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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

군이 정부를 장악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대표 이미지

5·16 군사정변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시가행진을 보고 있는 박정희와 그 일행

개인소장

1 개요

1961년 5월 16일에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모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일부 군인들이 제2공화국의 장면 정부를 물리력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이다. 이로써 박정희 그룹은 1963년 대선을 치르고 민간정부로 전환되기 전까지 군사정부의 형태로 한국사회를 통치했다. 이처럼 1960년 시민들이 4·19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지 1년 남짓 뒤에 발발한 군사 쿠데타는 한국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과정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다. 또한 장기간 군사 엘리트들의 집권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한국사회 전 부문에 걸쳐 뿌리깊은 군사주의 문화가 자리잡는 데 영향을 미쳤다.

2 군사정변의 배경

이 사건이 발생한 배경은 당시의 국내외 정치·사회적 동향과 한국군 내부의 문제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국내 정치에서는 이승만 정권을 종결시킨 4·19 혁명 이후 한국사회는 오랜 기간의 독재정치가 끝난 만큼 다양한 집단의 정치적 요구가 표출되었고, 이승만 정권 당시의 학살이나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터져나오던 상황이었다. 쿠데타 이후 박정희 그룹은 이 시기의 상황을 분열, 무능, 혼란 등의 몇가지 전형적인 키워드로 규정하였으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장면 정권을 표적으로 삼은 것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다만 장면 정부가 이승만 정권 청산요구에 다소 미온적이고 보수적으로 대처했다는 점 역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신·구파간 갈등으로 분열된 기존 민주당 세력보다 혁신계 정치세력이 부상했다.

4·19의 주도세력으로 자임했던 학생들 역시 적극적으로 새로운 의제를 제출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려 했는데, 특히 한국사회 후진성을 지적하며 국민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을 추진했으며, 이것이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는 반미 자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중립화통일론 등 그간 금기시했던 통일 논의가 시작된 시기일 뿐 아니라, 남북한 대표를 공동으로 유엔에 초청하자는 제안이 나왔기 때문에, 학생 운동계에서도 남북 문화교류를 제안할 정도였다. 언론매체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한데다 언론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승만 정권 시기 강력했던 어용노조의 반작용으로 노동조합 운동도 활발해졌다. 이처럼 여러 부문에 걸친 사회운동이 활성화되자 민주당 정부는 집시법이나 반공법을 추진하여 대응하려다 이른바 2대 악법 반대투쟁에 부딪히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이 시점에 공화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행정부에서 민주당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행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1961년 출범한 케네디 행정부는 아이젠하워 시기 뉴룩(New Look) 정책의 결과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되었음을 지적하면서, 다시금 경제원조에 방점을 두되, 무상원조보다는 차관에 비중을 둔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채택했다. 특히 로스토우(Walt Whitman Rostow)의 주도 아래 등장한 저개발국 경제개발론이 등장하였고, 제 3세계에서 미국식 개발모델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 냉전 하 체제경쟁에서 관건으로 여겨졌다.

이런 관점에서는 현지의 상황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개발모델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의 원칙조차 타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본국에서는 개별 국가들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역학(area studies)이 발전했고, 이와 동시에 현지에서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상황을 통제하면서 자본 흡수력을 높이고 경제개발을 추진할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필요해졌다. 친서구적이고 반공적이면서도 전근대적인 생산관계와 단절된, 일정한 수준의 근대교육을 받아 조직과 행정력을 보유한 집단으로 현지의 군(軍)이 주목받았다. 미국 정부는 한국사회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통제력이 한계에 다다른 1950년대에 이미 이승만을 대체할 수 있는 한국군 내부 지도자들을 물색한 바 있다.

한국군 역시 6·25전쟁을 거치며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음에도, 휴전으로 전투 활동이 중지되면서 내부에 승진 적체 현상이 발생했다. 특히 당시 드물게 근대 교육을 받고 근대적인 조직생활을 경험한데다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장교들은 엘리트 의식과 함께 관료 및 특권층에 대한 분노가 심했다. 이들은 4·19 이후에 군 내부에서 정군(整軍) 운동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하극상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장면 정권이 출범한지 보름여만인 1960년 9월 이미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여기에서 쿠데타에 필요한 구체적인 준비와 역할 분담을 했고, 조직적으로 동조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3 군사정변의 전개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지휘로 해병대가 출동하게 된 것을 기점으로, 해병대와 공수부대가 한강 대교에 도달하였으며,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헌병 제7중대 병력과 약간의 총격전 끝에 서울 시내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육군본부를 접수한 뒤, 주력은 서울시청에 진주하고,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앙방송국을 이날 오전 4시 30분경 각각 접수하였다.

