. 48개의 정당·단체들이 난립하면서 10명 이상의 후보를 낸 정당·단체는 6개 불과했고, 더욱이 10명 이상의 당선자를 낸 정당·단체는 3개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 한국민주당이 29석, 대동청년단이 12석, 조선민족청년단이 6석, 기타 13석으로 나타났다. 반면, 무소속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총 415명이 입후보해 85명의 당선자를 냈다. 한민당이 풍부한 자금력과 강력한 조직력으로 선거를 치른 것을 감안한다면, 받아든 성적표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무소속 당선자들의 상당수가 독립촉성국민회나 한민당 계열이 많아서 실제로 무소속에 포함된 한민당계 인물을 포함하면 70명 내외로 분류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제헌국회의 구성은 크게 한민당 계열, 이승만 지지세력, 김구·김규식 성향의 무소속 등 3파로 분할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5·10총선거는 성별과 신앙을 묻지 않고 만 21세 이상의 성인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진 남한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였다. 보통선거의 실시가 영국·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전후해 이루어졌고, 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야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남한의 보통선거 실시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식민지기부터 독립운동가들이 지향해 온 보통선거의 실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5·10총선거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라는 점에서 분단국가의 시작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이었다. 선거 이후 1948년 5월 31일 첫 제헌국회가 열려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와 김동원이 선출되었다. 7월 17일 제헌헌법이 제정·공포되었으며 7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취임했다.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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