방송국을 접수한 쿠데타 세력은 라디오 방송으로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 6개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혁명공약 첫머리에서 ‘반공을 국시(國是)로’ 한다는 점을 가장 먼저 내세웠던 것은 일반 국민은 물론 미국 측의 사상 검증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 또한 반공(反共)을 제외하면 쿠데타그룹의 정치적 입장이 동질적이지 않았다. 박정희 개인의 연설이나 저서에서 나타나는 주장을 살펴보면 기존의 반공주의자들과 달리 소련이 아니라 자국의 ‘민족성’에 분단과 전쟁의 책임을 돌린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과도기적, 행정적, 민족적,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데, 당대 인도네시아 수카르노(Achmed Sukarno)의 교도적(guided) 민주주의나 대만 장제스의 군정-훈정-헌정론과 유사성을 갖는다. 쿠데타 직후에는 이런 논리가 『사상계』의 장준하나 『민족일보』 등 대학가나 지식인층에서 호응을 얻기도 했다.

대대 단위까지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군 내부 쿠데타 발생가능성을 인지하고 본국에 보고까지 했던 상황이었으나, 발발 직후 쿠데타 세력과 공식적으로 선을 그었다. 당일 오전 10시 18분 매그루더(Carter Bowie Magruder) 유엔군사령관과 그린(Marshall Green) 주한 미 대사대리는 즉각 민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군 내부 질서유지를 요망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유엔군사령관에게 귀속되어 있었으므로, 매그루더는 본인의 권한을 침범당했다고 불쾌해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오전 11시 30분경 윤보선 대통령을 면담하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쿠데타를 진압하자는 강경책을 제시했으며, 19일 쿠데타 주도세력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 점을 문제로 삼았다.

쿠데타 직후 수녀원에 은신했던 장면 총리는 매그루더와 그린이 합법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직후, 미 대사관과 접촉하여 유엔군 사령관이 상황을 정리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매그루더는 미군을 직접 동원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일단 한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는, 내정에 개입하더라도 최대한 간접적인 방식을 취했던 것이 미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래서 유엔군 사령관은 이 경우에도 한국정부 총리나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한국군을 동원하려고 했다. 총리가 부재한 상태에서 군 통수권을 행사해야 할 대통령을 방문한 매그루더와 그린은, 윤보선으로부터 쿠데타 진압에 대한 반대의사를 전해들었다. 장면과 민주당 신·구파 갈등을 겪고 있던 윤보선은 쿠데타에 대해 정적이던 장면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 이틀 뒤인 18일에는 1군 사령관 이한림이 체포되었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결정적으로 장면 총리가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정권을 군사혁명위원회에 이양했다. 19일에는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쿠데타 지도부와 접촉했으며,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었다. 쿠바 피그스만 공격 때문에 정치적인 부담을 지고 있던 미국 정부는 일관되게 불개입 태도를 유지했으나, 사실상 현상유지 입장에 가까웠다. 유엔군 보좌관이었던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신임 주한미국대사 버거(Samuel David Berger) 등 현지에 파견되어 있던 관계자들이 지지를 해주면서 미국정부는 20일에 쿠데타를 추인했고. 같은 날 최고회의는 혁명내각을 발표하고 중앙정보부를 구성했다. 이후 7월에는 미국 국무부가 공식적으로 군사정부 지지성명을 내었다.

4 군사정부에서 제 3공화국 탄생까지

초기에 최고회의는 의장으로 참모총장 장도영을 내세웠지만 장도영은 곧 반혁명 음모 사건으로 축출되고, 실세이던 박정희가 전면에 등장했다. 이들은 쿠데타 직후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일련의 ‘정화’ 조치를 시행했다. 정치계에서는 구 정치인들을 정계에서 축출해야 된다는 명분으로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서 정당·사회단체를 전면 해체했다. 한편으로는 사회정화를 내세우면서 병역기피자·밀수·조직폭력배 등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강력한 단속을 시행했다. 또한 언론정화라는 명목으로 언론매체를 통폐합하고 공보부를 신설하여 검열과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농촌지역의 지지를 염두에 두고 농어촌 고리채 정리사업을, 생활개선·정신개조 등의 목적으로 재건국민운동이라는 이름의 대중동원 정책을 추진했으나 실효성 있는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서서히 혁신계를 숙청하고 장면 정권 시기 생겨난 유족회들을 탄압하며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민주당 정권 당시 추진했던 반공법을 제정하고, 국가보안법도 개정했다. 또한 쿠데타 3달 뒤인 8월,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민정 이양을 예정보다 2년 뒤로 미루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민정이양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군사정권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1961년 말 박정희 의장을 미국에 대표 자격으로 초청하여 쿠데타 세력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민정 이양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이들도 결국 미국의 집중적 압력과 국내 정치세력의 반발로 민정 이양 일정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1962년 12월 17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권력구조를 대통령제로, 선거제도를 제1공화국의 직접선거제로 되돌려 놓은 형태였다. 부통령제를 없애고 국무총리제를 설치했으며, 비례대표제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3공화국 헌법은 오늘날 6공화국 헌법과 유사성을 갖는다. 곧이어 1963년 2월에는 김종필 주도로 1년 여간 물밑에서 준비를 거쳐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박정희 그룹이 주가조작, 횡령을 통해 정치자금을 착복한 정황이 드러났고, ‘구악 뺨치는 신악’이라며 대중들의 기대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963년 8월, 박정희는 전역해서 민간인 신분으로 공화당 총재직과 대선후보를 수락했다. 그 해 10월 15일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는 민주정의당 윤보선 후보를 아슬아슬하게 이기고 명실상부한 민간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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